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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국 시인 / 기다림에 대하여
내가 그를 기다렸듯이 그가 나를 기다렸을 이제 육십여 년 그 세월 기다려 준 팔방에 등을 돌린 척 꾹꾹 참고 있었던, 평생에 딱 하나 기다려 목이 훌쩍 길어버린 기린 같은 모가지로, 기린 같은 눈시울로 서툴게 시의 초원을 뚜벅대고 있으니 만나야 할 인연이라면 사막인들 마다하랴 건져야 할 시어라면 지옥불인들 마다하랴 저마다 하나씩 둘씩 이제 얼굴 보느니 꽃을 들고 기다릴까, 눈물 품고 기다릴까 더러는 시로 오고 더러는 눈물로 오는 간절한 눈빛 몸빛이 모두 반쪽이었네 일 년을 기다리면 사랑이 되는 것을 십 년을 기다리면 한이 되고 마는 것을 육십 년 기다린 사연 그게 모두 詩였네
고정국 시인 / 그날 꽃님이
꽃에다 '님'자를 당겨 "꽃님!"하고 부르는 순간
와락 가슴에 안겨 "시인 님!"하며 부르는 꽃
즉흥시 삼천 송이가 하늘 가득 피었지.
- 《정형시학》 2021. 겨울호
고정국 시인 / 나뭇잎 두 장 받아들고
낙엽 두 장 받아들고 책상 앞에 앉은 아침 내 가만 눈을 낮춰, 더 아래로 눈을 낮춰 일정한 눈금을 폈던 실핏줄을 보았네
열두 폭 샛강을 거느려 세로줄로 이어놓은 그 등뼈 사이사이 가로줄로 흘러드는 또 하나 백두대간의 갈비뼈를 보았네
맨 먼저 피었던 잎이 맨 먼저 떨어지고 두 번째 솟았던 잎이 두 번째로 떨어지는 참 착한 아기손들이 손에 손을 포개며
나무는 백 년을 살아도 나뭇잎은 반 년인 것 나무는 일 년 동안 일 년짜리 생이었지만 반 년에 백 년을 말하는 나뭇잎이 저 깊이
물끄러미 나를 보는 책상 위 나뭇잎 두 장 나는 다시 몸을 낮춰 그 곁으로 다가가서 하늘이 슬며시 내리신 시 한 접을 받았네
고정국 시인 / 그리고 꽃잎이 지면
늦가을에 눈을 뜨고 한겨울에 몸을 여는
고향 동백꽃은 바닷바람을 사랑했지
그리고 나도 덩달아 그 바람을 품었지
바람이 꽃 속에 들면 이미 바람이 아니었네
그곳에 숨을 죽이면 그건 곧 사랑이었네
그리고 꽃잎이 지면 다시 바람이었네
고정국 시인 / 돌이 사람을 기다리듯
언제나 돌과 진리는 낮은 곳에 자리했다 맞닿은 인연 앞에 몸과 마음을 고쳐 잡으며 한 덩이 오석烏石을 껴안고 밤새 볼을 비볐지
어둠을 겹겹이 모아 한 올 빛을 저장하듯 마모된 조약돌에 심장 하나씩 감춰놓고 사람을 기다린 것이 하늘이고 땅인 걸
사랑도 미움도 한恨도 다 삭힌 형상석 하나가 바람서리 불편함으로 정온히 몸을 뉘일 때 창변의 아침 수반에 금발 머리 태양이 뜬다.
《시조21》2022. 겨울호
고정국 시인 / 진눈깨비
1. 파지된 이야기들이 포도 위에 지고 있다. 교차로 신호등 앞을 서성이는 삶 언저리 기성화 낡은 뒤축에 삐걱이는 일상이여. 2. 어느새 희끗 희끗 새치 솟는 머리칼에 눈도 비도 아닌 눈물 점 점 맺힐 무렵 그대 먼 기약의 지평엔 노을강이 흐르네. 3. 절반 쯤 사노라면 사는 것이 죄만 같고 빗금치는 눈비 앞에 우산 들기 송구한 날 마흔 셋 더딘 귀가길 속이 젖는 사람아.
고정국 시인 / 그리운 나주 평야
호남 그쪽에서 이재창 시인을 만나 저물녘 한 잔 술에 붉게 물든 나주평야 시인은 소식이 끊겨도 시는 붉게 남는 걸 벼가 고개 숙일 쯤엔 주인 발소릴 알아듣고 오늘은 어느 구절 시 한 점을 바칠까 하고 골똘히 아주 골똘히 귀를 열고 있을 때 땅에 바짝 귀를 대면 우렁우렁 하늘의 소리 하늘과 땅 사이에 울음 우는 모든 것들 저마다 각을 지우고 만종(晩鐘) 곁에 실리던 추수를 열흘 앞둔... 나주평야 저만 같아라 하늘이 허락하신 그 높이로 키를 낮춘 칠천 만 벼 포기들이 다툼 없이 사는 곳 -시집 [그리운 나주 평야]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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