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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기독신춘문예 시 당선작 최은하 시인 / 붉은 십자가
햇살 밝은 은총을 이파리마다 녹음으로 펼쳐 보인 순례의 길 뿌리를 흔드는 폭풍우에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는 나뭇가지의 자세를 풀지 않았다 무릎을 꿇은 그림자에 피맺힌 그늘의 멍 자국이 짙어만 갔다 오병이어 기적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말씀의 한 획 한 자 거룩한 성령체로 익혀나갔다 흰 비둘기의 깃털 같은 허공이 포근하게 감싼 과일에 햇무리가 눈부신 광채를 둘렀다 한 시절 주름살 접힌 고뇌로 결실의 축복에 십자가를 짊어져야할 때 하늘빛에 푸르게 날이 섰다 서릿발이 잎맥에 못을 박는 고통이 나이테를 휘감아 우주의 울림으로 퍼져나갔다 흥건히 핏물 번진 단풍 한 잎 두 잎 숨결이 졌다 새날의 부활로 열매가 조용히 꼭지를 놓았다 닭이 세 번 목울대를 돋운 새벽녘 십자모양 야광 띠를 두른 청소부가 죄의 쓸개즙같이 얼룩진 길을 빛살무늬 선명히 쓸고 있다
최은하 시인 / 꽃밭에서
휘돌아온 바람으로 네 비로소 자리하여 하늘 가장 가차이 춤을 추는 몸짓으로 너는 꽃으로 피고 나는 별빛으로 남아 네 향기속에 내 이름 사르련다 우리 땅 한가운데 너 혼불의 새야
최은하 시인 / 그리운 중심(中心)
그리웠다. 오늘도 떠돌면서 중심을 잡으려, 중심이 그립기만 했다. 만 천길로 공전의 속력에 갇혀 우리의 별은 현기증으로 들떠있고 흔들리지 않는 무엇이 어디 있으랴 명확해 보이는 것일수록 헤매도는 허공에서 끝내 그리운 손길과 눈빛은 중심이었다. 어디서나 교차점 한 가운데 매인 중심의 자유여. 언제나 자유는 그물코 안에만 있는가. 그 풀기 어려운 끈이기에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좇는 불나비인가. 십자(十字)의 상징이여. 그리움으로 하루의 아침부터 밤까지 지친 육신을 허우적이다가 제 위치로 돌아와 허탈하는 나와 이웃들의 생살 껍질벗기 -- 애간장 녹여 부르는 노래만 절절히 중심으로 모아져 빛살을 내뿜고 거기 그 자리, 그 시간에 실명(失明)으로 나는 어둠을 살고 그리움의 성(城) 쌓기는 그적지 멀기만 하다. 오늘도 그리워라, 그리운 중심이여.
최은하 시인 / 불꽃
불꽃들이 타오른다. 깊은 어둠의 마지막을 모여 춤을 추나 합창의 노래는 여울을 이루다가 별이 되어 떠오른다 이 시간은 누구나 눈을 감고 숙연히 팔을 치켜 벌린다 저마다 되돌아가지 못하는 슬픔은 추억으로 남고 훗날엔 회상으로 번지어 이야기가 된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떠도는가 불꽃으로 타오르다가 한점 불티로 삭아 흩날리는가 물음은 물음의 사슬로 엮어지고 누구던가, 아련히 기억은 멀어지기만 한다. 가슴 깊숙이 타오르던 불꽃은 무거운 그림자 떨쳐버리고 이제야 차지한 자유로움으로 하늘 향해 훨훨 날아드는구나 손짓하여 부르거나 무슨 수작의 시늉일랑 하지 말아라 바람따라 들어올리는 그 모습은 제대로의 완성일지니 불꽃의 환상은 가까이 별로 뜨고 별들은 사람의 머리 위에 자리한다.
최은하 시인 / 내 안에는 언제나
내 안에는 언제나 다른 사내 하나가 있다. 알다가도 모를 사람 그는 나 같지가 않아서 탈이다. 탈속에서 그는 말없이 천연덕스레 희연하다. 그와는 매양 거품을 일으키기도 하고 절벽을 갈라 세우기도 하며 불더밀 지피게도 하고 돌아선 함묵이게도 한다. 그의 힘자랑은 혀를 빼내어 휘두를 지경이다. 어느 때라도 그를 만날 것 같지만 나타나질 않고 숨어 지내는 습성으로 날 차지해 가두고 곧잘 훼방꾼이다. 그는 아무래도 날 닮지는 않은 성 싶다. 그렇지만 어떤 때 그는 나와 한 울타리 한 배 안의 서로가 아니냐는 투정이다. 상심과 회한으로 날뛰거나 황혼을 마주하고 강변을 거닐 때면 불현듯 나타나 다가서며 위로의 눈빛으로 감싸주기도 하고 힘차게 손을 잡아주기도 한다. 빤한 그의 수작을 아는 터라 나는 나대로 힘빠진 발길을 끌고 스스로를 달래 타이르며 돌아오곤 한다. 어느 샌가 그는 오간 데 없고 나는 휘청거리며 귀로에 든다. 그의 주인 행세는 날 슬픔에 떨게 하고 정말이지, 영락이게 한다.
최은하 시인 / 숲으로 가리
숲으로 가리우리 사랑이 자리 잡았을 때얼싸안고 숲으로 가리숲 속으로 걸어 걸어서들어서서는 황혼을 맞으리.돌아올 길을 잃으면 더 없이 좋으리
숲으로 가리나의 사랑이 꽃인갑다 싶을 때그 불씨 욱여안고 숲으로 가리숲 속으로 들어가선 아침을 맞으리바다나 강이 보이는 숲에서 눈을 뜨리
숲으로 가리사랑이 어두워지기 전에눈 내리는 겨울 숲 숲으로 가리숲 속으로 깊이 들어교회당의 종소릴 들으리내 맨처음과 마지막의 기도문을 떠올리리
숲으로 가리오늘 하루가 다 가기 전에까마귀떼 우짖다 잠든 숲으로 가리숲 속으로 들어가서 나도 잠드리허구헌 꿈속의 꿈으로 고이 잠드리
숲으로 가리이 세상 태어나 배우고 익힌사랑이란 말 허뜨려버리기 전에이제 어둡게 우거진 숲으로 가리 숲 속에서 숲과 함께 바람을 만나사라지는 바람이 되리한줄기 바람소리로 남으리
최은하 시인 / 별과 같이 살고 지고
고향을 떠나 살면서부터 별 하나 품고 산다네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별을 날리고
꿈결에서도 별을 내리받아 별과 함께 반짝이고
별이 뜨지 않는 날이어도 창문은 꼬옥 열어 놓는다네
별을 안고도 마냥 별이 그리워서
대낮에도 별을 찾아 별을 심고 가꾸며 살고지고
-한국 문학의 100년을 열다』 (시문학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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