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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윤희 시인 / 雪國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6.
김윤희 시인 / 雪國

김윤희 시인 / 雪國

 

 

왜 나의 사랑이 不敬한가

대궐과 초막이 한 색깔한 세상

초막이 대궐인 척

시궁창이 냉이 꿏 들판인 척

썩은 들판이 진댤래 꽃물 새긴

오래된 정원인 척

 

오 때는 왔다

한 사흘 동안 희 눈의 대공항

통일천하

누가 와 구출할 수 있는가

해방숙 속에 갇힌

한 사람을

 

 


 

 

김윤희 시인 / 꽃의 비밀

 

 

억겁의 빗장 속에 숨겨온 오색 빛깔

조그만 씨앗에 소금 같이 침전된 앙금

꽃들은 무슨 언어를 그 안에 감춘 걸까

 

한낮의 눈 시린 햇살 간지러운 바람결을

소록이 고인 은하의 별들 이슬 되어 뿌려주면

기나긴 시간의 진액을 달여내는 삼투압

 

지난 가을 언 땅에서 살아남은 애잔함

헉헉한 8월의 열기 폭우에 짓밟혀도

어느 날 문들 터지는 저 황홀함 어쩌랴

 

 


 

 

김윤희 시인 / 여명의 바람에 눕다

 

 

꼬리를 물고 무는 불빛 멈춘 아스팔트

회색안개 내려앉아 묵상하는 시장 바닥

아귀 속 출렁거렸던 하루해도 무겁다

 

리모컨에 쏟아지는 눈발 같은 빈 언어들

변죽만 건드린 의료, 복지가 화두인 정책

성에 낀 유리창 너머 박스 접는 시린 손등

 

여명의 시간은 멀고 아직 어둔 동녘 하늘

차례 상 기다리는 종갓집 빈 채반 위에

먼 숲 속 새의 깃털에 묻어오는 바람소리

 

-《나래시조》, 2014년 여름호.

 

 


 

 

김윤희 시인 / 올 것이 왔다

 

당뇨 교실 한 10년 차

졸업은커녕 만년 유급인데

오늘은 치매 교실 나와 질문받고

대답하는 시험 보라고 하네

저 다섯 살적 앞섶에 손수건

꽂고 나풀나풀 뛰어가던

유치원 예비 소집일

이것저것 테스트에서 나

일등 먹었는데 척척 쓰고

읽고 시계도 볼 줄 알았는데

오늘은 무슨 선고 받으러 법정에 출두하는

중죄인 같다

암 늙음은 목숨의 피의자이고 말고

피해망상 짙은 분칠로 팍 누르고

강당에 들어서니

소꿉장난 수준의 기호를 들이대며

풀어보라고 하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도다

 

 


 

 

김윤희 시인 / 미리 쓰는 절명시

- 시는 나의 미망인

 

이제 겨우 그 맛 조금

깨쳤는데

효험보기 시작했는데 병석에서도

기적 일으키는 그 힘 보았는데

지기에서 측근으로 최근 승급해 놓았는데

나 떠나야 하나

미망인으로 그 남겨두고

먼저

 

 


 

김윤희(金閏喜) 시인

1939년 경남 진주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196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겨울방직》 《소금》 《오직 눈부심》 《설국》 《성자멸치》 등. 계간 <시와시학> 제14회 시와시학상 작품상 수상. 현재 한국 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한국시인협회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