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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낙추 시인 / 그 男子의 손
그 남자의 손은 무쇠솥 뚜껑보다 크고 투박합니다 소나무 옹이보다 억센 손마디로 여린 싹도 키우고 고운 꽃도 피우게 하는 요술쟁이 손 그 손박닥엔 딱딱한 못이 박혀 있습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단단한 못 속에는 서러운 세월을 안으로 삭힌 땀과 눈물이 고여 있는 걸 아시는지요 그 남자의 손에서는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생색 한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그 손이 요즘 들어 희고 부드러운 손 앞에서 주눅 들어 자꾸 주머니 속으로 숨습니다 아내의 가슴을 보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거친 그 남자의 손이 가엾어 죽겠습니다
-시집 『그 남자의 손』에서
정낙추 시인 / 부부
하루 종일 별 말이 없다 풀 뽑는 손만 바쁘고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리 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하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 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정낙추 시인 / 조개 까는 女子
삼십여 년을 태안시장 한 귀퉁이 눌러 앉아 조개 까는 女子 갯물에 퉁퉁 불은 낙지 대가리 손가락으로 안 보고도 척척 잘도 깐다 조그만 조개 칼 한 바퀴 돌리면 깜짝 놀란 조갯살 바르르 떨고 나비 같은 껍데기는 소복이 쌓인다 조개 까듯 이놈의 세상 홀랑 까서 알맹이 껍데기 가려 놓으면 좀 좋겠냐고 까도 까도 고단한 삶을 탓하지만 조개 칼 하나로 자식들 키우고 공부 시켜 아무 걱정 없는 줄 시장 사람들 다 안다 처녀 적에 내 조개가 일찌감치 눈 뜬 걸 눈치 채고 그 인간이 살살 꼬드겨서 얼른 팔았지 그랬더니 평생 지지리 속만 썩인 덕에 내 궁둥이가 이렇게 앉은 못 박혔어 그저 女子는 조개를 잘 팔아야지 잘못 팔면 요 모양 요 꼴 난다고 연신 떠드는 입 비리기가 안흥 항구 앞바다요 걸기가 풀 두엄 더미다 입이 근질거려 하루도 집에서 못 쉬는 조개를 닮은 女子 서방 노릇 제대로 못하는 웬수니 악수니 하면서도 웬수 때맞춰 점심밥 차려 주려고 조개 칼 놓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 들물처럼 빠르다
정낙추 시인 / 아내
풀은 아내의 땀으로 자라는지 뽑은 자리 돌아보면 어느새 무성한 숲 풀뿌리에 지친 호미질 끝 이 여름 다 가도록 바다보다 깊은 콩밭 가운데서 백로처럼 움직이던 수건 쓴 머리 땀에 전 까만 얼굴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민들레 꽃씨처럼 가벼운 몸 三伏 불볕에 녹아 아득한 우주로 증발했는가 땅 속 깊이 스며들었는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나선 어스름 밭고랑 일년 내내 거친 손 분신으로 남은 닳고 닳은 호미 자루 옆 아내는 쇠비름 노란 꽃으로 가녀리게 피어 있다
정낙추 시인 / 별꽃풀을 아시나요
가을에 튼 어린 싹 엄동 넘기더니 입춘 지나기 무섭게 다닥다닥 꽃 피운다 청천 하늘에 잔별두 많구요 우리 밭에는 지슴두 많구나 며느리 게으르다고 구박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별꽃풀 우리 집 여자 호미 들고 나설 때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나이롱풀, 월남풀 희한하게 작명도 잘 한다 풀이름이 별꽃풀이란 내 말 척 받아 염병할 놈의 별풀인지 별꽃풀인지 꼴같잖은 게 이름은 예쁘네 징글징글한 웬수 덩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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