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병근 시인 / 올가미에 관한
이 올가미는 마디가 촘촘하다 아니 엉성하다 촘촘하다는 엉성하다에 거슬리고 엉성하다는 촘촘하다에 거슬린다 저울 눈금 하나는 이쪽 눈금에 거슬리고 거슬리는 눈금 끼리 비비적거리며 이쪽은 저쪽으로 저쪽은 이쪽의 눈에 거슬린다 바람은 어디 서 어디로 거슬리나 밀고 당기는 악다구니가 되나 그 악다구니가 마음에 걸려 어느 날의 올가미, 올가미에 걸린 악다구니를 쓰다듬는다 꽃샘바람에 걸린 올가미 몇 개의 거슬림을 본다
유병근 시인 / 바보야
철근 막대기 하나 땅에 꽂히다 말고 구부러져 있다 벽에 매달리다가 구부러진 철근도 그냥 그렇다 구부러진 감성 구부러진 이성 구부러진 밥상 구부러진 숟가락 구부러진 어스름 구부러진 혓바닥 그냥 그렇다 어디서 꾸물거리나 바보야, 구부러진 등짝 구부러진 무릎 어스름한 세상에 꽂히다 말고 바보야, 늦은 어스름에 망설이다 말고 바보야,
유병근 시인 / 이기대일월오악도
그가 카메라의 두레박 끈을 푼다 물보라를 찰칵 길어 올린다 벼랑 끝자락의 갈매기를 길어 올린다 오륙도를 긷고 농바위를 긷고 치마바위 너덜겅을 길어 올리는 한철, 공룡 발바닥은 조금 더 뒤꿈치가 닳았다 불붙는 바다를 건너 소방정도 아닌 뱃고동소리가 우우, 선사시대 이전의 목청으로 오고 있다 어쩌다 주라기에 끈을 매단 이글거리는 주라기, 물총새가 한 마리 바위 틈 굴속에서 부리를 털고 있다 선사시대 이전의 물보라를 털고 있다 수시로 뿌리내린 선사시대 언저리에 어깨동무처럼 해와 달이 걸려 있다 삭은 물새 울음과 삭은 공룡 발바닥에도 걸려 있다 머리칼이 부스스한 바람은 며칠 전에 지나간 뱃고동소리를 길어 올린다
유병근 시인 / 한낮
칸나 꽃대가 망가져 있다 바람이 그걸 넘보고 있다 손발 뭉그 러지고 고개 꺾인 몰골을 땡볕에 궁둥이로 눌러 앉혔다 흙덩이 가 오다가다 눌러 앉혔다 길섶에 내다버린 다 낡은 타이어가 눌 러 앉혔다 꽃 위에 낡은 타이어, 꽃위에 흙덩이, 꽃 위에 맹렬한 땡볕이 서로 제 꽃이라고 서로 제 새끼라고 껴안고 있다 제 아픔 이던 날을 껴안고 있다
유병근 시인 / 이웃
누가 볼멘소리를 뇌까리는지 저 안에서 누가 빡빡 이를 악다물던 저안에서 누가 주먹으로 마룻바닥을 치던 저안에서 누가 밥상을 냅다 걷어차던 저 안에서 누가 멱살을 틀어잡던 컴컴한 저 안에서 누가 악다구니로 와글대던 저 안에서 누가 쑥대머리로 뛰쳐나오던 저 안에서
-티브이 개그가 한창 꽃피고 있다.
유병근 시인 / 개구멍으로 밀어 넣는 시
지금 나는 시를 쓴다 쓰고 지우고 다시 쓴다. 마룻방 청소와 삼시세끼가 된 나를 보는 시, 벽에 걸린 액자는 삐뚜름하다. 삐뚜름하게 된 나를 액자에 건다 책꽂이에 건다 무엇을 어떻게 명사와 동사를 책꽂이에 건다 팔월 공산과 이월 매조를 손에 쥐고 어쩌다 촉을 내미는 난초 시를 쓰다가 시가 아닌 무엇을 긴가민가한 구절의 촉에 매단다 공산명월은 밝아서 좋은 저녁 시가 아닌 아무것도 아닌 지금 나는 말발이 한물 간 시를 쓴다 개구멍으로 밀어 넣는 시
쓰고 지운 뒤 다시 쓴다
유병근 시인 / 허전한
잊어버린 것이 있다 무엇을 잊었는지 모르고 모르는 것을 모르고 잊었다 한 쪽 옆구리가 홀가분하고 잊은 것이 무엇인지 잊는중이다 생각한다는 것이 이렇다 말을 하자면 말하고자 한 것을 잊었다 누구는 어디서 일확천금을 하고 누구는 어디서 빈 털털이가 되고 빈 털털이가 된 처지를 잊어버렸다 어떻게 사는 것이라고 말하려다 놓쳐버렸다 그게 그렇다 잊어버린 것과 잊어버리지 않는 것의 틈새를 엿보는 일확천금은 빈 털털이에게 빈 털털이는 일확천금에게 아득하다 어저께 받쳐둔 꽃손이 쓰러져 있다
유병근 시인 / 뜸북새울음이 어쩌다
때로는 기침이 몸을 흔든다 노들강변봄버들 시절이 흔들린다 바다가 떠 있고 흔들리던 벽이 아우성이 떠 있다 방금 지나간 그 새는 뜸북새인지 그런 것 같고 아닌 것 같다 어느 날 지나온 그 길가의 커다란 바위를 보다가 지붕따까리 같으니 뭣 같으니 혼자 중얼거렸다 그 지붕따까리 속에서 뜸북새 울음 같은 걸 아득히 들은 것 같다 부리가 혹 붉은 새인지도 모른다 붉은 부리로 붉은 울음을 우는지도 모른다 뜸북새의 부리를 본 적은 없다 뜸북새 울음이 그럴 것이라는 것 뿐이다 지붕을 밀어내고 사방 벽을 밀어내고 집을 떠나는 어스름한 저녁 새떼들이 군지렁군지렁 떠나고 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박동민 시인 / 한 끼의 시 외 4편 (0) | 2025.09.17 |
|---|---|
| 김세현 시인 / 그런날 외 4편 (0) | 2025.09.17 |
| 송은영 시인 / 마음의 리모컨 외 6편 (0) | 2025.09.16 |
| 양전형 시인 / 고등어와 덕담 외 6편 (0) | 2025.09.16 |
| 우무석 시인 / 꽃의 자리 외 7편 (0) | 2025.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