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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진의하 시인 / 용암리의 물소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진의하 시인 / 용암리의 물소리

진의하 시인 / 용암리의 물소리

​- 머루다래원에서

 

 

짙푸른 숲으로 울타리 친

남양주시 별내면 용암리 머루다래원

세월을 감고 살아온 파란 가지들

머리 풀어 하늘하늘 손짓하는데

어디로 떠나는 물소리인지

제 갈 길을 찾아

굽이굽이 산모퉁이 돌아

알 수 없는 속울음으로

울며 울면서 가네.

떠나도 손짓하는 이

한 사람 없어

떨친 미련 뒤돌아보지 않고

눈물에 젖은 족적(足跡)도 흔적 없이

돌 뿌리에 채인 발길

하얗게 부서지는 육신 하나 끌고

서럽게서럽게 울어울어

어디인지 정처 없는 길

떠나가고 있네.

 

 


 

 

진의하 시인 / 바람의 波紋

 

 

내 빈 가슴속에

파랗게만 출렁이는 바다

보들레르의 관능이다

 

불타는 태양 속에서

눈부신 지느러미를 반짝이다가

하얗게 등출 세운 꼬리짓으로

하늘로 치솟는 한 마리 용

파도다

 

내 빈 가슴속에

파랗게만 출렁이는 바람

생명의 관능이다

 

물집 잡힌 발바닥이

피나는 하루의 시간들을 태우면

비틀거리는 몸짓을 위하여

술을 마시는 평화

침잠 하는 호수가 아니라

한사코 치솟아 꽃이 되는 분수

파문(波紋)이다

 

형체 없는 바람은

미친 듯이 날뛸 때만

살아 있는 시간이다

내 빈 가슴을 채우는 술잔 속엔

나비가 날아든다

 

 


 

 

진의하 시인 / 낙엽에 관한 명상

 

 

낙엽을 밟고 거닐다보면

허공속에서 멀어지는

빈 수레 구르는 소리

가슴도 서걱서걱 서글프네

 

시작이 꿈이었다면

끝은 그 어디에 있는 것일까?

때가되면 훌훌 벗어던지고

황홀하게 떠날줄 알아야 되겠지만,

 

새파란 젊은 한 때

천방지축 펄럭거리다가

날벼락 같은 천둥번개 온갖공해 다 맞아가며

버텨온 곡절(曲折)들이

빈 손 빈 가슴에 아픔만 섞고

사그락 사그락 어디론가 밀려가는 결별의 발자국 소리 뿐

지금은 조잘이던 산새들도 떠나버린 적막공산(寂眞空山)

뼈다귀로만 버티고 선 빈 하늘에

빛을 잃은 낮달 하나

목숨처럼 걸고 섰네

 

 


 

 

진의하 시인 / 숲에서 우는 새

 

 

날마다 숲에서 우는 새야,

살아 생전

혼자서 넘어야하는 고개

오늘도 제자리 맴돌다가

주린 설음 곱씹어

우는 새야,

 

허공을 나는 날개짓

네 길이요,

주린 설움 곱씹어 우는 울음

네 문이다.

 

날다가 쉬고

울다가 기어드는 곳 숲이려니

산발머리 휘휘 풀어헤쳐 휘날리는

싱그러운 숲은 네 보금자리

울며울면서도 떠날 수 없는 자리.

 

 


 

 

진의하 시인 / 눈길을 걸으며

 

 

눈길을 걷는다

이 외로운 발자국을

거둘 수가 없다.

더운 숨길에도 지워진

足跡뒤를

누군가가 따라 밟는다

동행아닌 동행

그것은 가버린 날들의 어느 오후

초설로 걸었던

약속은

초설뒤의 혀로 핥은

햇살에 녹아버리고

그날의 가슴엔

누군가 밟고간 발자국만 남아

한사코 뒤돌아보게 한다.

 

 


 

 

진의하 시인 / 雜草

 

 

보도블록 틈새

이름 없는 잡초가

담에 갇혀 있다

 

우리의 삶도

저러하려니

 

울타리로 막을 수 없는

봄이

블록 담을 밀어내고 있다

 

우리의 봄도

저러하려니

 

 


 

 

진의하 시인 / 대문을 여는 것은

 

 

꽃은

햇살 앞에

가슴을 열어놓고

산다

 

날이 밝아

대문을 여는 것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마음을 여는 것은

그 무엇엔가

만남의 길을 여는 것이다

 

강물이 바다를 향하여

길을 트는 것도

밤하늘의 별들이

빛으로 떠 있는 것도

가슴을 여는 것이다

 

우리는 빈들에

꽃 한송이 피우려고

아침마다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선다.

 

 


 

진의하 시인(晉宜夏)

1940년 전북 남원 출생. 일본예신대 동 대학원 졸업. 한국문학예술신인상. 국제 펜클럽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전북문인협회 회원. 한국미래문학연구원 회원. 국제문화예술협회 중앙위원. 대한민국서화협회 이사. 제13회 동백문화상. 제2회 조선문학상. 일본예술문학상(문학부분). 제2회 서포문학상. 제7회 열린문학상. 시집: <겨울가로수> <꽃등 밝혀 길을 열고> <잠들지 않는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굽이치는 강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