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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승현 시인 / 붉은 상사화
몸속에 예감해 둔 상사의 슬픔이 맹렬하게 솟구친 현장을 본다 어긋난 발길은 기다림의 흔적조차 없을 때 당도하는 운명 새삼 서러운 이별은 붉디 붉다 텅 빈 상실의 가운데 헤집고 기어이 꽃대 세우는 한나절 아무도 없는 불갑사 계곡 어리붉게 환한 대낮 울며 서성거린다 그가 없어 더욱 물색 곱고 그가 없어 더욱 그늘 짙은 살빛 머리에 아롱진 화관 내려줄 이 없어
서승현 시인 / 나팔꽃
절망스러움에 매달림을 멈추고 싶었으나 희미하게 별이 반짝거렸다 가장 깊고 예민한 촉수로 조심스레 중력을 거슬러 올랐다
그의 무정함에 물음표를 지으며 한 치라도 가까이 닿으려 보드라운 손길 나긋거렸다
물관을 늘여 허공으로 난 외길 부여잡으려 애쓰는 기원의 시간 청남빛 멍이 번지고 있었다
이른 아침 땀과 눈물이 수정처럼 맺힌 채 둥글게 피어난 그녀의 얼굴에는 연푸른 피톨의 그가 늦새벽 빛깔로 스며 있었다
영원을 걸어서도 닿지 않을 당신이라는 피안의 하늘이
서승현 시인 / 꽃밭에 자드락비 들이친다
모반의 도적떼처럼 가만가만 비 내리고 멸망한 나라의 궐처럼 밤은 깊어간다
도열한 責妃들, 괴는 수심 무거워 실핏줄 싱싱한 채 이울어 지고 있다 훗훗한 숨결로 버무려지던 꽃등마다 기화되어 퍼지던 연붉은 입자들 촘촘하게 점화되어 일렁이던 등불과 흥청망청 흐드러지던 비단 치마폭
흙먼지 날리는 가문 날에도 바쁜 손길 손짓하고 순간마다 눈멀게 하더니 기어이 안녹산의 내달리던 말발굽처럼 몰아치는 빗줄기에 드잡이질 당하고 있다 만개의 절정을 탐하듯 비바람은 붉은 꽃 분홍 꽃 훌치고 밀치며 흐트러 버린다 쏠리다가 쓰러지며 물큰대는 살내 태풍이 잠시 들른 천변부지는 꽃양귀비 널브러진 패색의 전쟁터
일장춘몽은 도처에서 출몰하는 중이다
서승현 시인 / 만남
검은 필름 통 속에서 철 지난 봄이 발아되어 나온다 인화되지 못해 가슴속에서 난만하던 꽃송이들 비로소 열어 제치는 손길, 만나는 순간 시간의 문턱에 턱, 걸터앉는 저 화사한 자운영 꽃술들!
서승현 시인 / 고양이가 자꾸 울었다 열심히 살아서 더 큰 벌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괄괄한 시인의 의분에 찬 목소리 건너 고양이가 자꾸 울었다 고양이는 목소리 높여 소리치고 있었다 내 말은 왜 안들어 주냐고 내 말도 좀 들어 달라고 야옹 야옹 냐아오옹 모두들 이게 나라냐 합창하는 동안 갇히 고양이는 냐아옹 냐옹 ··· 사방을 박박 긁는 소리로 냐오옹 ··· 애타게 냐오옹 ··· 목마르게 냐오옹 ··· 이게 나라냐 신동엽 시인 50주기 기념행사장에 끊임없이 스며드는 가느다란 외침 고양이 얼룩같은 검은 멍이 온몸을 뒤덮고 퉁퉁 부운 얼굴, 스카프로 감싼 동남아 여인은 이게 나라냐가무슨 말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형부가 처제를 강간하고 안사돈이 성폭행 당하는데 망보아 주는* 나라 한국인 남편의 발길질에 핏덩이를 쏟고 결혼 3개월 만에 유골이 된 어제가 오늘인 나라 이게 나라냐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울음 울고 있는 그녀는 하고싶은 말 제대로 못하고, 매 맞고 갇힌 외국인 결혼이주여성 *고기복의 <이주노동자 이야기> 중 이주 여성들의 미투, 2018.03.12.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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