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천향미 시인 / 반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9.

천향미 시인 / 반시

 

 

운문사 가는 길목 국도변

사내가 씨 없는 감을 팔고 있다

바구니 마다 그렁그렁 설익은 눈망울

잠시 몽상에 잠기는 동안

주홍빛 질펀하게 철집 앞에 풀어 놓는다

맞배지붕 받치고 서 있는

배흘림기둥 오래 바라보던 사내

이태 전 배불러 집나간 아내를 떠올리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다

늦가을 햇살을 밀치며 일주문이 열리고

밀짚모자 속에 붉은 볼을 숨긴 탁발승

가사장삼을 손차양 삼아 바삐 길을 나선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어깨에 멘 바람이

풍경처럼 가볍다

사내의 눈빛, 잠시 바랑위에 얹혔다가

시계추 되어 흔들린다

더 이상 새가 날아들지 않는 감나무 한 그루

까치밥 연등처럼 높이 매달고

비구니 청정 수도도량을

밤새 비추며 서 있다.

 

 


 

 

천향미 시인 / 판도라

 

 

이 선 넘지 마!

 

칼금 같은 경계의 말

헛된 연애,가면 속으로 숨어든다

 

최초의 한 문장은 벽 쌓기였고

짝꿍과의 냉전은

들킬 수밖에 없는 고백

 

슬픈 상징은 우리가 쌓았던 벽

묵시가 깊어지고 입술이 점점 지워지고 있다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마침내 펄럭이는 공포가

지구별을 지배하고 비로소 인간은 평등해졌다

 

마지노선은 허물고 싶은 최후의 보루

먼지 알갱이 뿌옇게 분열한다

 

까마득한 기억 속 벽을 더듬는 동안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지점,

돌아가야만 하는 걸까

 

방언처럼 중얼거리는 진술

벽 속에서 소리가 쏟아져 나온다

 

잠을 서성이는 프로메테우스

검은 메타포를 보호색으로 껴입는다

 

끝까지 함구하는 블랙박스

문을 허무는 순간 또 다른 벽이 된다

 

 


 

 

천향미 시인 / 그림자를 캡처하다

 

 

그림자 하나가 왼쪽 뇌를 갈고 있다

몸을 갖지 않은 4차원의 기호로 표기되는 이름

나는 가끔 그림자의 안부가 그리울 때 있다

기억해낼 수 없는 형체를 어둠에게 물어

더듬이를 붙이고 시크릿 코드로 기록해 둔다

길게 혹은 짧게,

빈번한 입맞춤은 수신규칙이 생략되어 전송된다

몇 개의 점과 선으로 타전되는 모르스(Morse)부호

.... --- .... --- .... --- .... ---.... ---

내란(內亂)의 징후는 말줄임표로 요약되어

다급한 당신 심장으로 타전 된다

지류를 벗어난 물소리 스며든 골짜기

빛의 발원에 관계한 적 있던 그림자

이끼로 자라고 있다

풀어보면 해독불가의 암호는 없다

12월을 뜨겁게 살았던 순교자의 흔적

골목마다 길게 핏빛으로 새겨져 있다

 

 


 

 

천향미 시인 / 허수아비와 자전거

 

 

딸아이와 함께 간 허수아비 전시장은

추억이 뉴스가 되는 현장이다.

귀밑머리 희끗한 여자가 떠올리는 그림은

어린 시절 채마밭을 지키고 서 있던 키 큰 허수아비

허름한 베옷에 밀짚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배경으로

다섯 살 딸아이가 V자를 그린다

즉석에서 현상되는 디지털 사진처럼

고욤나무 그늘 드리워진 언덕을 내려오는 아버지,

선명하게 현상 된다

거슬러 올라 바퀴가 멈추는 채마밭 부근

허수아비 멱살을 잡고 공회전 하는 아버지

끊어진 체인이 기억 속에서 이어지고

까르르 내 웃음이 아버지의 안장을 차지하고 앉는다

헛돌던 은륜의 바퀴가 속력을 얻는다

아버지가 밟던 힘찬 페달의 힘으로

 

 


 

 

천향미 시인 / 모노레일

 

 

전신암검사(PET-CT) 진료기가 사내를 스캔하기 전

의사는 눈을 감고 두 팔을

머리위로 올리라고 지시한다

영락없는 항복의 자세

불온한 영혼이 지구를 베고 누워

비로소 겸허해지는 시간이다

X-Ray 조사기 조용히 스크리닝되면서

사내의 몸이 영상으로 치환된다

별안간의 불안한 심중(心中)까지 읽어갔을까

감은 눈 속에서 의식이 흔들리자

영혼의 중심 경고 없이

방향 잃은 채 궤도를 이탈한다

폭풍을 만나 비틀거리던 몸을 세우듯 불안하지만

곧은 직선 위를 달리고 싶은 사내

손상되어 폐기하려던 마음의 횡단면 한 장

마그네틱에 재빨리 입력한다

검사를 마치고 공명통 속을 빠져나오며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아내의 두 손을

모노레일에 달라붙듯 꼭 붙잡는다

자기부상열차처럼 마찰 없이 팽팽한

평행선을 그으며 내닫고 싶은 싸늘한 겨울 한낮

신발등에 안착한 눈송이들 금세 녹지 않는,

 

 


 

 

천향미 시인 / 나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러시아식 이름에 부칭(父稱)이란 게 있다

누구의 자식이라는 것을 부계질서로 드러내는 작명법

이른바 오뜨쩨스뜨바

나라는 존재가 아버지가 뿌린 한 종지 정액에서 시작되었다는 부계사회의 권위가 이름 위에 얹혀 있다

 

그 작명법의 유래를 나는 모른다

모른다 했거늘 누런 황색 거죽을 입은 내 이름의 작명법 역시 러시아식 부계질서에서 자유롭지 않다

내 보기에 러시아는 겉으로만 부계사회일 뿐 속알맹이는 모계의 품안에서 자유로웠다

 

남자들이 모두 전쟁터에 나갔으므로

국토의 정맥이라 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건설한 주역은 여자들이었다

영하 50도 속에서 철도를 고정시키기 위해 침목에 망치질하는 어머니들의 옛 사진을 본 적 있다

남자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갈 때 여자들은 밥하고 빨래하고 철도를 건설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은 태어났으니

여자들에게 남편이라는 존재는 그저 씨 뿌리는 기계였던 것이다

전쟁터로 떠나가는 남편을 붙들고 애면글면하는 새댁은

동네 여성 강자(强者)에게 뺨을 맞았다

 

남자 같은 건 버려라

남자는 쓰레기다

남자는 미완성이다

남자의 아랫도리에 달린 종은 눈속임이다

남자는 그럴듯한 인생이 되지 못한다

인생은 여자들의 음습하게 갈라진 틈새에서 싹트는 범

여자들이 철도를 건설하면 그건 남자를 건설하는 것이다

 

새댁은 눈물을 훔치며 강자를 따라나선다

아버지의 얼굴을 모르는 아이들은 감자처럼 무럭무럭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의 귀가 만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러고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물려받아야 했다

 

 


 

 

천향미 시인 / 휴식

 

 

지금은 여독을 풀고 있습니다

 

전체 2단계 서비스 백 구성 중 15% 완료 컴퓨터의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 음소거구간은 복원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나는 입이 없는 사람입니다 천개의 입술을 가진 자의 복화술을 당신이 보았어야 했어요 턱 끝에 매달리는 데스마스크

 

누군가 죽은 내 발등을 천천히 닦아주는 동안 백야의 들판을 혼자 걸어갔어요 뜨거운 물 속 같았어요 오르골 소리가 들리고 낯선 사람들로부터 듣는 여행이야기는 어쩐지 두고 온 날의 희미한 기억을 꺼내보는 것 같았어요

 

예컨대 박물관에서 도자기 인형을 깨트린 여자의 이야기는 무음의 시계처럼 둥둥 떠다녀서 오랜 전 보았던 연극 한 편을 되돌려 보는 것 같았어요 실금이 생략된 한 문장을 지문으로 적어 넣어주고 싶었어요

 

결국 나는 깨진 도자기 인형을 퍼즐처럼 맞추고 나이테를 지워주었어요 마지막으로 2015.5.15.~2020.7.14. 수명을 기록하고 유리관에 입관시켰어요 천개의 입술을 가진 자의 식성을 본 적 있어요 전원을 끄지 마십시오 음소거구간은 복원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 계간 《시사사》 2020년 가을호, 신작특집 -

 

 


 

 

천향미 시인 / 패러글라이딩

 

 

 내 무릎은 이제껏 붙어있었다 앉을 때나 설 때나 오금 저렸다 이 세상에 나를 흔드는 상승과 하강의 기류 헐거워진 뼈마디를 자주 드나들었다

 

 일상을 저만치 밀쳐두고 저마다의 느닷없는 광기를 불러 모아 공중부양을 시도한다 짜릿함과 스릴을 고소공포증과 맞바꾼다

 

 바람이 겉장만 읽다가 내려놓은 산등성을 가볍게 넘긴다 등 떠밀린 평화가 본문처럼 답답한 구간을 통과하는 동안 무한공 스쳐가는 것들을 구경한다

 

 미끄러지듯 산허리를 휘돌아 고속도로 표지판을 지나 긴 강의 테두리를 만들며 흘러가는 한 무리의 사람들, 도무지 강 건너편을 모르는 개미떼처럼 흘러간다 공중은 공중대로 구름을 낳으며 흘러간다

 

 멀리서 사람들 환호하며 손을 흔든다 공포가 키우는 비명의 볼륨, 불안을 화답하며 공중제비 돈다

 

 


 

천향미 시인

1965년 경북 의성 출생. 2007년 계간 《서시》를 통해 등단. 2011년 《한국문학방송》 신춘문예 당선. 현재 『시와 미학』 사무국장으로 활동 中. 시집 『바다빛에 물들기』 『깡이 있어야 날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