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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서 시인 / 플라타너스
11남매 중 맏딸 매연구덩이에 서 있던 플라타너스
종갓집 맏이에게 시집 간 그녀 달랑 이불 한 채 혼수로 어금니 물고 견뎌야했던 시집살이
시부모 병시중을 도맡아하면서도 힘들다하지 않던 그녀가 나락처럼 누릿누릿 변해갔다
걸핏하면 시어머니에게 대들고 밥상을 뒤엎고 욕이며 삿대질이며 끝내 정신병원으로 실려 가던 날
어린 두 딸과 부둥켜안고 얼마나 울던지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투욱 툭 그녀의 병실 창가에 스치듯 앉았다 떨어졌다
유현서 시인 / 나이테
산책숲길 그루터기에 앉아 거친 숨을 고릅니다 턴테이블을 돌고 있는 LP판의 바늘침처럼 서서 수천의 얼굴을 밟습니다
배불뚝이, 지팡이, 모자, 애호박, 간고등어, 신문지에 말린 돼지고기, 3kg짜리 삼양설탕 얼굴
결 고문 물결무늬의 트랙들이 가지런한 치아처럼 드러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끊긴 기형도 있습니다만 제각각의 내력들이 소리 없이 뛰쳐나옵니다
빼빼마른 나무, 휘어진 나무, 근육질의 나무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숲이었던가요
왼쪽에서 부는 바람이 세찼습니까 내 오른쪽으로 난 물길이 더 수월하게 열렸습니까
물비늘처럼 어룽거리는 트랙에서 재잘재잘 방금 수업을 파한 조무래기들이 찰랑거립니다 나락 베는 낫소 리에 미꾸라지 팔딱팔딱 뛰기도 하고요 죽은 아버지의 밭은 기침소리에 함박꽃이 깜짝 놀라 고갤 돌기도 합 니다 멀리서 촤르르- 자전거 체인 감기는 소리, 당신이 막걸리를 사가지고 오시네요
왼쪽도 오른쪽으로도 바늘침은 더 이상 돌아가지 않습니다 턴테이블도 망가진 지 오래고요
물오른 가지를 비틀어 불어준 당신의 버들피리소리처럼 나 여기 있다 나 여기 있다 층층나무 숲길을 들쑤시는 휘파람새 소리만 스마트폰에 담습니다
유현서 시인 / 목련 꽃, 잎을 밟다
저리 간절한 기도를 보셨나요 가지마다 피워 올린 겨울이 오히려 화사합니다
오므린 봄오리의 북향北向이여! 더 이상 찬바람을 보내지 말아주시옵기를
기도 끝에 피어올린 촛불심지입니다 꽃잎을 받쳐 든 온몸이 제단祭壇입지요 저리 하얗게 피운 불꽃이 당신 스스로를 앞당깁니다
추스를 사이도 없이 봄은 적敵처럼 예고豫告없이 깨어나고
심지만 남은 꽃잎은 벌써 땅으로 돌아눕습니다
되돌아가는 저의 모습이 추합니까
꽉꽉 밟아주신다면 통通하겠습니다
유현서 시인 / 이슬꽃
내 꽃 하나가 그 누구의 꽃이 된다면 내 꽃잎 한 장이 그 누구의 깃발로 펄럭인다면
몸속의 꽃 겨우내 피워 올린 꽃 꽃잎 한 장 건네주고 꽃술 하나 떼어주고
꽃이 핀 흔적이 없어도 좋아라 했는데,
당신은 당신이 가진 꽃이 꽃인 줄 모른다 여기저기 뿌릴 줄만 아느냐 꺾을 줄만 아느냐 꽃이라고 다 꽃이더냐
햇빛 하나 내려와 꽃을 꺾고 바람 하나 내려와 꽃을 꺾고 햇빛 한줌 내려와 나를 먹고 바람 한줌 내려와 나를 먹고
아침나절에 스러지더라 그런 당신이 꽃이다 내가 건넨 꽃도 금세 시들더라 그게 바로 당신이다
유현서 시인 / 소금쟁이가 사는 방식
소금쟁이에겐 소금이 없다 어디서 났을까 당신을 밟지 않고서는 당신에게 갈 수 없는 길,
소금 한 줌 잔잔한 물결 위에 흩뿌려진다 하늘을 팽팽히 당기던 웅덩이가 수천의 볼우물을 만든다
당신의 몸속에 가두었던 구름들이 하나 둘씩 뛰쳐나온다
나는 물 위를 걷는 낙타 당신을 흔들어 깨울 때마다 내 몸속에는 신기루처럼 당신의 거울이 자란다
다시는 깨지지 않기 위해 두 팔과 두 다리롤 힘껏 버틴다
집채만 한 소금방울이 떨어진다 당신과 나를 위해 아늑한 물속으로 피신할 수 없을까
내가 가진 한 움큼의 소금 속엔 당신의 눈물이 말라 있다 물 위를 걷지 않고서는 소금을 구할 수 없다
유현서 시인 / 헛꽃
아래층 반지하집 그녀가 흐느낀다 빗속으로 뛰쳐나온 그녀의 울음소리가 빗방울에 갇힌다
수몰지에 묻힌 오래된 느티나무처럼 나도 갇힌다
웃어요 웃어야 해요 운다고 될 일이 되고 안 될 일이 안 되는 게 아니지 않아요?
사방에서 꿀벌들이 잉잉거린다
웃는 게 전부라는 듯 웃는 꽃 아무도 묻지도 알려하지도 않는 꽃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지느러미처럼 허방을 쳐도 웃고 목이 잘려나가도 웃고 팔이 부러지고 손발이 으깨져 꽃병에 꽂혀도 웃고
웃고 또 웃고 울어도 웃는 꽃
스스로 꽃인 줄 모른다 깊은 통점에서 피워 올린 꽃일수록 화락 뜨인다 꽃그늘마다 다시 꽃이다
유현서 시인 / 이파리에 박힌 별
눈이 깊은 그 아이와 그 아이의 엄마는 가문마당에 피어난 한련 이파리를 별이라 불렀다
하얗게 빛나는 지상에서 오직 하나뿐인 별
주황으로 노랑으로 밝은 빛 바탕에서 더욱 빛나는 별
그 아이를 길러낸 별 하나 어디에선가 내려다보고 있을 초록별 하나
별과 별 사이에 버려진 별이 있다 그 누구도 뽑을 수 없는 별 뽑히지 않는 별
버려진 별 만날 수 없는 별 공중으로 하늘로 오를 수 없는 별
- <애지 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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