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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창만 시인 / 모시나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1.

심창만 시인 / 모시나비

 

 

오늘 낮

창가에 날아온 나비를 그냥 보냈다

아직 아물지 않은 옷고름을 달고 있었다

기미가 낀 모시나비였다

날개 사이로 세상이 다 새고 있었다

그와 내가 새고 있었다

세상은 몸밖처럼 고요한데

그가 내 숨을 쉬고 있었다

오늘 낮

창가에 날아온 나비를 그냥 보냈다

문을 열면

그도 나처럼 갇힌다

 

 


 

 

심창만 시인 / 용마산

 

 

배낭을 메고 가파른 능선을 올라온 수의사도

내가 한때 말이었는지 용이었는지 알지 못한다

나이를 가늠할 어금니는

뜨거운 흙을 물고 바위가 되었다

나의 입은 45억 6천만 년의 중력을 견딜 만큼 무겁다

비틀거리는 어금니로 식은 이념을 오물거리는 약수터 노인들이

오늘도 알 수 없는 분노를 번갈아 뱉고간다

나의 분노는 중생대 무용담이나 빙하기의 참상과 같으나

대부분의 유지(遺志)는 침묵과 아량을 촘촘한 단층으로 쌓는 것이다

수없이 주인이 바뀐 영토와 망루는

나에게 가랑잎이나 이슬과 다를 바 없다

나는 오늘도 거친 갈기와 가파른 등으로

빗물을 새로 받고 나무를 돌보며 새들을 들인다

지진을 받고 벼락을 받고 인간과 가래침도 받을 수 있어서

나의 새로운 지층은 노을과 부음과 먹먹함도 받을 수 있다

끊임없이 닳고 낮아져 언젠가 무(無)로 돌아갈

나의 본향은 먼 별의 지평선 너머에 있고

본명은 어떤 언어로도 닿지 않는 침묵 속에 있어서

나의 눈과 심장은 오늘도

닿지 않는 깊이에서 홀로 뜨겁고 외롭다

 

 


 

 

심창만 시인 / 새살이 아닌 꽃은 수치다

 

 

꽃피는 봄에 시청탁을 받았다

고여 있는 것이 없어 시도 없다

봄이 끝날 때까지 말미를 줬는데

맴도는 것이 없어 시가 없다

개화의 등고선은 꽃둥을 밀어

예전에 쓴 시라도 괜찮다는데

 

새살이 아닌 꽃은 수치다

 

 


 

 

심창만 시인 / 편지

 

 

추신 뒤에 내리기 시작한

싸락눈은 차마

동봉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편지는 십이월의 갯벌처럼

무거워

그대가 오기도 전에 길을

젖게 합니다

우리가 멀리 젖은 새처럼 떠돌 때

하루는 더디고 일 년은 이렇게

잔인하게 빠릅니다

 

전하지 못한 것들이 모여서

집을 이루고 하루가 갑니다

어제는 이웃의 무허가 루핑집이 불에 탔습니다

그 작고 허술한 집에 그렇게 많은 연기가 살고 있었습니다

기침 소리도 나눈 적 없는 이웃에

차마 탈 수 없는 사연들이 그렇게 많았습니다

무너지면서도 자꾸만 집을 지어

보이던 여윈 기둥들,

마지막 눈을 감으며 마당으로

내려오던 파리한 지붕,

전하지 못한 것들로

더디게 더디게 종일

제 몸을 태웠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궂습니다

빗방울도 없이 다 적십니다

기침과 연기로도 전할 수 없는

이 미세함이, 이 고요가

어제 소방 호스에서 나오던

물줄기보다 더 사납습니다

언제쯤 그대 쨍쨍하게 젖어서

편지보다 먼저 불쑥 들어설 수

있을지요

 

-시집, 『무인 등대에서 휘파람』에서

 

 


 

 

심창만 시인 / 군산 서해 방송

 

 

푸른 유리병에 석유 사러갈 때

산노을 넘어오던 어부들 안부

바다보다 깊은 산골 나 어릴 때

귀머거리 염소와 함께 듣던 방송

빈 부엌에서 눈 젖은 쥐들이 쥐약을 먹을 때

군산시 해망동의 한 미망인이

가느다란 전파로 '해조곡' 을 불러주던 방송

쇠죽 끓이다 말고 집 나가고 싶을 때

식은 바다에서 육지를 바라보듯

오래오래 내 귀를 들여다 본 방송

 

흘러간 노래보다

내가 더 멀리 흘러온 것 같은데

아직도 노을을 보면

석유 냄새가 나는 방송

기다리기도 전에 가버린 세상처럼

어느새 아들은 나를 싫어하고

정말 있기는 있었나 싶은

군산 서해 방송

 

 


 

심창만 시인

1961년 전북 임실 출생.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 1988년 《시문학》 우수작품상 수상. 1997년 계간 《문학동네》로 본격적인 작품활동 시작. 시집 『무인등대에서 휘파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