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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선희 시인 / 날개에 관한 단상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7.
양선희 시인 / 날개에 관한 단상

양선희 시인 / 날개에 관한 단상

 

 

 결혼비행을 끝내고 죽은 수개미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는다. 몸통 따로 날개 따로 떨어져 있다. 몸의 꿈과 날개의 꿈을 달리 품고 저승으로 간 것일까?

 

 결혼한 여왕개미는 제일 먼저 제 몸에서 두 날개를 떼어 낸다. 정착해 一家를 이루려면 더 이상 높이 더 높이 비상을 꿈꾸어서는 안 되는 法일까?

 

 一生을, 양식을 모으는 육아에 힘쓰는 집을 지키는 궂은 일을 도맡는 일개미는, 날개가 없다. 날개는 生業을 방해해서? 날개는 外界와 간통해서?

 

-시집 『그 인연에 울다』, 문학동네, 초판2001

 

 


 

 

양선희 시인 / 가묘

 

 

내 가슴처럼

온몸이 멍인 풀들 무성한

너의 무덤 곁에 쓴

내 가묘를 본다.

 

너의 別世는 안녕한지

아픈 내 마음

그 속으로

파고든다.

 

흙향

풀뿌리 향

뫼꽃향

네 영혼의 향기

내 몸을 찔러댄다.

 

내 마음의 멍울이 삭는다.

 

 


 

 

양선희 시인 / 고뇌하는 태풍과 꿈쩍 않는 무당거미와

눈 휘둥그레진 시인

 

​무당거미가 쳐 놓은 거미줄 앞에

태풍이

급정거한다.

연약한

거미줄

어떻게

지?

오호!

거미줄 구멍에

내 몸을

맞추면 되겠구나!

요거, 재미있네!

요거, 재미있어!

태풍이

줄줄,

줄줄,

줄줄,

거미줄 빠져나간다.

태풍에도 무사한 거미줄 앞에서 시인은 소리친다.

예술이네!

존경심 생긴다, 무당거미야.

 

 


 

 

양선희 시인 / 목련나무

 

 목련꽃 필 때 보자는 약속들 떠올리며 병원에 갈 때, 우체국에 갈 때, 오일장에 갈 때, 돈 벌러 갈 때, 목련나무, 찾는다. 꽃턱잎에 싸인 꽃봉오리들 한 방향으로 환해진다.  

 

​ 봄눈 녹은 뒤, 황사 걷힌 뒤, 봄비 멎은 뒤, 꽃샘바람 그친 뒤, 목련나무, 찾는다. 직박구리 한 마리 나뭇가지에 앉아 봄을 쪼고, 나는 모창을 한다. 겨우내 목련나무를 오가며 가만히 부른 이름들.  

 

 


 

 

양선희 시인 / 봄날에 연애

 

 

봄을 타시나 봐요

 

당신도 타고 싶어요

 

사나운 꿈을 연명장치처럼 붙들고 산 날

흔들린다

 

그가 내 집을 물어뜯는다

구멍을 만든다

 

새순을 꿈꾸는 나

끄집어낸다

 

그가 나의 골 깊은 겨울을

벗기고, 씻긴다

 

내 몸 샅샅이

색들이 살아난다

 

봄 탄다

 

 


 

 

양선희 시인 / 신비하다

 

이거 한쪽만 상한 건데

도려내고 드실래요?

가게 아주머니는

내가 산 성한 복숭아 담은 봉지에

상한 복숭아 몇 개를 더 담아준다.

먹다보니 하, 신기하다.

성한 복숭아보다

상한 복숭아 맛이 더 좋고

덜 상한 복숭아보다

더 상한 복숭아한테서

더 진한 몸내가 난다.

육신이 썩어

넋이 풀리는 날

나도 네게

향기로 확, 가고 싶다.

 

 


 

 

양선희 시인 / 살아났다

휴가를 갔다.

 

해변의 모래가 밀가루 같았다.

야자수 밑에 신발 벗어 둔 채 맨발로 걸었다.

 

썰물이 만든 등고선 앞에 멈췄다.

몸속에 있던 곡선을 꺼내 흔들었다.

몸이 휘어졌다.

 

해안선 모래는 단단했다.

무너지지 않으려

무늬조차 단단했다.

작은 생명들이 지나간 발자국들을 따라갔다.

아무 흐트러짐 없이

자기 존재를 끌고 간 발자국들

 

발자국이

발자국이

내게 숨을 불어넣었다.

 

눌린 심장이 튀어 올랐다.

막힌 기도에서 숨이 터졌다.

 

살아났다!

 

 


 

양선희 시인

1960년 경남 함양군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1987년 계간 『문학과비평』에 <일기를 구기다> <그 인연에 울다> 등 외 9편을 발표하여 등단.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나리오로 등단. 시집 『일기를 구기다』 『그 인연에 울다』 『봄날에 연애』. 장편 소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라』, 이명세 감독과 영화 <첫사랑>의 각본을 공동으로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