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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혜 시인 / 대왕오징어
버스정류장 앞 전봇대에 오징어 한 마리가 매달려있다 무담보 대출, 즉시 가능 갑오징어 등 위에 바다체로 찍혀 있다 가위질로 가랑이진 다리에 빨판처럼 붙어 있는 휴대폰 번호 불량한 신용도 다 떠맡아주겠다고 꾸덕꾸덕 말라가는 피데기에서 난바다 파고를 헤치던 숨소리가 들린다 담보물 없어도 즉시 수혈해 명줄을 이어주겠다는 대왕오징어 허울만 좋은 대왕의 말에 속아 저 다리 덥석 찢어 질근질근 씹다가 송곳니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던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대왕오징어 저 검은 흡반으로 사정없이 피를 빨아댈 텐데 대왕오징어의 낚시질에 코가 걸렸나? 파랑 지는 물살 헤쳐 오느라 흠뻑 젖은 바짓가랑이 하나가 대왕의 다리를 찢고 있다
-제25회 시안 신인상 당선작 중
안정혜 시인 / 마스크
가까스로 사내를 벗어놓은 그가 어둠 속에 웅크려 있다
온종일 들이마신 먼저 칠갑된 어둠의 입자들로 그의 몸뚱이는 겨울밤의 주검처럼 뻣뻣하다
말없이 곤고한 일용의 하루를 함께 견디느라 말을 삼키고 숨을 참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웅크렸던 말들은 잠꼬대로 침으로
흘러나오고 있다
-시인정신 2012년 여름호
안정혜 시인 /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다
시조새 화석 바이에른의 새
반은 공룡이고 반만 새인 어중간한 몸, 지상과 허공의 유전자를 동시에 품은 절반의 새였다 비상과 추락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청록빛 하늘을 영토로 삼았다 날아다니는 존재의 시원이 되었다 몸에 돋아난 최초의 날개, 오직 새가 되어야하는 절체절명의 명제 앞에서 생각을 고르느라 밤새 깃털을 접다가 펼쳤다 바람의 어깨에 올라타기 위해 바람보다 더 가벼워져야 했다 주저앉고 싶은 몸의 저항을 털며 밤을 지새웠다 뼛속까지 비운 후 날아오른 쥐라기의 무한 허공, 한 자루 붓이 되어 날갯짓 할 때 바이에른의 새는 제 영토가 된 하늘 어귀 짬에다 어떤 문장을 기록했을까?
다이어트 식단표를 짜다가 문득 맨 처음 날아올라 새의 전범이 된 바이에른의 새에게 묻는다, 임계를 훌쩍 넘어 무변창공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모든 새들이 날아가 죽고 싶은 그 하늘, 일필휘지로 그려낸 그의 필법이 궁금하다
안정혜 시인 / 오징어 청춘
달리는 냉장차 옆구리에 오징어 청춘, 바다체 글자가 쓰여 있다 저녁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선 알 바 없다는 ‘청춘’의 행렬들 밤이면 별의 날카로운 칼날이 배를 가를지라도 촉촉하고 말랑한 아침을 즐기고 있다 짭조름한 암록빛 바닷물에 해 한 덩이 솟아 탱크 속을 벌겋게 달군다 뜨겁고 미끌미끌한 세계 타오르는 불통을 마구 돌린다 신호등 앞에서 차가 멈추고 파도는 잦아들어 먹먹한데 접영 배영 버터플라이 오징어 떼는 제각기 분주하다 콧등 너머에서 별을 타고 칼 든 어둠이 몰려오고 있지만 어쩌면 부도수표 날리듯 부랴부랴, 부랴부랴!
-시인정신 2014년 봄호
안정혜 시인 / 간격
엊그제는 결혼기념일이었다. 양력과 음력이 일치하여 삼십팔 년 전 그날처럼 열나흘 보름달이 휘영청 밝았다. 모처럼 식탁보를 깔고 정성껏 음식을 차린 후, 레드와인을 따랐다. ‘짠’ 하자 그가 “우리 싸우지 맙시다” 한다. 내가 웃는다.
안정혜 시인 / 자전거바퀴를 위한 레퀴엠
탱탱했던 탄력 잃고 자전거 타이어가 바닥에 드러누웠다 주렁주렁 링거 줄에 매달려 명줄 이어가던 중환자실 아버지처럼 온몸이 축 늘어져 있다 숨 막히게 내달려온 속도의 궤적들 오르막과 내리막으로 굴곡진 길, 내 하루의 무게를 대속하느라 사방무늬로 갈라지고 터지면서 타이어는 머피의 법칙을 악물었겠지 (웃어라, 내일은 더 나빠질 것이다) 상처는 의외로 깊다 타이어 온몸으로 전이되었다 연장을 들고 병든 타이어를 빼 낸다 앙상히 드러나는 뼈, 충직한 뿌리가 공손히 드러난다 농사꾼 아버지의 손도 그랬다 닳고 닳아 옹이가 생겨도 아버지의 뿌리는 단단한 사랑이었다 그 넓은 그림자 아래서 맨 처음 꿈의 페달을 밟았다 자전거바퀴 위에서 구름을 배우고 바람의 계보에 눈을 떴다 널부러진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넣는다 병풍 뒤에 돌아눕기 무섭게 내다버린 아버지처럼 폐타이어, 한 방울의 숨도 남아있지 않다
안정혜 시인 / 페이지 터너
그녀는 언제나 그림자무늬 옷만 입지 벽오동의 수묵빛 그늘 겹겹이 입고 연주자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네 빛줄기로부터 살짝 비껴 어둠 편에 앉아서야 안도하는 사람 빛의 숨은 빛 사리 때 떠오른 보름달의 뒤편 같고 연둣빛 부들을 밀어 올리는 봄 습지의 밑변 같아 그녀 손가락이 악보를 넘겨줄 때마다 연주자의 멜로디가 강물로 흐르네 (말러 교향곡 7번 E단조, 밤 노래) 긴 연주가 끝난 후 쏟아지는 갈채를 한 꺼풀 그림자 벗듯 내려놓고 무대 뒤로 묻히는, 저 저 눈부신 후면(後面)
안정혜 시인 / 말레나의 발바닥은 푸르다
굳은 발바닥 아플 때마다 나는 문득 아일랜드에 간다 이국의 여자 말레나가 된다 당신 입속에서 녹아내리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된다 소년악사*를 흥얼거릴 때 붉은 지붕이 나를 녹여먹을 때 나른함은 혀뿌리를 타고 흐른다 음악은 뼛속까지 스며든다 까슬한 바람 속을 맨발로 걸으면 닿을 수 없는 층계 같던 새들이 온다 막 돋은 찻잎 모양 발톱에다 핏빛 매니큐어를 칠해놓곤 마녀처럼 나는 웃는다 강물은 ㄹ ㄹ 흘러 흘러서 내가 떠난 이곳으로 먼저 도착하지만 강가에 앉아 두 발 물에 담근 채 훌쩍대기도 하지만 풀빵 같은 이름 아일랜드의 물빛에 젖는 내 발바닥은 푸르다
모르는 연표는 알 바 없이 내일도 어제도 셈할 것 없이 불현 듯, 이라는 열차를 타고 나는 아일랜드에 당도한다 우표에 찍힌 소인처럼 소인에 눌린 손자국처럼
*소년악사:The Minstrel Boy. 아일랜드 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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