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정낙추 시인 / 그 男子의 손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정낙추 시인 / 그 男子의 손

정낙추 시인 / 그 男子의 손

 

그 남자의 손은

무쇠솥 뚜껑보다 크고 투박합니다

소나무 옹이보다 억센 손마디로

여린 싹도 키우고 고운 꽃도 피우게 하는

요술쟁이 손

그 손박닥엔 딱딱한 못이 박혀 있습니다

살아 백년 죽어 천년이 지나도

풀리지 않을 단단한 못 속에는

서러운 세월을 안으로 삭힌

땀과 눈물이 고여 있는 걸 아시는지요

그 남자의 손에서는

잘 썩은 두엄 냄새와 구수한 곡식 냄새가 납니다

비누로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그 냄새는 그 남자가 지쳐 쓰러질 때마다

일으켜 세우는 신비한 힘입니다

그 손은 욕심 없는 정직한 손입니다

이 나라 만백성을 먹여 살리고도

생색 한번 안 낸 위대한 손입니다

그 손이 요즘 들어

희고 부드러운 손 앞에서 주눅 들어

자꾸 주머니 속으로 숨습니다

아내의 가슴을 보듬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거친

그 남자의 손이 가엾어 죽겠습니다

 

-시집 『그 남자의 손』에서

 

 


 

 

정낙추 시인 / 부부

 

하루 종일 별 말이 없다

풀 뽑는 손만 바쁘고

싸운 사람들 같아도

쉴 참엔 나란히 밭둑에 앉아

막걸리 잔을 건네는 수줍은 아내에게

남편은 멋쩍게 안주를 집어준다

평생 사랑하다는 말 하지 않고도

자식 낳고 곡식을 키웠다

사랑하지 않고 어찌 농사를 지으며

사랑 받지 않고 크는 생명 어디 있으랴

한세월을 살고도

부끄러움 묻어나는 얼굴들

노을보다 붉다

 

 


 

 

정낙추 시인 / 조개 까는 女子

 

삼십여 년을

태안시장 한 귀퉁이 눌러 앉아

조개 까는 女子

갯물에 퉁퉁 불은 낙지 대가리 손가락으로

안 보고도 척척 잘도 깐다

조그만 조개 칼 한 바퀴 돌리면

깜짝 놀란 조갯살 바르르 떨고

나비 같은 껍데기는 소복이 쌓인다

조개 까듯 이놈의 세상 홀랑 까서

알맹이 껍데기 가려 놓으면 좀 좋겠냐고

까도 까도 고단한 삶을 탓하지만

조개 칼 하나로 자식들 키우고 공부 시켜

아무 걱정 없는 줄 시장 사람들 다 안다

처녀 적에 내 조개가 일찌감치 눈 뜬 걸 눈치 채고

그 인간이 살살 꼬드겨서 얼른 팔았지

그랬더니 평생 지지리 속만 썩인 덕에

내 궁둥이가 이렇게 앉은 못 박혔어

그저 女子는 조개를 잘 팔아야지

잘못 팔면 요 모양 요 꼴 난다고 연신 떠드는 입

비리기가 안흥 항구 앞바다요

걸기가 풀 두엄 더미다

입이 근질거려 하루도 집에서 못 쉬는

조개를 닮은 女子

서방 노릇 제대로 못하는 웬수니 악수니 하면서도

웬수 때맞춰 점심밥 차려 주려고

조개 칼 놓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

들물처럼 빠르다

 

 


 

 

정낙추 시인 / 아내

 

풀은

아내의 땀으로 자라는지

뽑은 자리 돌아보면 어느새 무성한 숲

풀뿌리에 지친 호미질 끝

이 여름 다 가도록

바다보다 깊은 콩밭 가운데서

백로처럼 움직이던 수건 쓴 머리

땀에 전 까만 얼굴

아내가 보이지 않는다

민들레 꽃씨처럼 가벼운 몸

三伏 불볕에 녹아

아득한 우주로 증발했는가

땅 속 깊이 스며들었는가

돌아오지 않아 찾아나선

어스름 밭고랑

일년 내내 거친 손

분신으로 남은

닳고 닳은 호미 자루 옆

아내는

쇠비름 노란 꽃으로 가녀리게 피어 있다

 

 


 

 

정낙추 시인 / 별꽃풀을 아시나요

 

가을에 튼 어린 싹

엄동 넘기더니

입춘 지나기 무섭게

다닥다닥 꽃 피운다

청천 하늘에 잔별두 많구요

우리 밭에는 지슴두 많구나

며느리 게으르다고 구박할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는

별꽃풀

우리 집 여자 호미 들고 나설 때마다

이놈의 지긋지긋한 나이롱풀, 월남풀

희한하게 작명도 잘 한다

풀이름이

별꽃풀이란 내 말 척 받아

염병할 놈의 별풀인지 별꽃풀인지

꼴같잖은 게 이름은 예쁘네

징글징글한 웬수 덩어리

 

 


 

정낙추 시인

1950년 충남 태안 출생. 1989년부터 지방문학 동인지 '흙빛문학'에서 활동. 2002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등단. 시집 <그 남자의 손> <미움의 힘> 등. 태안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소금을 옛 방식대로 재현 복원한 <태안자염> 대표. 농산물 인터넷쇼핑몰 <태안장터 영농조합> 대표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