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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봉 시인 / 물의 신전(神殿)
지상의 거주자들을 위해 노래한다 산천 곳곳에다 공손히 햇살을 풀어 놓고 달디단 새들의 잠 속에서 끄집어낸 노래를 공중에 흩는다 어둠에 젖었던 대지의 입술에 자오록한 물안개에 싸인 늪의 가슴에 긴병꽃풀 같은 온기로 사랑의 기도를 바치는 것이다 비로소 지느러미 흔들며 입을 뻐끔거리는 물고기와 부화된 유충들의 오랜 믿음이 한 뜸씩 유영의 무늬를 수놓는 물의 성소, 이제 막 새순 틔우기 시작한 물오리나무 그림자가 받쳐든 몇 겹 파문 속으로 바람이 연둣빛 고요한 시간의 잎과 줄기를 퉁기자 은구슬 소리가 난다 너무 투명해서 눈이 아픈 이 광휘의 풍경을 나는 한참이나 바라보았거니, 1억4천만 년 전부터 물면은 햇빛 곧게 세워 이 신전을 만들었으리 이곳에서 평온의 샘은 솟고 휴식을 마친 철새들은 다시 여정에 오른다 우리는 모두 빛의 축복을 받은 동행자 자유와 방종의 긴 여정 뒤에 물이 얻은 안온 속에서 푸석푸석한 어둠조차 한없이 부드럽고 섬세한 은비늘로 파닥거리더니 꽃은 피고 나비는 환하게 나는 것이다 기슭에서 화석의 잠을 굴리는 고둥껍질 원시적 빗방울을 머금은 저층늪의 뿌리들 무수한 생과 멸을 끌고 온 세월이 사리알처럼 영롱해서 새삼 나는 짧은 일생을 활짝 펴 햇살에 비춰보는 것이다 가자, 희망의 층계를 올라 아침을 타종할 때 우리는 황금의 시간을 얻으리라 그대와 내가 열어가야만 할 세계를 위해 만다라를 공양하는 물의 신전 우포늪
배한봉 시인 / 광합성
햇볕 좋은 벤치에 앉아 그녀는 털모자를 벗는다. 비타민 얻으려면 광합성을 많이 해야 한다며 민머리를 손바닥으로 슥슥 쓸어본다. 그녀 몸에는 분명 광합성 일으킬 엽록체가 있을 것이다. 항암 치료 받느라 머리카락 다 빠진 그녀 얼굴이 오늘따라 더 핼쑥하다. 민머리 그녀를 둑길 저쪽 연인이 자꾸 흘깃거린다. 한겨울 추운 물가에 서 있는 댕기물떼새 같았을까. 얇은 투명 비닐 같은 이 가녀린 햇빛의 아름다움, 저 광활한 동양 최대의 철새 도래지 주남저수지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도 광합성하며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리라.
겨울,
우리에게는 더 긴 햇볕이 간절하다.
- 배한봉 시집 『육탁』(시인수첩) 중에
배한봉 시인 / 서귀포 외돌개
파랗게 올라가 하늘이 된 바다가 있다 파랗게 내려가 바다가 된 하늘이 있다
그 어느 옛날 그 어떤 전설이 바람의 형상을 새기고 눈비의 형상을 새겨서 바다 한가운데 돌섬 하나 세워 놓고 혀 밑의 노래를 꺼내 부르는 곳.
오름들도 알고 있고 바다를 깨우는 숨비소리도 알고 있지 천 개의 눈을 뜨고 바람을 보는 하늘, 천 개의 귀를 열고 눈비를 듣는 바다, 밤과 낮과 더불어 돌섬 머리에 그 어느 옛날 그 어떤 전설로 뿌리 내린 것을
나는 오늘 절벽 위에 서서 천 개의 눈을 뜬 장엄과 만나고 있다 천 개의 귀를 연 숭고와 만나고 있다
(제1회 칠십리문학상 당선작 : 서귀포칠십리문학상운영위원회, 2022. 9)
배한봉 시인 / 씨팔!
수업 시간 담임선생님의 숙제 질문에 병채는 <씨팔!>이라고 대답했다 하네 아이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으나 <씨팔! 확실한 기라예!> 병채는 다시 한 번 씩씩하게 답했다 하네
처녀인 담임선생님은 순간 몹시 당황했겠지 그러다 녀석의 공책을 보고는 배꼽을 잡았겠지 어제 초등학교 1학년 병채의 숙제는 봉숭아 씨방을 살펴보고 씨앗수를 알아가는 것 착실하게 자연공부를 하고 공책에 <씨8>이라 적어간 답을 녀석은 자랑스럽게 큰 소리로 말한 것뿐이라 하네
세상의 물음에 나는 언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을 외쳐본 적 있나 울퉁불퉁 비포장도로 같은 삶이 나를 보고 씨팔! 씨팔! 지나가네
배한봉 시인 / 그들이 황무지를 가진 것은
먼지 일으키며 차를 타고 달려온 그들은 늪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소문을 좇아 온 것이다 차 안에서 에어컨 바람이나 쐬면서 아주 경제적으로 1억4천만 년을 읽는다 풀벌레 소리 하나 들어보지 않고 우포늪 다 보았다고 혓바닥이 70만 평쯤 커져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이다 사막 같은 생각에도 돈만 투자하면 물웅덩이가 생기고 초원이 될 것이라는 말초신경을 가시덤불은 찌르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는 길이 아니라고 사람이 만든 길을 산기슭 땡볕 속으로 끌고 가버린다 그들은 잠시잠깐 소문을 확인하고 싶었겠지만 마음을 열지 않는 한 원시는 원시 속에 숨어 풀잎 하나 흔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이 모래바람 부는 황무지를 가진 것은 폭염 탓이 아니라 너무 오랫동안 문명에 길들여졌기 때문 구경하기 좋은 곳 어디냐는 그들에게 걸으며 느끼지 않고서는 늪의 정신 만날 수 없다고 왜가리가 나 대신 목을 쭉 빼고 울어주었다
배한봉 시인 / 얼음바위
용추계곡 바위 얼음 덮여 있다
흐르는 물을 붙잡아 허옇게 얼린 것은 바위 스스로의 침묵일 것이다 깊어서 무거운 나락으로 빠진 침묵,
침묵의 서늘한 힘이 스스로 전신을 꽁꽁 묶은 얼음 되었을 것이다
가벼워서 아픈 인생들, 그 발목을 그 숨길을 그 심장의 박동을
더는 함부로 나다닐 수 없도록 허옇게 얼린 바위 스스로의 처절한 침묵,
그 끝에서 마삭줄 물줄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침묵이 냉기의 극한에서 내뿜는 단 한 줄의 시구詩句 그 허옇고 긴 두루마리 문장에서 새나오는
시의 길은 이렇게, 차고 맑다 스윽, 벼린 칼날같이 내 목덜미 지나간다
배한봉 시인 / 통영의 봄은 맛있다
참 달다 이 봄맛, 앓던 젖몸살 풀듯 곤곤한 냄새 배인, 통영여객선터미널 앞 서호시장 식당 골목, 다닥다닥 붙은 상점들 사이, 우리처럼 알음알음 찾아온 객이, 열 개 남짓한 식탁을 다 차지한, 자그마한 밥집 분소식당에서 뜨거운 김 솟는, 국물이 끝내준다는 도다리쑥국을 먹는다 나눌 분 자 웃음 소 자, 웃음 나눠준다는 이 집 옥호가 도다리쑥국 맛만큼이나 시원하다고 웃음 짓는 문재 형 앞 빈자리에 젊은 부부 한 쌍이 앉는다 자리 생길 때마다 누구나 스스럼없이 동석하는 분소식당 풍경이 쌀뜨물에 된장 풀어넣은 국물 맛 같다 탕탕 잘라넣은 도다리가, 살큼 익은 쑥의 향을 따라 혀끝에서 녹는 통영의 봄맛, 생기로 차오르는, 연꽃처럼 떠 있는 통영 앞바다 섬들이 신열에 달뜬 몸을 풀며 바다 틈새 어딘가 숨어 있던 봄빛을 무장무장 항구로 풀어내고 있다 어어, 이것 봐라 내 가슴에도 툭툭 산수유 꽃이 피는가 보다 따뜻해진 온몸 가득 파랑처럼 출렁이는, 참 맛있다 통영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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