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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고영 시인 / 만남의 이유
사람을 만난다는건 즐거운 일이다 가리워진 한 인생의 품격을 엿보고 그 틈새에 비집고 앉아 양파의 그것처럼 생각의 거풀을 벗겨내다보면 나는 그 사람의 짙은 향기속으로 몰래 빠져들어간다 사람마다 그려온 사각의 구도엔 높낮이와 질량에 대한 평가가 다를테지만 서러워할 일이나 때로 기꺼워할 일 모두를 턱주거리 마주 받쳐들고 세상이 우리에게 내려준 은혜로운 모순이나 삶의 부스럼같은 오욕의 빛깔을 말끔히 행궈 저 싸아한 봄 햇살에 걸터앉아 기분좋은 정오의 나팔소리 들으며 우리는 거저 사람을 만난다는 즐거움에 치를 떨 뿐이다
윤고영 시인 / 담배와 나
나는 종종 하늘나라로 먼저 간 선배 시인들과 소통을 하고 싶을 때 두 세개의 담배를 연속적으로 빨아댄다
비교적 시의 요람에서 맑은 유리가라스 깨지는 소리를 내다가 오늘날 괜찮은 후학들이 침 닳도록 칭송해 마지않는 공초 관식 상병 그 분네들과 한참 연기로 후우욱 교접을 하다보면
시를 밥처럼 퍼먹던 그리운 언덕 나에겐 꿈과 같은 천혜의 보시다 세상 눈뜨고 보면 에익 하는 꼴불견 하많은가 귀한 묵숨을 제멋대로 돌멩이 던지듯 팽개치는 일 문학의 도를 닦음에 행치 말아야 할것에 발 담구는 사람들
이 모두가 내 마음 한켠을 구겨 버려도 한 개비의 담배만 있으면 아픔 앓는 일 없는거다 시대가 복잡하다보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에도 나의 촉수가 곤두서기 마련인데 그럴때마다 후우욱 날려버리는 실락원의 치유법 아는 이들은 다 알거다 삼라만상의 오묘한 이치를.
윤고영 시인 / 낙엽
별하나 숨을틈 없는 투명한 검은 빛깔의 돌 밤새 누워있다
창너머 무수히 솟아 오르던 희열 침묵의 순리에 그만 토라지듯 먼지처럼 내려앉는 어제의 지폐 한장 숨죽여 울고있다
(밤새 누워서 삭아지는 뼈를 울겠지)
G선으로 흐르는 아리아 * 수직의 깊이 그 몇자의 땅속에 소복으로 단장한 봄날 아지랭이
윤고영 시인 / 세월
집사람은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어김없이 병원엘 가야한다
달랑 혼자인 우리 아이도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병원에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
우리집 세 식구 중 두 사람이 병원에 다닌다 한때는 한 달에 한번씩 다녔으나 이제는 두 달에 한번씩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윤고영 시인 / 어떤 소묘
저녁나절의 병원 응급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슬픈 얼굴로 할머니의 응급 침대를 에워싸고 제각각 눈치껏 위로의 순번을 기다린다 교회 여인들은 준비한 찬양을 분주히 오물거린다 서른 몇 살에 홀로된 김 할머닌 여든셋 억척스레 돈을 모아 지금은 수백억 대의 갑부라 했다 또 다른 무리들이 고급 세단 차에서 내린다 사전 내통이 된 듯 익숙한 배우처럼 다섯 아들과 상견례 한다 네 명의 딸들은 운명한 할머니 보다 더욱 기진해 있다 그래선지 곡 소리도 터지지 않는다 묘하게도 또 다른 분주함이 반짝인다 아마 장례절차 때문일 거라 소란하던 절차는 시간이 갈수록 평온해지고 핏기 없는 보름달이 가끔씩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윤고영 시인 / 의자論
내가 잘아는 우주산맥 정상에 낡고 오래된 자리가 하나 있다 그곳엔 먼 옛날 아담과 이브가 다녀가고 슈만과 클라라도 잠시 쉬었다 갔다 바이런과 릴케도 다녀가고 나폴레옹과 히틀러 이승만과 박정희도 근년에 다녀 갔다 다녀간 사람들 모두 대체로 말이 없었다 나는 매일밤 꿈속에 들때마다 그 귀한 역사를 말끔히 걸레질로 청소를 한다 하루도 걸르는 일 없이 내 몸과 같이 애지중지 하며 닦아내고 있는거다 그것에 무슨 이권이 있어서도 아니고 훗날 내게 돌아올 업날이 두려워서도 더욱 아니다 거저 계절의 마디와 마디를 이어주는 바람의 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승과 저승을 바통터치하는 신묘한 그 자리.
윤고영 시인 / 나의 아내
아파트보다 키가 큰 삼나무들이 봄햇살을 배구공처럼 헹가래질 치는 오전 열한시
밤과 낮이 모호한 굼뜬 나의 아내가 긴잠을 털고 일어난다
머리와 다리 도합 네번의 수술 두살 걸음마에서 이제 열살쯤 세월을 타고 진화해 간다
엇갈리는 팔 동작에 때론 웃음이 솟아 나지만 강남 사통팔달 길을 매일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성당과 절간이 눈에라도 뜨이는 날엔 영낙없이 주인을 찾아 시시콜콜 간섭이 예사가 아니다
언제 또 다시 뇌전판 회로가 오작동 할지 가늠 할수가 없어 평생 병원을 들락 거려도 싱긋 푸른 웃음만 날릴뿐
걱정이라곤 한톨 없는 천진한 저 표정
어쩌면 한 생애를 먼저 그곳에 다녀 왔을지도 모를 전생 성자들의 합성된 애락의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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