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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방 시인 / 먼동*
우리들의 가슴속에 숨 쉬듯 살아 있는 깊고 깊은 어둠을 아십니까 혹은 한 줄기 밝음을 아십니까 어둠은 그리움의 원천이고 밝음은 만남의 노래인 줄을
숨었다가 때로는 나타나서 대낮의 뜨거움을 식히고 때로는 자취도 없는 미소로 백 년의 어리석음을 밝히는 당신은 해와 달이 감추인 세월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미몽迷夢의 곳간 열쇠입니까
잠 못 이루는 나무들의 계곡을 지나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산봉우리를 넘어서 천천히 밝아오는 새벽하늘 위에 문명이란 이름의 메아리로 살아 있는 먼동을 아십니까
윤고방 시인 / 겨울 예감
올가을 스산한 손 끝에 피어난 마지막 흑장미
그 한 송이의 비밀스런 첫날밤과 소나기, 땡볕 실바람, 가랑비
숨가쁜 여름날 모래 벌판 건너 강물 위로 달려오는 아름다운 가을 바람
이제야 늦은 향기 무르익어 첫눈 휘날리는 하늘에 새빛 가득하겠다
윤고방 시인 / 한강에 살다
물속에 산山그림자 산속에 사람 그림자
꿈 밖인지 생시 바깥인지 물결도 흘러 세상도 흘러
가슴에 적막이 넘치도록 울음으로 번다를 건너 꿈으로 생시를 낚아서 달빛 아래 돌아오다
윤고방 시인 / 결코
대답 없는 하늘을 향해 밤새도록 울다가 그치지 말 걸 그랬다
깊은 산속 둔중한 구리종을 온몸으로 울리고 싶었던 그 세월과는 헤어지는 게 아니었다
새벽 넘어오는 햇살을 기다리기보다 자정 밖 어둠을 기다리는 게 더 나았다고 눈 부릅뜬 현자가 말했다.
그의 여윈 어깨가 정말 가벼웠을까
윤고방 시인 / 낙타와 모래꽃 16
행여 아무도 찾지 않기를 길을 잘못 든 철새 한 마리 날아 들 뿐이기를 문설주에는 먼지가 켜켜이 쌓이고 바닥엔 절지동물 몇 마리가 한가로이 기어 다니기를
감히 틀고 앉지 못하는 성스러운 가부좌 곁에다 게으른 육신 한 한 켤레 벗어 놓고 오만한 오감에 절어 빠진 오장육부를 육각수 냇물에 씻어 헹궈 말린 다음에야 골방 문 밖을 나설 수 있기를
숨 막히는 출소일에는 눈두덩이 부서지는 햇살 대신에 맑은 달빛 받은 소금 한 됫박이 정수리를 타고 내려 발가락 끝까지 온 몸을 씻고 가슴마저 씻어 백 년 동안 썩어 문드러진 정화수 한 모금 얻어 마시고 동굴 문을 기어 나갈 수만 있다면
윤고방 시인 / 안개 나무
물 한 방울 길어 올리는 데 꼬박 하루가 걸리고 한 사발로 목을 축이는 데 물경 일 년이 걸리는 사막 한가운데 나무 한 그루가 살고 있습니다
온 누리 구석구석을 헤매어 달리는 뿌리는 나날이 밤새워 벋어가 백 리를 기어가고 가지들은 수백 리 수액樹液과 길과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안개를 먹고 자라는 수천수만의 잎사귀들은 어쨌냐구요? 당연히 밤낮으로 하늘을 향해 경건한 기도를 올렸지요 변덕스럽고 극성맞은 이번 우기에도 소나기 한번 내리지 않았지만
멀리서 북회귀선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적도로 내려가는 천둥에게 구름 몇 점이 손짓하고 있을 뿐, 흙먼지 머금은 안개만이 뜨거운 햇살에 현기증을 앓고 있을 뿐, 줄기와 잎들은 서로 부등켜안고 허공을 향해 끊임없이 자맥질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름이여 깊고 깊은 기압의 골짜기여 펄럭이는 당신의 희고 검은 옷자락 아래 소나기 그 신기루의 맨몸뚱이를 보여다오 그대의 눈부신 비단 살결을 베고 누워 나무는 그제야 눈감으리 그러나
쓰러지지 말라 스러지지도 말라 세상을 온통 휘감는 노을빛 장삼자락이 천둥소리와 벼락을 데불고 나타날 다음 우기까지는
-시집 『쓰나미의 빛』에서
윤고방 시인 / 동주형의 하늘
그 언덕 위에 가보라 종로구 필운동 고개마루 윤동주 기념관 사각형 봄 하늘이 한뼘쯤 열려있고 형의 백골이 거기 두 무릎 세운채 앉아 있다
그 속에 우리도 함께 호흡하며 진정 몇숨이나 함께 숨막혔던가
진달래는 물씬 봄날에 취했는데 뻐꾸기는 무심히 잘도 울어 쌓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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