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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임수 시인 / 격렬비열도
세상 어디 갈 곳 조차 없는 듯 막막한 허공에 둥둥 떠있는 듯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듯 그렇게 생의 파도에 맞서 한 세월 조금씩 갉아먹었지만 누군가에게 따스히 향할 마음을 위해 누군가 편안히 다가올 마음을 위해 한시라도 문 걸어 잠근 적 없다
그러니 오늘도 홀로 밤거리 헤매며 미안하다고 오직 미안할 뿐이라고 혼잣말이나 풀풀 날려대는 그대 그대도 이제 그 오래된 단절의 문을 박차고 나오시라 거기 격렬하지는 못하지만 비열하지도 않은 또 다른 삶의 그대가 가만히 서 있을 것이니
윤임수 시인 / 근황
앞뒤 재지 않고 욱하던 시절이 있었네 함부로 뱉은 말들이 사정없이 벽을 때렸고 날아간 소주잔이 서로를 아프게 치기도 했네 그러나 이제는 생의 뜨내기들 허름하게 모여드는 역전시장 막걸리집 막된 고성에도 눈살 쉽게 찌푸리고 싶지 않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 해도 더 이상 서운한 내색 보이고 싶지 않네 그저 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신산한 삶의 언어들이나 술잔에 풀어 홀짝홀짝 마시고 싶네 그렇게 몇 잔 술에 취해 욱하고 속엣것들 쏟아지더라도 까짓것 쓰윽 닦아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아오고 싶네 그것이 마치 오랜 습관인 것처럼 조용히 하루를 여미고 싶네 -시집 『절반의 길』 (천년의시작, 2017)
윤임수 시인 / 삐삐선을 풀어다오 충남 아산시 배방면 공수리 내 고향 성재산 방공호에서 72년 전 나를 다시 보는구나 도민증을 발급해준다고 해서 모인 우리는 곡물창고에 갇힌 다음 날 무참히 학살되었지 이유는 인민군 점령 당시 부역을 했다는 것 난을 피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살았을 뿐인데 경찰과 치안대는 우리가 인민군을 도왔다며 자신들과 다르다는 앙심 가득한 손으로 에이원과 카빈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지 그리고 이 방공호에 마구 던져졌지 무릎조차 펴지 못하고 버틴 72년이구나 이제 다시 세상을 보게 되었으니 먼저 이 손목의 삐삐선을 풀어다오 자꾸만 골을 파고드는 녹슨 탄피도 치워다오 가족이 모두 몰살당해 돌보는 이 없을 저 안쓰러운 유골들도 보살펴다오 그래 이제는 부디 가슴에 묶인 통한의 세월을 풀어다오 비참하게 버려진 800여 명을 호명하며 잔악한 총검 앞에 원통하게 새겨진 우리 모두의 상처와 고통도 보듬어다오 나를 위하여, 너희를 위하여 우리 자손들을 위하여, 부디
윤임수 시인 / 맑은 강물
졸음에 겨운 한낮 얼음치의 하얀 뱃구레를 살살 간질이다가 혼자된 늙은 사공이 나룻배를 띄우면 얼른 길을 열어주는 강물을 본다 강굽이 따라 간혹 흔들리고 물갈래마다 풀풀 아쉬움을 풀어놓기도 하지만 모래톱에 사근사근하고 모난 돌 머리도 가만 쓰다듬어 주는 참으로 여리고 착한 저 강물 바라보다가 건너편 돌비알 아래 길게 그 강물에 일찌감치 발 담그고 날 새는 줄 모르는 달빛 따라 나도 쉽게 떠나지는 못할 것 같다
윤임수 시인 / 경북선
바른 길은 바로 가지만 굽은 길은 함께 굽이치는 법도 알거늘 그 길밖에 모른다고 쯧쯧 그저 그렇거니 함부로 덤부로 말하지 말라 꽃 그늘은 있거나 말거나 으드득 지친 노곤함과 함께 퍽퍽한 생애도 싣고 가거늘
-시집 『상처의 집』, 실천문학사, 2005)
윤임수 시인 / 상처의 집
바싹 마른 그 집 다 쓰러져가는 블록담 속으로 들어가보고 싶다 들어가서 세월에 덧나고 금 간 상처와 상처가 서로 붙들고 쓰러질 듯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그 오래된 끈기를 보고 싶다 가장 큰 슬픔으로 한순간 쓸쓸히 무너져내려도 아쉬움 없을 깊고 오래된 눈빛들의 상처의 집 하나 짓고 싶다
-시집 『상처의 집』 中에서. 실천문학, 2005년.
윤임수 시인 / 사량도
사량도 지리망산 시작은 있는데 철계단 아무리 목을 빼고 보아도 내리막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뻔한 길을 걸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내어줄 수 없다는 듯 안으로 말아 튼 몸길 단호하다 단호한 것들 앞에서 늘 그랬듯이 망연히 돌아보는 먼 눈 속으로 천년을 헉헉거린 늙은 파도 이를 악물고 따라오고 있다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습기만 가득한 몸부림 그렇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너무 쉽게 온 것이다
윤임수 시인 / 그냥 가게
노인네가 촌에서 구멍가게 하나 차렸는데 당최 이름 짓기가 어렵더라구 그래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이름을 뭐라고 지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어봤지 근데 누가 뭐 그런 것으로 고민하느냐구 그냥 가게라구 하라구 퉁명스럽게 한 마디 던지더라구 뭐 그것도 좋을 것 같아서 바로 나무 간판 하나 달았지 달고 나서 보니 “그냥가게”도 그냥저냥 좋더라구 쓸데없이 거창하지도 않구 웃기 좋아하는 나처럼 편하기도 하구 그렇더라구 그건 그렇구 기왕 왔으니 뭐라도 사가야지? 왜 그냥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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