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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용주 시인 / 소록도에서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7.
유용주 시인 / 소록도에서

유용주 시인 / 소록도에서

 

 

끝까지 왔습니다

 

산다화 한 묶음 그대 앞에 바칩니다

호랑가시나무 붉은 열매는 그대 향한 제 마음입니다

병원 뒷마당에 핀

철없는 철쭉은 누구를 위해 피었을까요

뭉크러지고 반쯤 썩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소설 지나 동지 입구에 선 누더기 한 생애는

더이상 갈 곳이 없습니다

소리 죽여 들고 나는 바닷물은 치욕이 없는데

궁형에다 생체 실험까지 당한 제가

갈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제 인생은 언제나 바닥이었습니다

절명의 동백꽃 밑에서 다시 한번 생이 주어진다면

청산도 손죽도 거문도 추자도 제주도 마라도 이어도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요

그대 영정 앞에 뚝뚝 부러진 목숨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까요

귀멀고 눈멀어 코와 입, 생쌀 넣을 때까지

엎드려 울어볼까요

눈물 소금 찍어 먹고

진창에서 바다 끝까지 기어가볼까요

 

지금부터는 긴긴 동면의 세월입니다

산다화 속절없이 눈 되어 떨어지면

그대, 한 점 섬으로 떠오를 수 있을까요

선연한 동백꽃으로

피, 피, 피,

피어날 수 있을까요

 

소리도 냄새도 빛깔도

그림자도 없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요

 

-시집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문학동네, 2018.

 

 


 

 

유용주 시인 / 동행

 

 

장날 병준이가 고물 트럭을 몰고 바구리봉 집에 올라가다가 꼬부랑 할매 혼자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태워드렸것다

 

-할머이 어디 가요?

-개정리 가요, 개정리

-할아부지는요? 할아부지 함자가....

-할아부지? 콩 팔러 갔는지, 깨 팔러 갔는지, 여태 안 들어오요.

-꾀 팔고 있는 것 같은디....혹시 놉 얻어 딴살림 차린 것은 아니지라우? 어떻게 되시는디?

-아매 살아 있으면 일흔여섯인가, 일곱인가...아자씨 또래는 됐을 것이요.

 

서른다섯 베트남 처녀에게 늦장가를 든 병준이는올해 쉰여섯, 돼지띠다

 

 


 

 

유용주 시인 / 낙엽

 

 

차마 놓지 못한 손이 있었다

 

온 목숨 다해 매달리고 싶은 손이 있었다

 

혼백이라도 따라가 잡고 싶은 손이 있었다

 

-시집《낙엽》도서출판 b.2019

 

 


 

 

유용주 시인 / 취생몽사

 

 

한 3백 년은 너끈히 지나갔을라

 

저 광활한 먼지 속으로 흩어져버린

중호 형님 모시고 마포나루 후미진 뒷골목

한쪽 어깨 기울어진 함바집에 들렀을 때다

 

마침 일필휘지,

마른 붓 휘둘러 새경을 받은 친구가

앉은뱅이 냉장고를 기웃대다

육덕 푸짐한 주모한테 한 방 맞았다

 

―썩을려러느 것들, 뭔 안주를 찾았싸!

주는 대로 처먹을 것이지……

 

시퍼런 마음속 구만리 장천 파도를 숨기고도

친구는 허허 웃었고

 

라면에 소주와 탁배기 잔 어지러운 공사장 인부들

똥내 풍기는 이쑤시개 던지고 떠난 탁자에서

또 우리는 갈 데 없는 천것들이었다

전생, 후생 모두 합쳐 뿌리 없는 떠돌이였다

 

생전, 명천께서는 족보 없는 술 멀리하라 그리 당부했지만

무정할 손 세월이었다

 

입적한 지 3천 년도 넘은 중호 형님

사리 모신 부도탑에 이끼 깊어 산새 소리 그윽한데

하늘 가득

목젖이 보이도록 크게 웃으며 단숨에 잔을 뒤집는다

 

―콧구멍 한 번 더 벌씬대야지

 

마포나루 붉은 노을 한 짐 걸머지고

서쪽으로, 서쪽으로

날아가는……

 

 


 

 

유용주 시인 / 시골 쥐

 

 

딸아이는 변두리에 산다

 

아이는 광고를 전공했는데

(인 서울 할 때 얼마나 박수를 쳤나)

그동안 수십 차례 알바를 돌았다

별명이 북한 어린이인 아이는 손목 힘이 없어서

삼겹살집이나 곱돌 비빔밥 식당에는 취직할 수 없다

커피 전문점 비싼 주전자를 깨

보름 동안이나 무료 봉사한 적이 있다

 

수학을 제일 못하는데 학원 수학 선생을 하지 않나

최근 사우나 알바를 할 때는

수건과 가운을 나눠주는 일이 주업무였다

주인은 아이가 마음에 들었나보다

잘하면 다음달부터 정식 직원으로 채용한다고

4대 보험은 물론 월급까지 두 배로 올려준다고

 

삼포를 넘어 칠포 세대인 아이,

인턴을 다닌다

인턴을 위해 인턴을 다닌다

하루 1시간 15분씩 전철을 타고 인턴을 다닌다

 

아빠 얼굴을 꼭 닮은 아이

술을 맛나게 먹는 아이

성질까지 같아서 무조건 울고 난리를 치는 아이

엄마는 무서워 말도 못 꺼내는 아이

 

밀리고 밀리고 밀려서 변두리에 사는 아이

아이 방은 냉골이다

몇 겹을 덮어도 냉골이다

 

서울은 왜 이렇게 추운 겨

아이와 나는 애꿎은 소주병만 찾았다

 

 


 

 

유용주 시인 / 나무도 자살을 한다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뒤

공원의 나무들이 말라 죽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나무도 자살을 한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언제든,

나무는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유용주 시인 / 화톳불

 

 

 나무의 향기는 나무의 피 냄새다 나무는 왜 죽어서도 불이 되려 할까 어째서 나무는 여름부터 봄까지 불을 피우려 하는 것일까 무엇이 한사코 재가 되면서도 불을 피우게 하는 것일까 불을 만들기 위해 나무는 더욱더 단단하고 견고하게 물을 감싸고 돈다 나무는 물의 자식, 불의 어머니―물로 만들어진 불의 함성을 들으면서, 나는 재로 허물어질 사람들을 생각한다 재 속에 감추어진 한줌 불을 지키기 위해 추운 겨울에도 나무를 키우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겨울을 지키는, 얼음을 감싸는 나무들을 생각한다 가슴속 옹이로 남은 상처를 해체 이후의 옹벽처럼 눈부시게 다스리는 사람들, 몸에서 나는 가장 숭고한 향기 땀과 피를 온 세상에 피워올리는 낮은 사람들을 생각한다

 나무는 죽으면서도 따뜻한 피의 향기를 남긴다

 

 


 

 

유용주 시인 / 개보다 못한 시인

 

 

옆집 개가 짖는다

 

바람 불어 나뭇잎 떨어져도 짖고

나뭇잎보다 미세하게 날개를 떨며 우는 매미 소리에도 짖고

까치 내려앉아 음식 쓰레기 뒤적여도 짖고

멋모르고 텃밭까지 내려온 고라니 되새김 소리에도 짖고

먹장구름 몰려와 소나기 지붕 위를 때려도 짖고

새벽 신문 배달하는 학생 발소리에도 짖고

우유 아줌마 바지런한 자전거 소리에도 짖고

게이트볼장 어르신들 웃음소리에도 짖고

한창 내부 수리 중인 사원 아파트 망치 소리에도 짖고

급하게 커브 도는 택배 트럭 엔진 소리에도 짖고

우리 집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짖고

앞집 주정뱅이 해소 기침 소리에도 짖고

한 옥타브 높은 건넛집 아줌마 교성에도 짖고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 농구공 두드리는 소리에도 짖고

뒷집 아저씨 크게 틀어놓은 텔레비전 소리에도 짖고

중늙은이 전기 검침원 방구 소리에도 짖고

계란 장수 사과 장수 고물 장수 스피커 소리에도 짖고

우편배달부 오토바이 부르릉대는 소리에도 짖고

산림청 소방 헬기 프로펠러 소리에도 짖고

20 전투비행단 전투기 뜨고 내리는 소리에도 짖고

이지러진 달빛 보고 짖어대고

빗금 그으며 흘러가는 별똥별 보고도 짖고

남산만큼 배부른 해 보고도 짖고

집 나온 고양이 가르릉거리는 소리에도 짖고

멀리 옥녀봉 산꼭대기 야호 하는 소리에도 화답을 하고

페로몬 향기 짙게 풍기는 암캐에게는 거의 숨이 넘어가고

 

밥 주고 물 주러

주인과 손님이 들어오고 나가고

봄꽃 피고 지고

여름 안개 스멀스멀 기어들고

가을 공기 알맹이 가벼워지고

겨울 눈 내려 소나무 가지 부러져도 짖는다

세상 모두가 잠든 한밤중

하느님 뒤척이며 침 흘리는 순간에도 어김없이짖는다

 

나는 아직까지 저 개새끼처럼

처절하게 깨어있는 시인을 본 적이 없다

 

 


 

유용주 시인

1959년 전북 장수 출생. 1991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시 「목수」외 2편을 발표하며 등단. 1997년 제 15회 신동엽 창작기금 수혜. 시집으로 『가장 가벼운 짐』 『크나큰 침묵』 『은근살짝』 『서울은 왜 이랗게 추운겨』 『어머니도 저렇게 울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젊었을 때』 등. 산문집으로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에 중국집에 '속아서 팔려 간' 이래 가난과 노동의 삶을 견디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