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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선옥 시인 / 그 골목 끝
자귀나무 섬세한 꽃손들 일제히 손을 흔든다 금방 골목을 돌아 흐르는 햇볕 알갱이 흠씬 스며들어 누그러지면 간지러워라 드디어 더듬이를 펼치는 연보라색 맨발 어느 집 담장 안에서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능소화 꽃술처럼 발갛게 들뜬 바람결 달착지근하다
저 건너 키 큰 단풍나무 성큼 건너와 내 어깨에 손 얹을 때 분수처럼 후두둑 부서져 날려라 비릿한 풀 내 다만 파랗고 파랗고 파랄 뿐인 인주이씨 문중 산바라지 보자기에 이제 막 첫 몸을 푸는 젊은 매미의 외마디 산바라지 보자기에 식지 않은 오후를 싸며 아직 만나지 못한 것들을 가만히 꼽아보는 주홍색 날들 그런데 내게만 너무 낯선.
-시집 <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 2012년
배선옥 시인 / 물안개 있는 풍경 -시영에게
멀리 마을선 잠 설친 개 짖고 팔짱 끼고 서성이는 뒷산 등에 업고 한꺼번에 활짝 꽃피우는 서리 잠 덜 깬 발걸음 골라 디디느라 바짓가랑이 젖던 도량석에도 어느 틈 뒤에 와 섰던
봤니 피하지 못하고 발아래 으깨지던 풀잎 사람 사는 일도 그럴 거야 그래도 짓이겨진 시간서 배어나온 빛 도랑 이루고 개울 만들어 흐를 테지
전부 자기 것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지만 봐봐, 햇살 반짝이면 순식간에 흩어져버리잖니 그러니 얘야, 눈물 닦으렴
전설처럼 댓돌에 얹혀있던 흰 고무신 같은 저수지 너머 초록 연기들 주섬주섬 켜는 기지개 눈부시다 그러니 얘야, 기다림은 멈추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배선옥 시인 / 요요
가까이 있음 그리고 한 없이 멀리 이것이 그대와 나 사이의 거리입니다, 다가설 수 없는 다가올 수 없는 서로 이렇게 쭉 함께 그리고 따로 걸어가야 할 차라리 이 길을 끝내고 싶었지만 그리하여 내 영혼이 이젠 그대에게서 벗어날 수 있길 간절히 소원했지만 늘 이만큼의 거리로 되돌아가 버리고 마는
-시집 『오래 전의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다』에서.
배선옥 시인 / 나의 연애는 아직도 푸르다
나는 덤불 속 깊숙이 숨어 사냥감을 기다리는 올무 풍화작용으로 가슴선이 흐트러진 암각화 속 젊 은 여신 늙은 사냥꾼의 근육 위에서 좌악 펼쳐지던 질투가 석순처럼 자라 새로운 암호가 된 새벽기도 그러므로 나는 너무 일찍 눈이 먼 여자
손끝으로 벽을 더듬어 완성하지 못한 주문을 유추해 내느라 빈 동공은 더 깊어져가고 얇은 수맥을 따라 이마 위로 떨어져 내리던 언어가 마른 입술을 축이면 입사각을 한껏 키문 오후 빛살이 닥트 핀처 럼 꽂히는 거기
암각화 위 저 붉은 꽃잎
-《다층≫ 2020. 봄호
배선옥 시인 / 학익동 편지 ㅡ거기, 이제 너는 없고
내 구석기의 동굴엔 자치기하는 사내애들을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던 골목. 어느 집 담장 안에도 활짝 핀 꽃따윈 없었고 은자네 집 앞 플라타너스가 부는 휘파람 속에선 멀리 쫓겨난 바다가 사라진 길을 찾으며 울었다. 까치는 날마다 새집을 짓고 낮은 추녀 끝 사람들의 마당을 내려다보며 으스댔지만 바카스 상자에 담긴 태아가 장맛비에 휩쓸려 와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절을 넘어, 아무나 출입금지라는 최첨단 아파트 어디쯤 이젠 등본에만 남은 내 유년의 배꼽. 인천시 남구 학익1동 208번지. 그리운 이름 모리포.
배선옥 시인 /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바다의 저고리 앞섶을 헤치고 뛰쳐나와 줄 풀린 개처럼 겅중거리는 갯내 밀물이 도착하기 전 저녁사냥을 서둘러야 해 천천히 그러나 음흉하게 움직이는 물살을 헤아려 잽싸게 날개를 펼치고 바다 속으로 가라앉는 하루를 낚아채 물어 올린다 낚시바늘보다 더 억센 부리에 붙들린 일상이 몸부림을 치면 그 서슬에 놀라 먼지처럼 부서져 날리는 노을 자동지급기에서 인출해갈 안락한 저녁과 풍요로운 식탁을 숫자판을 꾹꾹 눌러 가늠해본다 이른 어둠 속에서 하얗게 초저녁 달 나타나면 조개젓 파는 할머니 비로소 허리를 편다 6시다
-시집 <오렌지모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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