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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현 시인 / 그런날
그런 날이 있지 않은지 모든 것이 나를 훼방놓는 것 같은 느낌
열심히 살고 있는데 언제나 최선을 선택한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무색하게 느껴지는 그런 날
한 번 그렇게 느껴지면 평범한 말 한마디도 일상의 사소한 어그러짐도 더 뒤틀려 보인다
과연 그럴까 정말 온 우주가 나를 긁고 있는 것일까 못하게 방해하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그 우주는 내 바깥의 우주가 아니라 내 안의 우주가 아니었을까
날 선 마음이 다가오는 상황을 베어 내 새로운 날을 만든 것은 아니었는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밖을 향하던 원망이 결국은 돌고 돌아 내게로 오는 그런 날
용서, 화해, 이해 손을 내밀어 볼까
김세현 시인 / 플라타너스
많은 사람들 지나가는 거리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그가 서 있다
귀를 찢는 자동차 소음과 빌딩마다 쏟아내는 붉은 광고판 살갗을 파고드는 매연으로 관절이 툭툭 불거졌다
작은 바람에도 끝없이 펄럭이는 욕망과 번뇌 좀체 가시지 않는 집착을 끊으려 마음을 틀어쥐면 까맣게 내려앉던 하늘 귀퉁이
어느 겨울아침 밤새 몰아친 눈보라에 묵은 화두마저 떨쳐 버리고 하얀 무명옷 갈아입은 거리의 수행자
김세현 시인 / 물의 노래
비가 오면 하늘이 우는 것 같아 들판이 노래를 불렀다 진흙에서 짜 올리는 너의 눈물이 마음에 들어 내 몸에도 파란 전기가 올랐어
너울성 파도가 머리위에서 넘실거렸다. 상자 속에 너를 넣어서 멀리 떠나고 싶어 모래펄이 몸 밖에서 푸석푸석 물의 광채에 쓰러지고 길 위로 하늘이 넘쳐흘렀다
모든 것이 으깨어지기 시작했다 폭우가 유리창을 먹고 너의 오장을 통해 짚어지던 기억들이 깃털처럼 찢겨 사방을 날았다 흐르는 것만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을 듯 물길 따라 수천 개의 길이 흘렀다
김세현 시인 / 해인사
실직한 사내와 눈 덮인 해인사를 찾았다 키만큼이나 눈이 쌓여 나무도 돌도 지붕도 높아 보였다
우리는 대웅전을 향하지 않고 극락전 귀퉁이 노란 햇살에 몸 기댔다 겨울 칼바람 속에 목이 꺾이는 그의 말, 그가 뿜는 입김이 안개처럼 눈시울을 가렸다 비개덩이 같이 근 수만 나가는 그가 역광으로 떨어지는 겨울 해 속에서 짐승처럼 울부짖을 때
댕그랑, 허공에 몸 날리던 풍경의 마른 물고기가 적송에서 떨어지는 한 덩이 눈을 받아
바다 같은 해인의 가슴에 사내가 걸친 고통과 남루를 희게 채색하고 있었다
김세현 시인 / 겨울산
능선에 달라붙어 견갑골 꿈틀거리며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산짐승들 굶주린 시간들을 절룩이며 바위 속으로 주둥이를 쳐 박아도 입술만 하얗게 얼어붙는 눈구덩이 뼈째 왕창 무너져오는 붉은 노을 철판처럼 달아오르는 산의 둔중한 허릴 베고 누운 와송의 어린 가지들 칼날 세운 바람에 솟구친다
적설에 미끄러지는 발부리 절벽에 온몸 부딪쳐 종소리 길게 깔며 우우우 산이 짐승처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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