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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 시인 / 거미집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정영 시인 / 거미집

정영 시인 / 거미집

 

 

떠날라치면

천지사방 줄을 치고

팔다리 붙잡아 껴안고 울어주는

하늘궁전

 

아침이면 온몸을 짜내어 짓고

저녁이면 또 몇채씩 허무는

무욕의 사원

 

햇빛 아래선 너무 투명해

잘 보이지 않고

바람 불면 주룩 흘러내리는

너와 나 사이, 공터

 

거기 살고 싶었다

 

 


 

 

정영 시인 / 가련한 사전

 

 

이토록 어수선한 당나귀들이 고요히

침을 섞고 뱉고 토하고 늘어뜨리며 뛰노는 것은

어떤 고요를 말하는 책에도 없지

 

이 도시에선 모두가 전등 아래 모여 앉아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는 척하느라 고개 끄덕이기 바쁘고

우아하게 턱을 괴고 웃다가 집에 돌아와

사전을 만드느라 밤마다 두통에 시달리지

 

저 울음은 너무 오래 혼자 두지 말라는

저 울음은 추레한 마음을 모른 척해달라는

저 울음은 떠나달라는

저 울음은 먼 꿈을 꾸는 신음일 것이며

 

저 웃음은 돌아보지 말라는

저 웃음은 약이 좀 필요하다는 신호일 것이며

 

폭풍처럼 몰아치는 말의 회오리 속에서

점점 두꺼워지는 우리들의 사전

 

폭풍처럼 몰아치는 말의 회오리 속에서

점점 두꺼워지는 우리들의 사전

 

거리마다 뒤섞이는 이 털 달린 짐승들의 말은

악마들이 지상에 도착하는 신호음처럼

밤하늘을 거대한 공포로 물들이는데

 

오늘 밤에도 빌딩 꼭대기에 올라가 외친다

사랑한다고

 

우린 우리의 말을 영원히 짐작할 뿐이지

 

짐작이란 이 가련한 소통

먼 달을 보며

 

 


 

 

정영 시인 / 쓸쓸한 바닷가

 

 

매몰차게 날 버린 주인들이여!

첫 죽음의 의자 위에 흰 모래꽃 필 거랍니까?

 

내 저녁밥상 좀 봐요

저, 먹구름

 

― 시집 『평일의 고해』(창비, 2006)

 

 


 

 

정영 시인 / 열두 시간의 기도

어둠의 살을 깎아 제 몸에 붙이는 새다, 너는

날지만 아무도 못 알아보는 한밤의 새다, 나는

새벽의 언덕은 수레를 끄는 노인들로 조심스럽고, 새야

성경책을 옆구리에 끼고 가는 신자들로 경건하고, 새야

전봇대에 몸을 말고 잠든 노숙자들의 영혼은 전신주를 타고

집집 전전하다 영혼이 빠져나간 빈 몸의 외로움을 달래려

다리를 포개고 잠든 가족들의 입내 나는 단잠을

태어났을 때처럼 한번만 더 맛보고, 새야

아침이면 나뭇잎처럼 비 젖은 도로에 누워 꺼져간다

어제처럼 십자가의 불이 꺼진다

교회 담장의 철문을 열고 사람들이 들어간다

일찍 집을 나선 신자들이 새벽의 어둠처럼 벽으로 스며든 다

흩어진 신발들이 비에 젖는 동안 12월이 왔고 1월이 왔으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다, 새야

의자에 앉아 졸던 교회 경비원들은

신자들의 기도를 한잔 두잔 받아마시다 취한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열차 시간표처럼 재림을 기약할 순 없다고

잠꼬대를 한다, 새야

정오에도 새들은 자정인 듯 날아오른다

목을 매달 최적의 높이에서 되돌아와 교회 문앞에서 서성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게 변한대도, 새야, 우리는

나뭇잎이 적막처럼 도로 위에 누워 있다. 12월

그 위를 달리는 바퀴들에게 안녕을, 1월

 

― 시집 『평일의 고해』(창비, 2006)

 

 


 

 

정영 시인 / 간절(間節)

 

 

코를 길게 늘여도 맡아지지 않는 먼 냄새들이 있다

폭설에 오지 않는 새들은 어느 별보다 멀고

허공에 팔을 허우적대는 날엔 탈골되어 수북한 마음들,

집 밖의 삶이니 뼈를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가장 가까운 별도 사는 동안엔 닿을 수 없다는데

당신 마음을 내 뼈가 삭아갈 때 안다면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기쁠까 우리 거창한 예식도 없이,

탄생을 칭얼거릴 때 인생이 오래 걸리진 않을 거란

노인들의 위로가 나를 풀처럼 가만히 눕혀주었지

 

같은 바람을 타고서도 서로를 못 알아보는 이번 생엔

숲으로 가 어둠에 몸을 걸친다

이만하면 늙어가는 기술을 하나씩 알아채고 있는 걸까

결국 껑충껑충 뛰어야만 기운이 빠지는 날들,

우린 아이가 아닌 척 애를 써야만 하는 어른들인 거지

 

산 자와 죽은 자들의 노래가 뒤섞이는 밤엔

돌아설 때 간혹 보인다 새들이 이번 생에 내린 닻

그 운명의 닻 그 닻의 녹슬음,

살고 있으니 마음 다치는 일 대수롭지 않지

 

한 나무가 얼룩진 잎을 매달고 천 번의 눈을 맞는 동안

나는 어떤 계절과 계절 사이에 잠시 머물다 가는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침묵하고

 

 


 

 

정영 시인 / 내 눈을 꺼내어 주머니에 넣고​

걷는다

눈뜬 자들의 막막함으로 새들은 날아오르고

안개가 걸음 묶으며 언 땅속 같은 관계를 부추기는

새벽

나의 애인은 장님

나는 우리의 관계를

모두가 잠들어 있느라 아무도 봐주지 못한 개화(開花)라 발음한다

눈뜨라, 주머니 속 두 눈아

나의 애인은 꿈꾸는 장님

문 열면 사막까지 펼쳐지는 아뜩한 공원

거기, 줄 끊긴 연 너풀대는 한그루 나무

그 아래 오래도록 내가 있다

감은 눈으로도 우는 노을과 뚝뚝 떨어지는 과실 같은 별과

가슴을 찾느라 허공을 더듬는 다섯 손가락

입맞추기 위해 늪으로 빠져드는 긴 혀와

여덟 굽이의 고개에서 방향감각을 상실한 안개와

빛을 더는 어쩌지 못하고 어둑해진 들판과 전봇대에 걸쳐진 새들의 비행

그 앞에 나의 애인이 서 있다

바라보고 있었다

두번째 애인도 세번째 애인도 장님이 되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관계가

모두가 웃고 떠드느라 아무도 봐주지 못한 낙화(落花)라 발음한다

나의 애인은 풍경 바라보길 좋아하는 사람

거기, 우리 누웠다 온 자리 들여다보는 일 막막하고

아직 가시지 않은 우리 체온을 지우러 온 아침볕 바라보는 일 더 막막하니

영원히 눈감으라, 주머니 속 두 눈아

-시집 『평일의 고해』 중에서

 

 


 

 

정영 시인 / 몇 겹의 사랑

 

 

꼬리를 잘라내고 전진하는 도마뱀처럼

생은 툭툭 끊기며 간다

어떤 미련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끊어내고

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럼이 없나

 

한몸의 사랑이 떠나듯 나를 떠나 보내고

한 몸의 기억이 잊히듯 나를 지우고

한 내가 썩고 또한 내가 문드러지는 동안

잘라낸 자리마다 파문 같은 골이 진다

이 흉터들은 영혼에 대한 몸의 조공일까

 

거울을 보면 몸을 바꾼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언가 잘려나간 자리만가만가만 만져보는 것이다

 

심장이 꽃처럼 한잎 한 잎 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면 이렇게 단단히 아프진 않을 텐데

몸을 갈아입으면 또한 마음이 자라느라

저리는 곳이 많다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 쳐지는지

수억 광년을 살다 터져버리는 별들은 모르지

 

흉터가 무늬가 되는 이 긴긴 시간 동안

난 또 어떤 사랑을 하려

어떤 벌을 받으려

 

몇 겹의 생을 빌려 입는걸까

 

 


 

 

정영 시인 / 혈관에 꽂아 넣는 슬픔

 

 

제가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사십 년을 살고서야 이 게임의 룰을

몇가지 알게 되었지요

 

무엇이 나를

밤이면 빈 의자에 앉혀 울게 하는지

사방을 향해 기도하게 하는지

 

모르게 하는 게 당신의 룰이었습니다

 

발가벗고

팔을 날개처럼 퍼덕이는

천사가 되어 불타버리고 싶어 하는 아이

 

그토록 만든 게 룰이었습니다

 

그 무엇도 내가

저주하지 않도록 나를 무생물이라 정하였을 때도

애인에게 물고기의 이름을 붙였을 때도

새들이 죽고 내 눈이 사라졌을 때도

행복했지요

 

죽음에도 통로가 있다면

그 길을 더듬으리

 

긴긴 룰이었습니다

 

맨손으로 불덩이를 붙들고 있을 때도

세상의 절연한 감정들에 서운했지요

죽은 새들도 철장에 가두나요?

내게 보이려고 내게 보이려고?

 

탄생이 쏘아올린 화살은

죽음의 과녁을 향해 달려갑니다

압니다

당신이 조준했고 당신이 쏘았고

당신이 과녁을 어느 먼 곳에 숨겨

 

우리들의 손목엔 몇 겹의 사슬이 채워지는 건가요

웃을 만큼 웃어야 하는 건가요

 

중발하는 방법은 없습니까?

 

룰입니다

 

무엇이 나를

옆으로 두 칸 앞으로 한 칸

뒤로 다섯 칸을 가게 하는

매일 아침 낯선 바람 속에서

신호등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보게 하는지

이제는 알고 싶지 않습니다

 

이게 룰입니다

 

점심엔 피자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오후에 간단한 일을 끝내고 나서

친구를 만나고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순환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눕습니다

TV도 봅니다 게임도 합니다

 

이 게임이 백 년 후에 끝날지

 

내일 끝날지

 

모르는 채 잠드는 게

룰입니다

 

지금은 슬프다 슬픈 시를 쓰는 게

룰입니다

 

이제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이 빌어먹을 흥미로운

게임의 룰입니다.

저는 지금 저녁 무렵의 초원에 놓여 있습니다

 

 


 

정영(鄭瑛) 시인

1975년 서울 출생.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0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평일의 고해』 『화류』, 산문집 『지구 반대편 당신』 『누구도 아프지 말아라』 등. 뮤지컬 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