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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영섭 시인 / 사람을 만나는 일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고영섭 시인 / 사람을 만나는 일

고영섭 시인 / 사람을 만나는 일

- 화두 3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서로를 끄는 무엇이 있기 때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서로를 닮은 무엇이 있기 때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기 때문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일정한 절도를 지키기 때문

 

아,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시공이 어우러진 시절인연 때문

 

 


 

 

고영섭 시인 / 고향

 

 

지친 사람이 쉬는 곳이다

 

외로운 사람이 기대는 곳이다

 

나는 온 식구들이 있는 곳으로

 

날마다 찾아가 긴 숨을 쉰다

 

-시집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

 

 


 

 

고영섭 시인 / 간절懇切

-진랍眞臘 기행 1

 

 

캄보디아 씨엠립의 앙코르 와트 중앙탑에서

 

방전放電된 내 삶의 베터리를 어루만지며

 

불광佛光으로 충전시켜 내 온몸의 앵글로 찍어 낸

 

수미단 위에 평온히 누워계신 와불 한 분.

 

*진랍은 원나라 사신 주달관이 쓴 진랍풍토기에 나오는 캄보디아의 옛 이름.

 

-시집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

 

 


 

 

고영섭 시인 / 길

-사랑의 지도

 

 

눈앞에 셀 수 없이 널린 길들도

내 정작 마음먹고 나가려 할 땐

너 댓 길 서너 길 두어 길 되다

한 길로 줄어들기 마련이듯이

지상에서 제일로 부지런한 건

나의 손과 또 나의 발이라지만

머리에서 가슴으로 못 옮기고선

가슴에서 발끝으로 못 이르고선

세상에서 제일로 머나먼 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나아가는 길

발끝에서 온몸으로 못 나가고선

마지막엔 자기조차 못 버리고선

눈앞에 널려 있는 길들 중에서

마음 둘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나

지상 위에 남겨진 오직 한 길은

내 온 몸을 던져서 열어가는 길.

 

 


 

 

고영섭 시인 /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붙들리고 잡혀있는 나의 일상을

훌훌 벗어 던지고 길 떠나 보라

망설이며 쭈뼛대던 이전의 나와

막 돌아온 이후의 나가 다른 것은

 

내 눈 귀에 스쳐간 저 두두물물들

내 코 혀에 닿아간 저 삼라만상들

내 몸각과 생각을 투과한 저들이

내게 던진 영상의 언어를 적을 때

 

기억이 남겨놓은 사건의 뼈대

기록이 전해주는 향기와 온기

큰 쇳덩이 갈아서 바늘 만들듯

나는 쓴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며

직립보행 루시 *가 쓴 도저한 기록!

 

떠나기 전의 나와 돌아온 내가

무엇이 달라도 분명히 다르듯

분별이 있으므로 오염이 있듯

또렷한 기억 넘는 희미한 기록.

 

* 1974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서 발굴된 소녀의 이름. 320만 년 전에 최초로 직립보행을 했던 뼈의 주인공인 그녀의 뇌는 자몽 한 알 크 기 정도로 작았고, 골반과 다리뼈의 모습은 침팬지 등과 달리 두 다리로 서서 곧게 걸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 뼈 화석의 발견으로 사람을 사람이게 한 첫 번째 특징은 두뇌용량이 아니라 직립보행임이 명확히 밝혀졌다.

 

 


 

고영섭 시인

1963년 경북 상주 출생. 동국재학교 불교학과 졸업 및 동 대학원 불교학과 졸업(철학박사). 1989년 《시혁명》, 1995년 《시천지》로 작품활동 시작. 1998~1999년 월간 《문학과 창작》 추천 완료. 2016년《시와 세계》 문학평론 등단. 시집 『몸이라는 화두』 『흐르는 물의 선정』 『황금똥에 대한 삼매』 『바람과 달빛 아래 흘러간 시』 『사랑의 지도』 『시절인연』. 평론집 『한 젊은 문학자의 초상』.. 2016년 제21회 현대불교문학상, 2016년 제16회 한국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