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현석 시인 / 자코메티의 언어로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0.

조현석 시인 / 자코메티의 언어로

 

 

출근 후 컴퓨터 바탕화면의 작은 모래시계만 응시한다

작은 구멍 비집고 빠져 나가려는 비만의 모래들

언제 멈출지 모를 셀 수 없는 불안 하나하나 헤아린다

 

잔혹한 햇살, 배려 없는 그늘, 뜨거운 바람의 채찍이여

땡볕 속 지치지 않고 말라갔으니 나 죽기 직전이다

온 뼈마디마다 살려 달라, 고왔던 청춘 돌려 달라 소리지른다

 

모래가 다시 돌아올 날 기다리며 은하수 위에서 노를 저었다

그 사이 숨 쉴 틈 없이 돌아나가는 회오리의 생각을 나무란다

하루의 청춘 홀랑 태워 뼈만 남은 퇴근길은 지독하게 아득하다

 

말라비틀어진 생각 하나가 살찐 몸뚱어리를 측은해 한다

 

 


 

 

조현석 시인 / 벙어리개

 

 

내가 낡은 개구리복을 입고 삼 년 만에

돌아온 다음 날부터 집 대문에

개조심이란 표어가 찬란하게 나붙었다

식구들은 모두 변해 있었다 밤잠 없는 내가

지켜보면 어긋나게 돌아가는 잠의 톱니바퀴 속에서

밤새 공전하다가 눈을 뜨는 새벽이면

왜 그리 바쁜지

아버지는 앞코가 벗겨진 작업화를 신고 제일 먼저

공장으로 나간다 잠시 후 잠부스러기를 털며

밥도 굶고 새벽반 보충수업 때문에 쫓기듯

바람과 같이 대문에서 사라지는 고3 여동생

2부 야간대학을 다니면서도 아홉 시 이전에

어김 없이 외출하는 남동생 그리고

덩그라니 남은 어머니와 나

오늘은 별다른 일 없지, 먼저 선수를 치는 어머니

파출부 일이 없는 날에도 친목계 모임이 있다며

우중충한 낙엽 무늬의 옷을 입고선

집 잘 지켜라, 점심은 찬밥에 라면이라도 끓여......라

소리 뒤에 남은 고요를 벌렁 누워서 지킨다

분단의 철책선을 오가며 나라를 지키던 내가

군복을 벗고 예비군으로 더 훌륭한 일을 하다니

숨막히는 고요 속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지치면

고요는 나를 꽁꽁 묶어서 잠으로

끌고간다 뒤엉켜 구르면 구를수록 더욱 조여오는

 

해질녘 고요에서 깨어난 나는

잔털 붙고 냄새나는 담요쪼가리에 몸이 감겨

낑낑대고 있었다 벗어나려 몸부림하면

더욱 감겨오는 담요와 잠기는 목청

 

 


 

 

조현석 시인 / 풍장 뒤에 쓴 자서전

 

 

 전생이 빛이었는지 그림자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빛이었다면 더 밝게, 그림자였다면 더 어두워져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만 흐르는 시간의 틈새를 더 자세하게 읽거나 기억하지 않을까

 

 바람보다 몸이 가벼워질 때쯤을 기억한다 기억하는 만큼 지워진다 죽기 좋은 날이라는 음성이 들렸다 세 들어 살던 하늘 한 조각 비워두었을 뿐 지상 어느 곳에 머물기를 꿈꾸지 않았으므로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뼛가루로 날려도 좋을 사막의 노을 보여주는 사구(沙丘)에 앉아 편지를 쓴다 천 년에 한번 내린다는 눈까지 맞는 운 좋은 여행자, 해질녘 붉게 흩날리는 황금 눈으로 자서전을 덮는다 걸으면 걸을수록 시선이 자꾸 허공에 닿는지 알 듯하다

 

 


 

 

조현석 시인 / 왕십리

 

 겨울 추위 매서운 입춘 전 희수를 맞은 아버지의 이사로 왕십리와의 인연은 끊겼다 반세기 전 이불짐 이고 옷보따리 메고 두 동생 고사리손 붙잡고 첫발 디딘 곳, 초등학교 4학년 이후 중고교 졸업 때까지 신당동 왕십리동 도선동 마장동 사근동 행당동 응봉동... 실핏줄처럼 좁은 골목골목 조석간 신문 끼고 새 소식 배달하던 곳, 앞이 보이지 않는 모래바람 극성맞은 중동에서 수년간 오일달러 벌던 아버지가 앰뷸런스에 실려 김포공항 입국장 통과해 돌아온 곳, 기름범벅 공고생이 쪽방에서 밤새워 시 쓰던 곳, 그러면 배곯는다 염려하던 어머니가 덜컥 시인이 된 아들 동네방네 자랑하던 곳, 군대 제대하고 계약직이던 아들이 결혼해 첫 손자 보여준 곳, 뇌졸중으로 쓰러진 어머니를 백 일만에 밤새 비 오던 부처님 오신 뒷날 여윈 곳, 까닭 모를 불이 나서 살림살이 홀랑 타버린 곳........

 어머니 보내고 20년 넘게 홀로 살던 아버지의 이삿짐을 정리한다 장롱 침대 냉장고 세탁기 티브이 가스레인지 전기밥통 프라이팬 등과 재활용조차 안 되는 잡동사니들 모두 버린 곳, 처음 올 때처럼 이불 한 채와 옷보따리, 족보 한권과 모친 위패, 제사용 목기와 향로만 승용차 뒷자리에 싣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 곳, 복구된 청계천으로 아직도 청빈이 끝없이 줄줄 흐르는 곳 왕십리

 

 


 

 

조현석 시인 /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 스케치

 

 

 1

 한밤의 심한 갈증, 깨어나, 얼어붙은 빗장을 연다, 꿈꾸는 철길, 달빛 내리고, 이상하다 숨죽인 나는, 오랜 갈증을 느끼며, 소양교 난간 나트륨 등빛의 겨울을 뒤집어쓴 화가, 만난다 바람이 지난 후

 저절로 닫히는 덧문, 내 혀가 끼인다

 

 2

 달빛 없는 밤

 서럽게 운다, 절반의 어둠이 가리운 문 틈에 끼인 붉은 혀와 초저녁부터 바람에 술렁이던 마을을, 문 밖 세상으로 돌아간 화가의 뒷모습을 생각하면

 애당초 말을 하고 싶었다

 짧은 혀 끝으로 더듬거리는

 말을 하고 싶었다

 겨울은 언제 시작하였는지, 눈을 감자

 잠의 바닥에 깔린 들판을 가로질러

 

 밤새워 폭설이 덮이고, 이미 낮은 세상은 더 낮아지고, 길눈의 거리에서 오도가도 못하며 몇 겹의 죄를 이고 지금 나는 섰는가

 

 3

 입을 굳게 다물어도 나의 고백은 쏟아지고

 얼어간다, 놀라운 폭설이 그친

 하늘은 고요하다, 붐비던 개찰구를 빠져나간

 나의 꿈은 검은 비듬처럼 잎 지는

 텅 빈 驛舍에서 겨울로 지고 있다

 

 4

 불투명한 유리가 깔린 땅 속으로 녹아내리는

 내 속울음이

 뿌리내리는 겨울숲 사이

 얼지 않은 물소리가 조심스레

 한 옥타브 낮게 늦은 오후를 가득 메우고

 짓눌린 오후를 떠다니는 아, 그, 그

 화가의 떠나지 않는 겨울

 숲, 낮게 내려온 하늘을 깡마른 손으로 더듬는

 겨울숲, 찾아드는 밤새떼, 종일 알 수 없는

 말만 하는 나무, 또 눈이 내리고

 숲에서 잃어버린 말이여

 

 나의 근시안에 각질의 어둠이 배고

 순간, 온 마을이 일제히 켜드는 불빛

 살아 있을 누군가의 지상에 덮인

 눈이 부시다 눈이 부시다

 

 


 

조현석 시인

1963년 서울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1988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에드바르트 뭉크의 꿈꾸는 겨울스케치』 『불법, …체류자』 『염소 울다』 등. 『사랑을 말하다』 등. 현재 도서출판  북인(BOOK IN)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