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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인하 시인 / 리플레이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박인하 시인 / 리플레이

박인하 시인 / 리플레이

울다 지친 그녀가 겨우 잠들었습니다

가운데가 훅 꺼진 낡은 소파는 찌그러진 마음 같아요

우리 집에 가자, 나랑 살자

좋은 냄새를 풍기며 다가와 그녀가 말했습니다

굿모닝 좋은 아침이야

굿모닝 좋은 아침인가

나를 만지며 하하하 그녀가 웃었고

웃음소리는 아침햇살 속에서 쨍그랑거렸어요

사랑해, 보고 싶어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말을 밤을 새워 연습했어요

시끄러워, 집어치워

사랑해 사랑해 안아줘 안아줘

쓸데없는 말들만 거품처럼 부풀었다가 흩어지고

온 힘을 다해 자기야, 자기야, 지겨워, 지겨워

나는 배운 말의 전부를 쏟아냈습니다.

습관이 되어버린 말들은 죄가 되었어요

그만해, 그만하라고, 한 번만 더하면 혀를 잘라버릴 거다

나는 혀가 고장 난 앵무, 그녀를 미치게 만드는 나쁜 새

진짜 하고 싶은 말들을 꺼내기 위해 가슴의 깃털을 뽑았어요

얼마나 아픈지 눈을 질끈 감고 부리를 꽉 다물자

나의 말들은 바르르 떨었습니다

사랑해, 자기야, 안아줘, 그러지 마, 지겨워

집어치워, 재수 없어

그녀가 다가와 물었어요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그것까지 잊어버린 거니?

나는 못 들은 척해야 했어요

가, 가버려 오래 날지 않아서 두려웠지만 열린 창밖으로 나왔어요 나는 게 아니라

뛰어내리는 기분이었어요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긴 의자는 횃대 같아서

나는 그만 말을 참지 못하고 자기야, 사랑해, 안아줘

사람들은 눈을 반짝이며 자기들이 좋아하는 말을 시켰어요

누군가 다가와 다정하게 말을 걸었어요, 우리 집에 가자

​​

-계간 『문예바다』 (2023년 봄호)

 

 


 

 

박인하 시인 / 봄 야유회

 

 

 영혼이랄지 마음이나 슬픔, 그녀가 품은 사랑 같은 건 잘 모르겠어 바깥을 묻혀오는 냄새들에서 바람난 벚꽃과 신록을 느끼기도 해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어떤 곳들을 맴돌다 왔다는 증거지 사람들이 그녀에게서 빛을 발견할 때 아무도 모르는 어둠을, 어둠을 들켜 부서질 때 부서진 조각들이 반짝이는 걸 봤어

 

 돌아올 곳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너무 늦게 돌아와 오래오래 씻다 흐느끼던 몸 방울방울 맺힌 물기들은 가장 좋은 위로, 애무하듯 닦아주었지만 슬픔까지 닦였는지 그 많은 날들 오기만큼이나 팽팽하던 젖가슴과 실룩이던 엉덩이의 감촉은 얼마나 또 감질나던지 그녀의 몸 위에 남은 애인들의 얼룩진 체취도 토닥토닥 닦아 주면서

 

 찬란의 다른 이름은 슬픔이라 생각했어 젖가슴과 엉덩이의 시간을 지나 웅덩이처럼 패인 쇄골과 푸석이는 살결들 몸의 다른 이름은 쓸쓸함인 것 같아 함께하며 해진 내 몸도 촘촘함을 잃어버리고 우리는 서로의 내부를 통과하지 못한 채 낡아버렸어 문신처럼 희미해진 푸른 글자들, 봄 야유회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박인하 시인 / 소금 기둥

 

 

우리 도망가자

심장의 고동은

살기 위한 것인지 죽기 위한 것인지

모든 것이 너와 나를 잡으러 다니는 비밀경찰

지나치던 바람도 밀고자처럼 수상하더라

 

모르는 곳으로 가자

누가 우릴 알아볼까

땀이 배도록 깍지를 끼고 더 멀리

네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나쁜 죄를 뒤집어쓰고

밤이 흘리는 유혈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붉어졌네

함께 울지 못하고 혼자 훌쩍였네

우리는 서로를 모르는 사이

나를 물으면 세 번만 부인해

 

네가 버린 나는 많이 울었던가

밤이 길었다는 기억

우리는 아무에게도 붙잡히지 않았네

뒤를 돌아다보았을 뿐

 

그 후로 슬픔은 오래 녹지 않는 것이 되었다

 

 


 

 

박인하 시인 / 테를지의 밤

 

 

 아직 살아 있구나 늦지 않았어 너덜거리는 자루 가득 장작을 메고 오가는 밤의 노역은 불을 지키는 시간 바람에 넘어진 것들 차곡차곡 주워다가 추운 밤 부려 놓으면 뜨겁게 솟아오르는 불의 제전 나는 불을 지키는 자, 치장 없이 허름한 옷가지로 성별을 감추었기에 누구도 쉽게 나를 호명하지 못한다 나는 이름 없이 늙어 가는 가난한 노파 불을 살피느라 언 몸을 녹일 수 없다 꺼져 가는 불씨를 살려내고 문 밖으로 나서면 얼굴을 찢는 바람뿐 어떤 날은 별도 뜨지 않아 캄캄한 숲을 비틀거리며 걷는다 뜨겁고 차가운 것이 이생의 일인지도 잘도 자는구나 장작이 타는 소리 꿈속에서도 들리는지 재가 되어 가는 소리다 담요를 걷어차고 잠든 걸 보니 오늘도 나의 불길은 뜨 거웠구나

 

-시집, 「내가 버린 애인은 울고 있을까 걷는사람/2024)

 

 


 

 

박인하 시인 / 호우

 

 

 안식을 지루해하는 당신은 매일 길을 버리고 처음 앞에 서 있네

 

 나의 아담, 무화과 푸른 잎 둘러 준 당신의 손은 어디에 그토록 밝았던 눈은 무엇을 보고 있나 보이지 않아도 걷는다 알고 걷는 길이 어디 있을까 비가 많이 와요 걱정 마라 난 어디든 괜찮다 당신 가슴 속을 흐르는 급류 당신의 뼈가 나를 이루었으니 슬픔도 세습이 되나요 당신이 아침과 저녁을 헤맬 때 나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나요 낙원은 돌아갈 수 없는 곳의 이름인가요 더는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요 빗줄기는 거세지는데 웅크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는 늙어버린 나의 연인이여

 

 


 

 

박인하 시인 / 나는 여기에 있어요

 

 

나는 도망가다 끌려가다 벗겨진 신발

흙먼지 속에 나뒹굴면서도 몸을 숨겨야 했지

발길에 채어 제멋대로 풀린 끈

모두가 흩어진 깊은 밤

나를 홀리고 사라진 이를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면

다시 거리에 쏟아지는 오월의 햇살이

부서진 뼈들을 염하는 하루 이틀 하루

 

나는 죽지 않는 몸으로 견뎌야 하는 증인

오래된 것들은 더 이상 늙지 않아

여기 아무도 찾지 않는 산그늘에도

흰 꽃이 무성한 계절

망자들은 오늘도 제 신발을 찾아 떠돌다

부르튼 발을 내게 한 번씩 넣어 보곤 해

그걸 따라 하는 바람도 있고 고라니도 있어

 

네 꿈속을 찾은 내 이야기가

이상한 꿈이었다 생각 말기를

셀 수 없는 이름들, 이곳의 초록은 시퍼렇다

 

 


 

박인하 시인

1969년 광주에서 출생. 2018년 여름호 《서정시학》 신인상으로 등단. 서정시학회 동인. 한국작가회의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