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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애숙 시인 /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늘 오더라 누군가를 기다리며 혼자 중얼중얼 마루청에 누워 집을 보고 있을 때 생각없이 뒤척뒤척 먼산을 파고 있을 때 느닷없이 후두둑 쾅쾅 사방을 두들기는 사랑, 혹은 이별, 마당가에 흥건히 붉은 봉숭아 꽃물을 찍어대며 그렇게 기습적으로 와서 전부를 흔들더라 깃털 다 젖은 새처럼 할딱거리며 우왕좌왕 비에 젖어가는 것들 거두어 들이다 보면 설레이던 처음은 얼룩만 남긴 채 분분히 사라지고 깊이 패인 물웅덩이만 울먹거리고 있더라 사랑아, 한 때 소나기 그렇게 너는 우레처럼 왔다 가고 미처 개켜들이지 못한 옷가지로 후줄근하게 젖은 나는 바지랑대 높이 걸려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권애숙 시인 / 상현달 히죽 웃고
다급하게 불러놓고 달려가면 딴청이다 엎어지고 부서지고 나만 늘 깨지는데 그 상처 내 사랑이야 히죽 웃는 저 얼굴
니 뭐꼬, 등짝 한번 세차게 후려치면
접혔던 구석들을 환하게 펼쳐놓고
아직은 본문의 시간 받아 적기 이른 시간
권애숙 시인 / 첫눈이라는 아해(兒孩)
허공을 여는 소리 휘파람 느린 소리 숨소리 절반 접어 주머니에 넣어두고 첫눈은 이런 거라지 흩날리는 숨이라지 어디를 건너왔나 중력 없는 발바닥들 엉성한 눈발 속에 지번도 지워지고 엎드려 식은 기다림 안부인 듯 아닌 듯 첫눈에 ‘첫’ 지우고 눈발에 ‘발’ 지우고 남은 눈들 담장 너머 오락가락 녹는 기척 머물던 흔적도 없이 서성이다 사라진 너 첫발은 첫눈처럼 눈발은 첫발처럼 고요히 스며들어 설레는 이름 자리 언제든 열람할 수 있다 첫사랑이란 이름으로
권애숙 시인 / 야외무대
녹슨 이름 꺼내놓고 장엄한 저 여자들 건너온 길목들을 당겼다가 풀었다가 변주곡 오가는 사이 나비가면 그렁하다
안개도 철새들도 방향을 다듬는 철 뒤편이든 속편이든 신명으로 좀 써보자고 찬바람 등에 업은 채 좌우로 찍는 발바닥
비탈로 흐르다가 광장에 고이다가 눈부신 주름각들 일제히 반짝인다 저 절정 다이아몬드 스텝 발바닥표 보석이다
-《좋은시조》2023. 겨울호
권애숙 시인 / 흘러가는 그림자
기울어진 버드나무 물소리에 젖고 있다 키가 큰 한 사람도 버들 곁에 젖고 있다 그림자 하나로 뭉쳐 아래쪽으로 흘러간다 기울어진 것들이 젖고 또 흐르는 것 서로에게 몸 기댄 채 물결 조금 일렁이며 담담히 경계도 없이 이름도 몸도 없이
권애숙 시인 / 커튼콜
어디를 떠돌다가 들러붙은 혼령이냐 참나무 가지가지 효수되어 걸렸구나 겨울 산 저리 시퍼렇게 산발을 흔드는 너 난(蘭)이라 부르다가 충(虫)이라 부르다가 가던 길 머뭇대며 구름 한층 깊은데 물소리 저 혼자 클클 얼음장을 녹인다 덧없는 목숨들이 모여 맞는 저물녘 먼 절집 풍경 소리 어둠 몰아 번지는데 내 한철 꺾인 모가지 어디에다 걸어두나 고요히 흔들리는 겨우살이 뒤편으로 달달한 조명이다 봄소식 오고 있다 언 숲들 녹아내린다 안개 커튼 올라간다 -시조집 <첫눈이라는 아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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