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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영란 시인 / 열매의 습성
붉게 익는 열매의 습성을 가진 나무 속에는 성냥 한 통씩 들어있어 나무 가득 매달린 성냥 모가지들이 부는 바람에 탁 탁 불씨 트는 소리를 낸다 불의 깃털 번져 나와 열매마다 적린을 바른다 심장에서 꺼낸 둥근 능선들 껍질을 감싸 안은 붉음이 익혀낸 이름 하나 귓불 안쪽까지 뜨거워지는 화상이 나를 벤다 이 뜨거움으로 나는 너를 오래 견뎠었다 허공을 물들이는 붉은 발톱들 툭 떨어져 뭉개지면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 새겨놓았다
당신이 익어 떨어진 곳은 언제나 내 가슴팍이다
강영란 시인 / 말하지마라
백년에 한 번 핀다는 꽃이 있고 죽을 때 단 한번 운다는 새도 있고
말하지 않아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데 그러느라 백년을, 일생을 가는데
그러니 말하지 마라 그대에게 가느라 내 몸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운다
강영란 시인 / 백화등은 솜빡 피고
떠난 사람의 여린 발목이 그리워질 때면 저 꽃이 온다네 그가 걸어 간 천년의 건널목 절벽을 움켜쥔 꽃들이 흰 풍등을 올리면 마음이 먼저 따라가는 저물녘
소리 없는 바람개비에 향기 실어 보내며 몇 번이나 생을 건너야 그 고요에 닿을 수 있는 건지 내가 올린 풍둥은 어느 날에 푸른 달의 심장이 되어 떠오르는 건지
피지 마라! 꽃 따위로는 그 말 들어주지 못한 후회로 백화등은 솜빡 피고 피어서 그대를 닫을 수 없어져 버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만 몸을 기울이는 허공
사무친 것들이 있어서 열린 꽃 문으로 향기 몇 동이 퍼붓는 것이니
사랑이여 희게 오는 사랑이여 그만 건너오시라 봄밤은 짧으니
강영란 시인 / 몹쓸짓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다 보냈다
강영란 시인 / 방풍수
제주에서 바람을 견디는 건 생의 절반을 견디는 것이다
계절에 따라 부는 방향에 다라 지역에 따라 바람이 불리는 이름은 50여 가지가 될 듯한데
바다에서 불어오건 산에서 불어오건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육풍이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해풍이 그 속에 잠겨서 휘청거린다
바람의 신이라 불리는 영등할망이 드는 꽃샘추위부터 다음해 영등할망이 들 때까지 귤나무는 맨몸으로 바람을 받아낸다
밭과 밭 사이 경계에 바람막이 방풍수를심어 방풍수 높이에 10배까지 바람을 막아준다
그럼에도 방풍수는 독이 든 성배 너무 자라면 햇볕이 차단되어 품질이 떨어지고 병충해도 많으니 5미터 정도가 적당한 높이
적당은 너무 어려워 그대와 나 사이 거리 적당을 몰라 이렇게 두어 걸음 더 멀찍한 너무 높게 자라난 방풍수
『귤밭을 건너온 사계』2020년 시인동네
강영란 시인 /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강물이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상처는 아물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지만 흉터는 내 몸의 성좌 무덤까지 간다 그러니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가시연이 베어져 열리면 꽃이 되듯 칼에 베인 손 피가 꽃이 되는 순간 내 몸의 저의 생을 기록하는 일에 몰두한 칼의 바깥
잘못 든 길은 상처이거나 흉터를 남긴다 애초에 너는 나의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갈 너와 다가오는 너 사이에 있는 상처이거나 흉터는 아프고 있거나 아팠었거나의 문제이다
『시인동네』 5월호, 2017,
강영란 시인 / 접목갱신
날을 받아놓고 나무 몸뚱이 잘라내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놓는다
아버지가 심으신 귤나무였다 저 나무에 열매가 달리면서 같이 살자던 아버지였다
나는 눈물 슴벅한 채 주황을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주황 나의 주황
나는 지금도 새로운 주황을 꿈꾸는데 아버지의 주황은 어디로 갔는가
접목을 할까 고민하는 동생에게서 그날의 아버지를 본다
강영란 시인 / 푸른 별 아래 이는 푸른곰팡이
꽃은 나무속에 들었고 돌은 흙속에 들었네 이제 거처에 들었으니 그렇게 가만히 나두는 건 정말 중요한 일
깊숙해서 안온한 창고 속 저장의 시간 스스로 농밀해지다 노란 숨 한번 크게 내쉬고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푸른 별이 뜨네
너를 세워두고 돌아온 시간들 숨이 따뜻했던 너를 기억하는 일 이렇게 아파서 푸른 곰팡이가 피네 하나의 기억에 하나의 곰팡이 고요, 고요 번져서 저장의 시간이 자꾸 썩어가네
생의 먼 데서 먼 데까지 미안함이 오래되었다는 고백
푸른 별 아래 이는 푸른 곰팡이
-<귤밭을 건너온 사계>,시인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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