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무석 시인 / 꽃의 자리
꽃은 피어야 할 제자리를 안다 어느 곳이어야 산들이 가장 아름다워지는가를.
흙 속에 바람 속에 하늘 속에 꽃다이 피어야 할 자리를 찾아라, 더 늦기 전에.
우무석 시인 / 나목
아직은 울어서는 안 된다. 지금 서늘히 울고 있는 것은 숲 속 공기들의 푸른 살결이 떨리는 바람소리 일찌기 저마다의 빛깔로 아파오던 잎새로 헤어지는 계절의 모서리 귀 시린 외풍外風을 맞고 서서 오래전부터 남모르게 참아온 아픔 몇 마디쯤을 그냥 외진 가슴 안섶에 품어 키우는 눈물 하여, 무연한 눈길로 쓸어버리는 빈틈 많은 동천冬天의 간격 먼 지평 가지런히 맞추는 빈 가지의 여윈 어깨 그 손길로 서로를 끌어안고 밑뿌리까지 데우는 이야기로 까치밥 뎅그런 끝물열매까지 익힌다. 한없이 풀려나며 버려진 저녁 교외선 부근으로 잊어버린 마을 불빛이 앙상한 뼈대를 밝혀 오면 새들, 아득한 햇살들, 아득한 꿈들 지나간 모든 것이 낮게낮게 감겨드는 그리움이 되고 추울수록 지심地心으로 깊게 뿌리내리는 법. 그리하여 우리들의 목숨의 가장가리 끝으로 갈앉는 겨울의 서릿발 예감을 지나며 기쁨을 앓고 슬픔을 앓다가 아무도 모르게 열리는 물기 엷은 새순 그때서야 이쁘게 빛나는 눈물로 울어보리라.
우무석 시인 / 봄비를 맞다
이젠 할 수 없다는 듯, 가는 빗줄기에 엮이는 봄의 차림새가 참 보기 좋지요. 첫마음의 저녁나절 글썽한 빗소리 생생해지는 골목집 모퉁이 벽에 기대어 옷이 젖어갔지요. 그러다 잠깐 내 생의 곁에서 팔짱을 끼다 말고 빤하게 쳐다보던 눈빛에 무심한 아름다움이 왜 슬픔으로 번져가나요.
어느새 그대 머리 가득히 송송 피어난 안개꽃 한 더미.
-시집 <수평선이 있는 집>에서
우무석 시인 / 소쿠리 안의 뜬구름
2004년 봄날 어느 아침, 무단히 월영주공아파트에 사는 정박사 집에 갔더니 그 아내 안경희 여사가 인사 삼아 웃음 함빡 머금은 흰소리를 건네주었다. 올해 처 음 열릴 권환문학제 인쇄물에 빼곡히 박힌 제전위원들 면면을 보았더니 마창 인근 이런저런 동네에서 아무 데나 끼어 '자노는 사람들(자신의 낭군을 포함 하여 나까지도자) 끼리끼리 빠지지 않고 겹겹 구름 떼로 모여 있다나 어쨌다나. 그 사람들 만萬날을 가슴가지만한 소쿠리 안에 뜬구름만 까불리다가 말다가 하면서 앞으로 십 년을 더 지내놓고서도 꿈결로만 둥둥 떠다닐 거라고, 그 말 듣 고 슬금슬금 밖에 나오니 이 나이 되어도 남루한 빈손의 부끄러움이 빚쟁이처 럼 구름 떼로 몰려왔기에 끝내 눈 둘 곳은 저 하늘뿐, 시든 구름조차 없는 천진 무구의 오월 하늘뿐.
-시집 <수평선이 있는 집>, 불휘미디어, 2013,
우무석 시인 / 웅동시편熊洞詩編 1 -월하 김달진 시인 생가에서
솔숲 대숲 들앉은 닭메[鷄山] 기슭 아래 안개비 자욱이 감싼 시인의 생가 마당에 서서 뽀얀 빗소리에 봄날 아침이 젖어 가고 ‘청시靑柿’* 나뭇잎새 암록색暗綠色이 유달리 빳빳해 보인다 무슨 징조처럼
막된 세상 흐릿한 삶 속에 나 얼마나 많은 일에 휩쓸려 떠다녔던가 이제 다시 휘둘리지는 말자고 얼키설킨 마음 깊숙이 비녀장을 내지른다 어떤 주술 걸 듯
* 김달진 시인의 시이자 1940년 청색지사에서 펴낸 첫 시집의 표제.
우무석 시인 / 웅동시편熊洞詩編 2 -정려가 있는 곳
웅천읍성 서쪽 길목 정씨 정려鄭氏旌閭 처음 세워졌다 순조 29년(1829) 12월의 일
열녀전 한 줄조차 읽지 못한 여인의 모진 죽음 아름답구나 빼어나구나 온 마을 칭송 자자했다는 글 새겨졌다
경자년(1900) 정월 후손들이 정려를 다시 옮겼다 웅천 동쪽 월남마을 밀성박씨 집성촌 들머리 길로 가문의 빛나는 광영 집안 부녀자들의 귀감 이 참에 비좌碑座마저 옥돌로 바꿨다 한다
옛 문헌 들춰 보고 정려를 찾아 나선 길 사람 없는 빈 집 더 많은 오랜 마을을 몇 번씩 고샅고샅 훑고 다녔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정려가 사라졌다
그 행방 물어물어 찾아낸 세 번째 겨우 터 잡은 정려의 거소 십 수여 년 전 도로확장공사로 밀려나 길 건넛산 후미진 자락 땅거미 우북한 자리 시멘트 비좌를 깔고 허술한 풍경 이루고 있었다
어쩌면 정려 자리 여기인 게 제격 한오백년 여인들의 무서운 미덕 잔혹한 죽음 냄새 풍기는 열녀기烈女記 따위 아무나 읽을 수 없으니 그나마 요행 아무나 쉽게 찾지 못하니 그나마 다행 세월 따라 때론 잊힐 만한 윤리도 있는 것이다
우무석 시인 / 웅동시편熊洞詩編 3 -대장동大壯洞 계곡 물소리
어느 하루 일하느라 다시 가 본 대장동 계곡 물소리 부근 연둣빛 나무들 사이 햇빛과 바람 여전하다.
성한 다리로 마냥 쏘다니던 한때 너와 함께 옛절 찾아가다 이쯤에서 멈춰 섰나 수만 장 나뭇잎새 팔랑이던 인연의 눈빛에 끌려 네 마음에 내 마음을 포개어 보지만 말로써는 차마 전할 수 없음을 알길래 묵묵히 흘러가는 물길만 바라보았지 한동안 물소리 장단 따라 가냘프게 네 어깨가 들썩거렸지 그게 벌써 몇십 년 전, 잊힌 줄 믿고 있던 먼 추억 하나 툭툭 발에 걸려 잠깐 휘청였네 . 아, 여기가 추억의 한 경계선이었구나 나이 들면 어느 그리움인들 죄다 허망인 것을 이제 더 다가가지 않을 테니 저 피안의 하늘가로 떠나보내려니
우무석 시인 / 웅동시편熊洞詩編 4 -청룡대靑龍臺 혹은 호텔라움
熊山縣苽洞海上有小臺俗傳謂文昌候崔先生遊犳之所
용원컨트리클럽 가는 길가에 청룡대 있다, 천 년 전 시름 많던 문창후 최 선생의 낚시터
초행길엔 찾기 어렵다 모름지기 대臺란 오르는 곳이거늘 어찌 길 아래 어중간한 깊이까지 계단 몇 단 타고 내려가야만 하다니 이런 사태를 상전벽해桑田碧海라 이르나니
정, 가 보려거든 네비에 ‘청룡대’ 말고 ‘호텔라움’을 입력하라 초라한 대를 굽어보는 미끈한 높이의 러브호텔 한눈에 확 안겨들 테니
골프 빌미 삼은 남녀들 말없이 드나드는 곳 살내음 섞인 숨소리로 몸의 월척급越尺級 매기는 뭍의 아늑한 낚시터 되니
이렇게 아직껏 낚시터 전통 살아 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송은영 시인 / 마음의 리모컨 외 6편 (0) | 2025.09.16 |
|---|---|
| 양전형 시인 / 고등어와 덕담 외 6편 (0) | 2025.09.16 |
| 유문호 시인 / 오래된 질투 외 4편 (0) | 2025.09.16 |
| 심호택 시인 / 그 아궁이의 불빛 외 7편 (0) | 2025.09.16 |
| 엄세원 시인 / 아라가야 낙타 외 6편 (0) | 2025.09.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