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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애숙 시인 / 한 때 소나기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0.

권애숙 시인 /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늘 오더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중얼중얼

마루청에 누워 집을 보고 있을 때

생각없이 뒤척뒤척 먼산을 파고 있을 때

느닷없이 후두둑 쾅쾅 사방을 두들기는

사랑, 혹은 이별, 마당가에

흥건히 붉은 봉숭아 꽃물을 찍어대며

그렇게 기습적으로 와서 전부를 흔들더라

깃털 다 젖은 새처럼 할딱거리며

우왕좌왕 비에 젖어가는 것들 거두어 들이다 보면

설레이던 처음은 얼룩만 남긴 채 분분히 사라지고

깊이 패인 물웅덩이만 울먹거리고 있더라

사랑아,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너는 우레처럼 왔다 가고

미처 개켜들이지 못한 옷가지로

후줄근하게 젖은 나는 바지랑대 높이 걸려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권애숙 시인 / 상현달 히죽 웃고

 

 

다급하게 불러놓고 달려가면 딴청이다

엎어지고 부서지고 나만 늘 깨지는데

그 상처 내 사랑이야 히죽 웃는 저 얼굴

 

니 뭐꼬,

등짝 한번 세차게 후려치면

 

접혔던 구석들을 환하게 펼쳐놓고

 

아직은 본문의 시간

받아 적기 이른 시간

 

 


 

 

권애숙 시인 / 첫눈이라는 아해(兒孩)

 

 

허공을 여는 소리 휘파람 느린 소리

​숨소리 절반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첫눈은 이런 거라지 흩날리는 숨이라지

​어디를 건너왔나 중력 없는 발바닥들

​엉성한 눈발 속에 지번도 지워지고

​엎드려 식은 기다림 안부인 듯 아닌 듯

​첫눈에 ‘첫’ 지우고 눈발에 ‘발’ 지우고

​남은 눈들 담장 너머 오락가락 녹는 기척

​머물던 흔적도 없이 서성이다 사라진 너

​첫발은 첫눈처럼 눈발은 첫발처럼

​고요히 스며들어 설레는 이름 자리

​언제든 열람할 수 있다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권애숙 시인 / 야외무대

 

 

녹슨 이름 꺼내놓고 장엄한 저 여자들

건너온 길목들을 당겼다가 풀었다가

변주곡 오가는 사이

나비가면 그렁하다

 

안개도 철새들도 방향을 다듬는 철

뒤편이든 속편이든 신명으로 좀 써보자고

찬바람 등에 업은 채

좌우로 찍는 발바닥

 

비탈로 흐르다가

광장에 고이다가

눈부신 주름각들 일제히 반짝인다

저 절정

다이아몬드 스텝

발바닥표 보석이다

 

-《좋은시조》2023. 겨울호

 

 


 

 

권애숙 시인 / 흘러가는 그림자

 

 

기울어진 버드나무 물소리에 젖고 있다

키가 큰 한 사람도 버들 곁에 젖고 있다

그림자

하나로 뭉쳐

아래쪽으로 흘러간다

기울어진 것들이 젖고 또 흐르는 것

서로에게 몸 기댄 채 물결 조금 일렁이며

담담히

경계도 없이

이름도 몸도 없이

 

 


 

 

권애숙 시인 / 커튼콜

 

 

어디를 떠돌다가 들러붙은 혼령이냐

​참나무 가지가지 효수되어 걸렸구나

​겨울 산 저리 시퍼렇게 산발을 흔드는 너

​난(蘭)이라 부르다가 충(虫)이라 부르다가

​가던 길 머뭇대며 구름 한층 깊은데

​물소리 저 혼자 클클 얼음장을 녹인다

​덧없는 목숨들이 모여 맞는 저물녘

​먼 절집 풍경 소리 어둠 몰아 번지는데

​내 한철 꺾인 모가지 어디에다 걸어두나

​고요히 흔들리는 겨우살이 뒤편으로

​달달한 조명이다 봄소식 오고 있다

​언 숲들 녹아내린다 안개 커튼 올라간다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에서

 

  


 

권애숙 시인

경북 선산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9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5년  《현대시》 시 등단. 시집으로 『차가운 등뼈 하나로』 『카툰세상』 『맞장 뜨는 오후』 『흔적극장』 『당신 너머 모르는 이름들』.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 부산시인협회, 부산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