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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진 시인 / 불멍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5.
이진 시인 / 불멍

이진 시인 / 불멍

 

 

캠핑의 마무리는

불을 껴안고

실컷 멍 때리기

 

덥지도 않은가 봐

장작 추가요

불 속에 잠긴 밤

 

이참에 털어놓자

못다 한 얘기

탁 탁 재는 튀고

 

마음 속 찌꺼기도

던져 태울까

밤은 깊어 간다

 

 


 

 

이진 시인 / 사랑니

 

 

입 벌린 와인잔 속에 아이의 젖니가 담겨 있다

까까먹고, 벌레 먹은

부화되지 못한 꿈들이 투명한 유리 속에 갇혀 있다

꼬물꼬물 기어 다니는 상아질 기억들

내게도 이빨이 위안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홀로그램 같은 사랑이

하얀 징검돌을 딛고 내게로 오기까지

잇몸을 뚫고 솟아오르던 좁쌀니 유치가 빠진 자리에

미운 일곱 살로 솟아오르는 송곳니, 어금니들

피아노 건반처럼 가지런히 입 안을 온통 차지하면

아이도 사랑니를 앓을 것이다

 

교정기를 끼고 웃는 너의 얼굴 너머로

우리는 그렇게 누군가의 부러운 사랑니였다

사랑을 품게 되면서

욱신거리는 통증을 어금니로 지긋이 누르듯

누군들 첫사랑의 통증을 견뎌내야 한다

 

뿌리까지 솟구쳐 올라 흔들리며 앓던 사랑니

뽑힌 자국을 남기면서

무너진 잇몸 깊숙한 곳에서 솟아오르던 아린 슬픔

입 안 흥건히 그리움으로 괴어

버릇처럼 혀끝으로 더듬더듬 빈자리를 확인하는 날들

 

이제 내 입속에는 사랑니가 없다

 

 


 

 

이진 시인 / 달팽이관이 불안하다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징검다리가 된다

내가 건너갈 수 없는

돌과 돌 사이에서 가라앉는 말들

그 간격이 힘에 부칠 때도 있다

네가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나의 달팽이관을 점령한다

드릴로 귀와 귀 사이에 터널을 뚫는다

소리가 소리를 집어삼켜

소리 속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누가 이 소리의 블랙박스를 해독해 주었으면

종일 되새김질로 짓는 말의 감옥

달팽이집을 내려놓기로 작정한다

달팽이관은 지금 청소 중

 

-시집 <손바닥 위에 지구별을 올려놓고>에서

 

 


 

 

이진 시인 / 유목

 

 

오늘도 누군가는

누울 곳 없어

별이 되었다고

 

수많은 집이 있어

그 집 어딘가

잠들 곳 있을까

 

저녁은 다시 오고

공원 벤치도

주인이 있는데

 

별빛이 너무 밝아

잠들 수 없어

밤새 걸어야 해

 

*전세사기피해를 입은 분들을 생각하며

 

 


 

 

이진 시인 / 겨울 강가를 서성거려요

 

 

엄마는 말씀하셨죠

얘야 물가에는 가지 말아라

몸도 마음도 물기를 먹으면

무거워 못쓴다

 

강가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

몰래 눈물을 흘려요

강가에선 지나는 이의

눈물을 자세히 보지 마세요

 

물이 가득한 강은

어제보다 더 천천히 흘러요

어쩌면 나아질

기회를 주고 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걸까요

 

엄마는 말씀하셨죠

얘야 물가엔 가지 말아라

한기 들어 아플라

어서 집으로 돌아가

나로 살아야겠어요

 

잠시 망설이던 강도

이제 편안히 흐르겠군요

 

 


 

이진 시인

경남 밀양 출생.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학예술학과(문예창작) 석사과정을 졸업. 1995년 <시인과 사회> 가을호 신인상. 1998년 <신동아> 34회 논 픽션 공모 당선. 2000년 <SBS서울방송> TV문학상 수상. 2008년《시인동네》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손바닥위에 지구별을 올려 놓고> <프라하의 일기> <지우개도 그림을 그린다> <서랍속의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