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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세원 시인 / 아라가야 낙타
나는 뼈와 살과 생각조차 다 사그라진 낙타다 토기라는 이름이 덧붙여졌다 새 몸통에 네발짐승의 입은 우는 듯 웃는 듯 벌어진 영락없는 사막의 족속으로 태어났다 낙타를 처음 본 아라가야 도공의 눈은 반짝 빛났을 거다 오래전 대양을 건너온 그 기척이 꿈틀거리는 소소리바람이 못 가본 사막, 꿈속에서 터벅터벅 걷던 그의 손끝이 묘한 떨림으로 가락가락 이끌렸을 어느 날 도공은 고운 흙과 바람을 몇 날 며칠 빚어 나의 몸통을 만들고 바람에서 건져낸 갈기를 넣었다 속눈썹을 빗살무늬로 긁어 모래바람 대비하고 눈동자 생생하게 새겨 넣으니 먼 곳은 가까워지고 상상은 부풀었겠지 이국의 계절 속에서 이국을 업은 나는 아라가야 한 모서리에서 전설로 태어났다가 막, 안개와 모래의 강을 건너려 할 때 순장되었다 한때 나무덧널무덤을 껴안고 끝까지 사막의 길 품었으니 내가 나를 건너간, 어쩌면 부장품이 아니라 무덤의 주인이었던 것 곁을 내어주고도 어둠 속에서 지상을 염원한, 발골 흙에서 다시 시작되는 몸의 결정체 동서로 교류하던 걸음 위에 다시 선다 몸속의 힘을 모두 비워내고 긴 기다림이 먹먹하도록 베일 벗는 중이다 쌍봉낙타로 거듭나는 중이다
엄세원 시인 / 백량금 빨간 열매가 하얀 꽃을 밀어내는 발코니 각자의 관점으로 오후를 뒤적이는 고부간의 빛살들이 있다 한 공간 안에서 잎이 입을 물고 감춰지고 들춰지고 뿌리 아래 뿌리가 엉켜 뭉클하다 톱니처럼 날카롭던 입이 떨어지면 어머니의 뾰족한 잎이 화분을 덮는다 붉은 열매조차 떨어지고 굵은 뿌리 더듬어 낡은 생을 수혈한다 발코니와 거실 사이에 놓인 유리문 투명하게 보이지만 결코 들여다볼 수 없는 사이 안과 바깥의 관계다 고부간의 기원은 다르지만 백량금으로 한 화분에 사는
엄세원 시인 / 해 질 녘의 갑옷을 입고
바다가 해 질 녘을 입었다
변산반도 적벽강 쇠 징처럼 조밀하게 박힌 포말들 결연하다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듯 물금을 여민 채 어스름과 대치중
어둠이 수평선으로 진격해올 때 갑옷 입은 여자가 앞장서 있다 고분 속에서 발굴된 신라의 귀족 같은 놀빛
형체 없이 몸은 다 흘러내렸는데도 머리에서 발끝까지 장신구들 그대로다 저 단단한 이음매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을 천여 년의 시간
이제 해 질 녘이 나를 껴입을 차례 잘게 부서뜨린 금가루 같은 모래가 묻어온다
금동관에 갇힌 것처럼 중얼거린다 누구인가, 누가 나를 착용하고 있나
자르고 잘라도 물금은 날[刀]만 무뎌질 뿐 파도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흰빛으로 빠져나가는 영혼 한 줄기
숨, 들고나는 내력 내게서 먼 미래가 출토되고 있다
엄세원 시인 / 생각의 기차 -기억의 인식이 회복되는 게임 기차가 심장 근처에서 끼익, 땅울림으로 돌아온다 어디에도 그를 찾을 수 없는 골든타임이 지나가고 있다 어떤 궤도가 내출혈로 접어들었을까 엇갈리는 지점 낯선 피가 선로의 스위치백을 밀어낸다 생각이 기적 울린다 지나쳐온 역들이 혼미하다 꿈틀거리는 몸은 서서히 제 자리를 찾아 가는데 기차는 깊은 터널을 지나 봄의 플랫폼에 들어서는 중이다 번쩍, 생각이 껌벅인다 가까스로 되돌아온 기차가 다음 역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고 있다 병실 안에는 불빛이 뇌혈관을 순환한다 검은 터널을 지나온 기적은 춘천시로 가는 복직이다
엄세원 시인 / 외투 속 물고기 박음질이 느슨해지자 옷감 속으로 태어나는 물고기 죄우로 미끄러지다가 터진 올 사이를 헤엄친다 울울한 불협화음이 물고기로 새겨지고 있다 비늘을 다듬듯 실오라기 하나로 맺음 된다 막힌 길 더듬다 그만 지문 한가운데를 찔리고 만다 옷감속에는 방심放心이 괴어 있을까 감침질로 입막음할 때 요동치는 아가미 시침질을 한다 꾹꾹 새겨 넣은 둘레에 연못 하나가 생겨 난다 물고기를 가지고 놀다가 바늘이 꿈틀거려 외투 속을 헤엄치고 있는
엄세원 시인 / 책등의 내재율
까치발로 서서 책 빼내다가 몇 권이 기우뚱 쏟아졌다 중력도 소통이라고 엎어진 책등이 시선을 붙들고 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배슥이 꽂혀와 반짝인다 정적을 가늠하며 되비추는 만화경 같은 긴 여운, 나는 잠시 일긋일긋 흔들린다
벽장에 가득 꽂힌 책제목 어딘가에 나의 감정도 배정되었을까 곁눈질하다 빠져들었던 문장을 생각한다
감각이거나 쾌락이거나 그날 기분에 따라 수십 번 읽어도 알 수 없는 나라는 책 한 권, 이 오후에 봉인된 것인지 추스르는 페이지마다 깊숙이 서려 있다
벽 이면을 온통 차지한 책등 그들만의 숨소리를 듣는다 어둠을 즐기는 안쪽 서늘한 밀착, 이즈음은
표지가 서로의 경계에서 샐기죽 기울 때 몸 안의 단어들이 압사되는 상상, 책갈피 속 한 송이 압화 같은 나는 허름하고 시린 과거이거나 목록이다
나는 쏟아진 책을 주워 천천히 넘겨본다 벽은 참 출출한 비결(祕訣)이다
엄세원 시인 / 꽃의 그립감
삼천 분의 일 경쟁을 뚫은 꽃 가지의 양 갈래 타고 앉아 박차를 가한다 받침 생기고 붉은색 돋고
하필, 아지랑이가 감겨와 개화에 참여한다 가물거리면서 움찔, 멈칫 봉오리 터준다
순간 깊숙한 밑동에서 올라오는 뜨뜻한 그 무엇 바짝 긴장하고 향기의 고삐를 죈다 겹겹이 계속 깜빡이면서 꽃술 지르물었지만 경련이 인다 저 소리 없는 투레질
봄은 전국 곳곳에서 전파를 타고 있다 전염성 강한 꽃의 바이러스, 매화나무 한 그루가 시범을 보인다 참관하는 태양, 거듭되는 훈기의 훈련, 꽃에도 부목 대고 붕대 감듯 해야 개화 경보가 발령된다
꿈틀거리는 봉오리 속에 고삐가 풀리고 있다 오후의 분위기를 다룰 줄 안다는 듯 햇발 갈기를 흩날리며 드디어 꽃이 온다
모두 함께 피고 싶지만 단 하나만 먼저 피어야 되는 숙명, 밑에서 올려다봐도 그 확률을 알 수 없다 어느 가지와 위치에서 클로즈업될지
컷이 들어오고 화면이 바뀌는 그때 꽃망울이 터지면서 하늘거린다
카메라 앵글을 좁혀가면서 화면 가득 채운다 파동이 파노라마로 일렁거린다
햇볕이 잘 드는 야외 정원에서 봄의 전령 매화가 첫 개화를 시작했습니다* *KBS 뉴스 리포터 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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