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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한용국 시인 / 위하여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9.

한용국 시인 / 위하여

 

 

시작하기에는 언제나 늦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나뭇가지에서 다시 새들이 태어나고

숨어 있던 그림자들이 웅성거린다.

우리의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고 외치던

신발들이 일제히 일어선다.

목장을 생각하면 풀이 자랄까

절벽이 떠오르고 얼음이 맺힌다.

말을 걸어줘야 자라는 나무와

얼굴을 쓰다듬으면 웃는 가면과

간절한 직립을 포기한 자세들,

우리에게 한 번 더 독한 혀가 필요하다.

흐르는 것은 걸음이 아니라

떠내려가는 방향일 뿐,

웃음이 필요하지만 충족될 수 없고

한번 주머니에 넣은 손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

믿을 수 있는가 믿음을 구하는 자세를

우리는 사랑을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펄럭이는 두 팔을 멈추지 못한다.

 

 


 

 

한용국 시인 / 옛 집터에 서면

 

 

옛 집터에 서면 전생이 궁금해진다

어쩌면 거대한 수정란이었던 걸까

육십 촉 필라멘트가 끊어질 때마다

꿈의 겨드랑이 한 쪽이 간지러웠다

까무룩 허기 속으로 잦아들면

금 간 벽마다 빗물 스며든 흔적이

피워낸 상형문자들, 쥐 오줌 지린

벽 속에선 무언가 예감하고 있는 듯

녹슨 배관이 그르릉거리며 울었다

밤이면 하늘이 지붕을 끌어당기는지

죄 없는 창문만 덜컹덜컹 흔들어대던

그 집, 부화중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 헛기침에 수은주가 올라가고

낯선 구름들 문 밖에서 웅성거리던

낡은 집, 고픈 새벽 잠 깰 때마다

이유없이 부르튼 입술에 침을 바르던

나도, 이 생으로 홀연히 튕겨져 나온 것이다.

 

 


 

 

한용국 시인 / 내성

 

 

보도블럭 위로 솟아난 듯이 보이는

저 나무들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라고 있는 게 아니다

붙들려 와 박해받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든 견딜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내가 보기에 너는 잘 살고 있어

따위의 위안은 얼마나 헛된가

그러니까 너의 고통은 언제나

나의 고통과 같은 종류의 것이었으니

 

나는 슬픔도 없이 휘청거리거나

고통을 위장하던 몇 개의 몸짓들을

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모래바람 속에서

모든 힘의 근원을 팽팽하게 그리워하리라.

덧없는 죽음들, 거미 같은 욕망과 맞서는

단 하나의 자세를

 

저 나무들이 새벽마다

생살을 찢어 꽃을 꺼내드는 4월, 황사에는

 

 


 

 

한용국 시인 / 여기서 갸르릉 갸르릉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도무지 귀를 기울일 수 없어

왼쪽으로 고개 돌린 고양이 자세로

나는 창밖만 바라본다

잃어버린 것들의 목록을 늘어놓는데

지나가는 자동차의 숫자를 세고

오가는 사람들의 가방 속이 궁금해진다

언제부터 여기에 자주 오게 된 것인지

언제쯤 여기에 그만 오게 될 것인지

불확실한 커튼의 속내를 헤집어 보며

구름 위에 펼쳐진 빛의 바다를 생각한다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불운이었을까

이야기는 꼬리를 물고 허공에 흩어지고

기포 속으로 뻐끔거리며 사라지는 입술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돌돌 말리는 혀를 펴보려고 노력한다

먼저 도착하고 늦게까지 기다리는 삶은

불안의 옛 통증을 기억하고 있어

더위를 오후 속으로 늘어뜨리지만

조금 흔들려도 괜찮겠지 그림자를 피하기 위해

안경을 고쳐 쓰고 다른 사람이 되어본다

만약이라는 말은 조금 위안이 될 테지만

운명에 서툴게 맞선 일은 후회할 수 없으니

언젠가 다른 장소에서 만나기로 하자

바지 주머니에 진실을 쑤셔 넣어두고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표정으로 우리

 

 


 

 

한용국 시인 / 어둠보다 먼저

 

 

이제 길고 푸른 꼬리를 감출 시간이다

 

예보 끝에 울리는 작은 탄성들을 들으며

너도나도 발맞추어 굿이브닝 이브닝

잠시 꿈을 꾼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림자의 자세가 남았다

 

가로등이 스스로 물음표 형상으로 돋는다

가난한 발등들 위로는 거짓말이 자라고

견고함이 필요한 사람들은 나무에 황금을 바른다

누군가는 사랑을 속삭이겠지만

 

흔들리지 않기 위해 오래 숨을 참으면

허세 부리는 웃음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이야기가 멈춰버린 거리에는

지나간 날씨들만 벌린 입속으로 사라진다

 

어떻게 내일을 흉내 내는 얼굴이 되는 걸까

뜨거운 팔과 다리들이 골목에 흐르고

가라앉는 빛들은 내장으로 스미는데

어제의 생활과 오늘의 노을은 농도가 다르다

누군가는 감사의 기도를 올리겠지만

 

오늘은 몇 시에 시작된 것일까

당신에게는 몇 시에 오늘이 끝나는 것일까

 

계간 『시산맥』2021년 여름호에서

 

 


 

 

한용국 시인 / 가만히 바라보면

 

 

멀리서 오는 신호들이 있다

모여 있기도 하고

홀로 깜박이기도 한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지만

표정을 갖지 못한 것도 있다

아프다는 뜻일까

가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던

눈물을 다 흘린 뒤에

하늘을 보며

바람 속에 서서 바람을 밀던

나무들이 있다

돌아갈 수 없어 발 동동 구르는

날짜들이 있다

하나의 날씨 그림자는 수만 개

손닿지 않아 오래 바라보면

눈 멀고 마는 잎들을 매달고

반짝이기 위해서

연습이 필요한 자세들이 있다

냄새 없는 바람 속에서

솟구치는 자세를 흉내 내는 발들이

언제 도착할지 몰라

시계만 바라보는 눈들이 있다

익숙한 빛으로는 옮길 수 없어

길의 온도를 따라 걸어가면

하릴없이 채인 돌의 마음 너머

눈이 내리고

멀리로만 눕는 낮은 지붕들 위로

가만히 일어서는 어진 얼굴들이 있다

 

 


 

 

한용국 시인 / 빗 속에서 중얼거리다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다

옛 일을 생각하고 있다

버스 색깔의 종류를 헤아리고 있다

빗방울의 파문은 왜 원형일까

가슴에 동그라미를 쌓아보고 있다

기억은 어떤 도형인지 궁금해하고 있다

지각을 걱정하며 전광판을 올려다보고 있다

여인들의 미끈한 다리를 보고 있다

노후를 걱정하고 있다

아직은 안 늙었다고 자위하고 있다

파문만큼 많은 우주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출가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했다

정류장도 진화하고 있구나 감탄했다

언제쯤 버스를 기다리지 않을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과

버스를 기다릴 필요없는 사람들의 차이를 생각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은 쇠항아리라던 시인을 생각했다

나의 생계는 뜨거워도 내려놓지 못하는 쇠솥단지다

마르크스는 비 오는 날 민중을 걱정했을까

빗소리와 노랫소리와 자동차 바퀴에 밟히는

빗방울들의 비명이 귓바퀴에서 섞이고 있다

변함없는 건 자연과 변덕이구나 생각했다

지나간 사랑들이 떠올랐다

지나간 사랑들도 내리는 비를 바라보고 있겠지

오 맙소사 나는 모든 사랑에 완패했다

장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한 사람들이 아닐까

오늘 내리는 비도 어제 내린 비와는 다르다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겠지

차이와 지연으로 인해 내리는 비는

당신의 눈앞에서 현전한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오인으로 미끄러진다

지역감정은 달라도 지역 날씨는 동일하구나 생각했다

파문의 개수를 세다가 버스를 놓친 사람은

낭만적인 사람일까 현실도피적인 사람일까

비를 흠씬 맞는 게

비와 대결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우산만 봐도 그게 얼마나 순진한 건지 안다

오 맙소사 나는 모든 사랑에 완패한 사람이다

건너편 정류장에서 나를 보고 있는 저 사람이다

 

 


 

 

한용국 시인 / 우리들의 바벨탑

- 부재시편 5

 

 

라면을 끓이다가

쉬익쉬익 끓어오르는 양은냄비를 보다가

문득 엔터키를 누르고 싶어졌다

그때 우리들의 사랑은

끓는 냄비처럼 불온했으므로

숨막히는 고딕체로

서로의 가슴에 새겨대던

우리들의 바벨탑

 

뚜껑을 열어 라면을 넣으며

봉해 둔 마음까지 탈탈 털어넣는다

이렇게 삶은 덧없고

추억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데

저마다 밥벌이로

가족들에게로 애써 돌아서지만

몇 걸음 못 가 구두끈이 풀어지는 사람들

감자탕집은 한 구석이 텅 비어버리고

소주는 조금씩 쓴맛을 잃어버리고

 

면발이 풀어지기 전에 스프를 뿌리고

익기를 기다려 계란을 풀어 넣는다

라면 끓이는 일조차 사랑이고 헌신이었던

아무도 추억을 염려하지 않았던 시절

김치통에 환하게 묻어 나올 때

나는 돌아가 엔터키를 누르고 싶어졌다

어떤 여백도 다치지 않아 눈물겨웠던

깨알같은 우리들의 바벨탑을 위하여.

 

 


 

 

한용국 시인 / 과월호가 되어 버린 남자

 

 

어떤 페이지도 중력을 견디지 못했다

어두운 날들에도 일련번호가 있는지

느닷없이 그는 밑줄 그어졌다

휙휙 날아와 꽂히는 저녁 어스름

책갈피인양 어느 페이지에

자신을 끼워 넣어 보기도 하지만

너무 쉽게 흘러내린다 어떤 조심도

소용없었다 그는 납작해졌다

 

창문들마다 썩은 잎을 매달고 있다

문지르면 쓱 지워질 것 같다

낡은 표지의 초상화들과

썩은 잎의 무늬들은 닮아 있다

그는 페이지를 넘기며

무심코 뱉은 회한들을 들여다본다

언제 끼워 넣은 이파리일까 잎맥들이

활자들을 위태롭게 지탱하고 있다

가난했지만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

 

뒷모습을 인화하던 거울이 움푹 패여 있다

어느 페이지에서 그는 몸을 던진 것일까

오래된 서가에 일련번호로 눕혀졌던 날들이

흐린 명조체로 어둠을 일으켜 세우고 있다

 

 


 

한용국 시인

1971년 강원도 태백 출생. 2003년《문학사상》신인상에 〈실종〉 등으로 등단.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건국대학 국문학과 박사학위. 시집 『그의 가방에는 구름이 가득 차 있다』. 현재 건국대학 강사. 계간 <시와 사람> <시산맥> <모멘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