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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운 시인 / 새벽 부두에서
해무 짙은 새벽녘 부두에 나가본다 해거름에 출항한 어선 하나둘 돌아오고 위판장 전등을 밝혀 생선 경매 알린다
'섬은 외롭다'는 말 아직 유효한지 뭍으로 길게 뻗은 은갈치 같은 방파제 그 끝에 빨간등대가 수평선을 지켜 섰다
탈 많은 난바다를 질러온 여객선 항구에 왔다고 고해하듯 고동 울면 이때다 포구의 밥집 시장기를 호객한다
홍성운 시인 / 능소화
확성기 달고도 묵음을 고집한다 오래된 담장 위로 하늘대는 넌출들 기다린 세월의 무게 된더위 눈물 몇 점
소화는 궁녀였다 구중궁궐 무수리
지는 해 바라보며 두 볼이 빨개졌을
끝내는 꽃이 되었네 그 길목 지켜 서서
-《정형시학》2023. 여름호
홍성운 시인 / 장마
가끔은 적시고픈 목마른 땅이 있다 가끔은 뇌성으로 깨우고픈 사람이 있다 가끔은 번개를 놓아 밝히고픈 하늘이 있다
홍성운 시인 / 이슬
풀잎 팽팽히 시위 트는 아침이슬
건듯 바람 불어 장력(張力)이 끊기면
지상은 울음바다다 눈물의 성소다
홍성운 시인 / 나무야 쥐똥나무야
변두리 나무들도 저간엔 서열이 있어 쥐똥나무는 한사코 중심에 서지 못한다 낙향한 술벗 현 씨처럼 오일장에나 들앉는 것
밀감꽃향 마구 토하는 섬의 오월햇살 좁쌀만한 꽃들을 좌판에 풀고 보면 쥐똥꽃 쥐똥나무꽃 아이들이 깔깔댄다
몇 년째 세금고지서를 받은 적이 없다 늦가을 끝물쯤에 동박새가 거두어 갈 쭉정이 쥐똥 열매들 노숙자의 동전 몇 닢
홍성운 시인 / 차마고도
믿음 한 점 품고 설산 라싸로 간다 오체투지나 수레를 끄나 부처께 가는 거다 한 생을 길에 부린다 해도 그냥 내릴 싸락눈발 단출한 삶이지만 오가는 정이 있다 말이나 야크 등에 차를 싣고 소금을 싣고 봄여름 산을 넘으면다랑이 마을은 겨울이다 고산지 하루해는 세상과 다르나니 마방의 눈과 귀는 어둠에도 순하다 한데서 노숙을 하고 불경을 독송한다 산은 물을 낳고, 물은 사람을 만나 가축의 마른 똥에 불씨가 피어난다 성과 속 경계를 지우는 금줄 같은 설산의 길
홍성운 시인 / 버릴까
"이제 그만 버리세요" 오랜 전 아내의 말 수십 년 내 품에서 심박동에 공명했던 버팔로 가죽지갑을 오늘은 버릴까 봐 몇 번의 손질에도 보푸라기 실밥들 각지던 모퉁이는 이제 모두 둥글어 가만히 들여다보면 나를 많이 닮았다 그냥저냥 넣어뒀던 오래된 명함들과 아직까진 괜찮은 신용카드 내려놓으면 어쩌나, 깊숙이 앉은 울 엄니 부적 한 장
- 시조집 『버릴까』(2019, 푸른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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