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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윤고영 시인 / 만남의 이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6.
윤고영 시인 / 만남의 이유

윤고영 시인 / 만남의 이유

 

 

사람을 만난다는건 즐거운 일이다

가리워진 한 인생의 품격을 엿보고

그 틈새에 비집고 앉아

양파의 그것처럼

생각의 거풀을 벗겨내다보면

나는 그 사람의

짙은 향기속으로 몰래 빠져들어간다

사람마다 그려온 사각의 구도엔

높낮이와 질량에 대한 평가가 다를테지만

서러워할 일이나 때로 기꺼워할 일 모두를

턱주거리 마주 받쳐들고

세상이 우리에게 내려준 은혜로운 모순이나

삶의 부스럼같은 오욕의 빛깔을 말끔히 행궈

저 싸아한 봄 햇살에 걸터앉아

기분좋은 정오의 나팔소리 들으며

우리는 거저

사람을 만난다는 즐거움에 치를 떨 뿐이다

 

 


 

 

윤고영 시인 / 담배와 나

 

 

나는 종종 하늘나라로

먼저 간 선배 시인들과

소통을 하고 싶을 때

두 세개의 담배를

연속적으로 빨아댄다

 

비교적 시의 요람에서

맑은 유리가라스 깨지는 소리를

내다가 오늘날

괜찮은 후학들이

침 닳도록 칭송해 마지않는

공초 관식 상병 그 분네들과 한참

연기로 후우욱 교접을 하다보면

 

시를 밥처럼 퍼먹던 그리운 언덕

나에겐 꿈과 같은 천혜의 보시다

세상 눈뜨고 보면 에익 하는

꼴불견 하많은가

귀한 묵숨을 제멋대로

돌멩이 던지듯 팽개치는 일

문학의 도를 닦음에

행치 말아야 할것에

발 담구는 사람들

 

이 모두가 내 마음 한켠을 구겨 버려도

한 개비의 담배만 있으면

아픔 앓는 일 없는거다

시대가 복잡하다보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에도

나의 촉수가 곤두서기 마련인데

그럴때마다 후우욱 날려버리는

실락원의 치유법

아는 이들은 다 알거다

삼라만상의 오묘한 이치를.

 

 


 

 

윤고영 시인 / 낙엽

 

 

별하나 숨을틈 없는

투명한 검은 빛깔의 돌

밤새 누워있다

 

창너머 무수히

솟아 오르던 희열

침묵의 순리에 그만

토라지듯

먼지처럼 내려앉는 어제의

지폐 한장

숨죽여 울고있다

 

(밤새 누워서 삭아지는 뼈를 울겠지)

 

G선으로 흐르는 아리아 *

수직의 깊이 그 몇자의 땅속에

소복으로 단장한 봄날 아지랭이

 

 


 

 

윤고영 시인 / 세월

 

 

집사람은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어김없이 병원엘 가야한다

 

달랑 혼자인

우리 아이도

두 달에 한번 병원엘 간다

일년에 여섯 번

병원에 가지 않으면 큰일이 난다

 

우리집 세 식구 중

두 사람이 병원에 다닌다

한때는 한 달에 한번씩 다녔으나

이제는 두 달에 한번씩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냐

 

 


 

 

윤고영 시인 / 어떤 소묘

 

 

저녁나절의 병원 응급실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슬픈 얼굴로

할머니의 응급 침대를 에워싸고

제각각 눈치껏 위로의 순번을 기다린다

교회 여인들은

준비한 찬양을 분주히 오물거린다

서른 몇 살에 홀로된 김 할머닌 여든셋

억척스레 돈을 모아

지금은 수백억 대의 갑부라 했다

또 다른 무리들이 고급 세단 차에서 내린다

사전 내통이 된 듯

익숙한 배우처럼

다섯 아들과 상견례 한다

네 명의 딸들은 운명한 할머니 보다

더욱 기진해 있다

그래선지 곡 소리도 터지지 않는다

묘하게도 또 다른 분주함이 반짝인다

아마 장례절차 때문일 거라

소란하던 절차는 시간이 갈수록 평온해지고

핏기 없는 보름달이 가끔씩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윤고영 시인 / 의자論

 

 

내가 잘아는 우주산맥 정상에

낡고 오래된 자리가 하나 있다

그곳엔 먼 옛날 아담과 이브가 다녀가고

슈만과 클라라도 잠시 쉬었다 갔다

바이런과 릴케도 다녀가고

나폴레옹과 히틀러

이승만과 박정희도 근년에 다녀 갔다

다녀간 사람들 모두

대체로 말이 없었다

나는 매일밤 꿈속에 들때마다

그 귀한 역사를 말끔히

걸레질로 청소를 한다

하루도 걸르는 일 없이

내 몸과 같이 애지중지 하며

닦아내고 있는거다

그것에 무슨 이권이 있어서도 아니고

훗날 내게 돌아올 업날이

두려워서도 더욱 아니다

거저 계절의 마디와 마디를 이어주는

바람의 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이승과 저승을 바통터치하는

신묘한 그 자리.

 

 


 

 

윤고영 시인 / 나의 아내

 

 

아파트보다 키가 큰 삼나무들이

봄햇살을 배구공처럼

헹가래질 치는 오전 열한시

 

밤과 낮이 모호한

굼뜬 나의 아내가

긴잠을 털고 일어난다

 

머리와 다리 도합 네번의 수술

두살 걸음마에서

이제 열살쯤

세월을 타고 진화해 간다

 

엇갈리는 팔 동작에

때론 웃음이 솟아 나지만

강남 사통팔달 길을

매일 씩씩하게 걸어 다니며

 

성당과 절간이 눈에라도 뜨이는 날엔

영낙없이 주인을 찾아 시시콜콜

간섭이 예사가 아니다

 

언제 또 다시 뇌전판 회로가

오작동 할지 가늠 할수가 없어

평생 병원을 들락 거려도

싱긋 푸른 웃음만 날릴뿐

 

걱정이라곤 한톨 없는

천진한 저 표정

 

어쩌면 한 생애를 먼저

그곳에 다녀 왔을지도 모를

전생 성자들의 합성된

애락의 얼굴이다.

 

 


 

윤고영 시인 (1951-2024)

1951년 경북 영일 출생. (본명: 윤치헌). 포항수산대 졸업, 한양대학원 엔터테인먼트 (EEP)과정 수료. 1968년 솔뫼 동인활동, 1995년 조선문학 등단(이성교,박진환 추천). 조선시문학회, 바라시동인 회장 역임. 현재 예도시동인 회장, 동인연합 전국모임 추진대표, 한국문협 회원. 시집 <내가 너를 잊어도 우주는 변하지 않는다>. 외 동인지 40 여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