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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영란 시인 / 열매의 습성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강영란 시인 / 열매의 습성

강영란 시인 / 열매의 습성

 

 

붉게 익는 열매의 습성을 가진 나무 속에는 성냥 한 통씩 들어있어

나무 가득 매달린 성냥 모가지들이 부는 바람에 탁 탁 불씨 트는 소리를 낸다

불의 깃털 번져 나와 열매마다 적린을 바른다

심장에서 꺼낸 둥근 능선들

껍질을 감싸 안은 붉음이 익혀낸 이름 하나

귓불 안쪽까지 뜨거워지는 화상이 나를 벤다

이 뜨거움으로 나는 너를 오래 견뎠었다

허공을 물들이는 붉은 발톱들

툭 떨어져 뭉개지면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 새겨놓았다

 

당신이 익어 떨어진 곳은 언제나 내 가슴팍이다

 

 


 

 

강영란 시인 / 말하지마라

 

 

백년에 한 번 핀다는 꽃이 있고

죽을 때 단 한번 운다는 새도 있고

 

말하지 않아도

꽃이 피고 새가 우는데

그러느라 백년을, 일생을 가는데

 

그러니 말하지 마라

그대에게 가느라

내 몸에도 꽃이 피고 새가 운다

 

 


 

 

강영란 시인 / 백화등은 솜빡 피고

 

 

떠난 사람의 여린 발목이 그리워질 때면 저 꽃이 온다네

그가 걸어 간 천년의 건널목

절벽을 움켜쥔 꽃들이 흰 풍등을 올리면

마음이 먼저 따라가는 저물녘

 

소리 없는 바람개비에 향기 실어 보내며

몇 번이나 생을 건너야

그 고요에 닿을 수 있는 건지

내가 올린 풍둥은 어느 날에 푸른 달의 심장이 되어 떠오르는 건지

 

피지 마라! 꽃 따위로는

그 말 들어주지 못한 후회로

백화등은 솜빡 피고

피어서 그대를 닫을 수 없어져 버리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으로만 몸을 기울이는 허공

 

사무친 것들이 있어서

열린 꽃 문으로 향기 몇 동이

퍼붓는 것이니

 

사랑이여

희게 오는 사랑이여

그만 건너오시라

봄밤은 짧으니

 

 


 

 

강영란 시인 / 몹쓸짓

 

 

나는 오늘 당신을

생각하지 않고

하루를 다 보냈다

 

 


 

 

강영란 시인 / 방풍수

 

 

제주에서 바람을 견디는 건

생의 절반을 견디는 것이다

 

계절에 따라 부는 방향에 다라

지역에 따라

바람이 불리는 이름은

50여 가지가 될 듯한데

 

바다에서 불어오건

산에서 불어오건

 

밤에는 육지에서 바다로 육풍이

낮에는 바다에서 육지로 해풍이

그 속에 잠겨서 휘청거린다

 

바람의 신이라 불리는 영등할망이 드는 꽃샘추위부터

다음해 영등할망이 들 때까지

귤나무는 맨몸으로 바람을 받아낸다

 

밭과 밭 사이 경계에

바람막이 방풍수를심어

방풍수 높이에 10배까지 바람을 막아준다

 

그럼에도 방풍수는 독이 든 성배

너무 자라면 햇볕이 차단되어 품질이 떨어지고

병충해도 많으니

5미터 정도가 적당한 높이

 

적당은 너무 어려워

그대와 나 사이 거리

적당을 몰라 이렇게 두어 걸음 더 멀찍한

너무 높게 자라난 방풍수

 

『귤밭을 건너온 사계』2020년 시인동네

 

 


 

 

강영란 시인 /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강물이 뒤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상처는 아물기도 하고 잊히기도 하지만

흉터는 내 몸의 성좌

무덤까지 간다

그러니 나는 상처보다 흉터를 사랑한다

 

가시연이 베어져 열리면 꽃이 되듯

칼에 베인 손 피가 꽃이 되는 순간

내 몸의 저의 생을 기록하는 일에 몰두한

칼의 바깥

 

잘못 든 길은 상처이거나 흉터를 남긴다

애초에 너는 나의 사랑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지나갈 너와 다가오는 너 사이에 있는

상처이거나 흉터는

아프고 있거나 아팠었거나의 문제이다

 

『시인동네』 5월호, 2017,

 

 


 

 

강영란 시인 / 접목갱신

 

 

날을 받아놓고

나무 몸뚱이 잘라내고 새로운 품종을 만들어놓는다

 

아버지가 심으신 귤나무였다

저 나무에 열매가 달리면서 같이 살자던 아버지였다

 

나는 눈물 슴벅한 채 주황을 그리워했다

 

아버지의 주황

나의 주황

 

나는 지금도 새로운 주황을 꿈꾸는데

아버지의 주황은 어디로 갔는가

 

접목을 할까 고민하는 동생에게서

그날의 아버지를 본다

 

 


 

 

강영란 시인 / 푸른 별 아래 이는 푸른곰팡이

 

 

꽃은 나무속에 들었고

돌은 흙속에 들었네

이제 거처에 들었으니

그렇게 가만히 나두는 건 정말 중요한 일

 

깊숙해서 안온한 창고 속 저장의 시간

스스로 농밀해지다

노란 숨 한번 크게 내쉬고

 

열어놓은 창문 밖으로 푸른 별이 뜨네

 

너를 세워두고 돌아온 시간들

숨이 따뜻했던 너를 기억하는 일

이렇게 아파서 푸른 곰팡이가 피네

하나의 기억에 하나의 곰팡이

고요, 고요 번져서 저장의 시간이 자꾸 썩어가네

 

생의 먼 데서 먼 데까지

미안함이 오래되었다는 고백

 

푸른 별 아래 이는 푸른 곰팡이

 

-<귤밭을 건너온 사계>,시인동네, 2020.

 

 


 

강영란 시인

1998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 2010년 《열린시학》  봄호 신인상 등단. 시집 『소가 혀로 풀을 감아 올릴 때』 『염소가 반 뜯어 먹고 내가 반 뜯어 먹고』. 산문집 『귤밭을 건너 온 사계』. 제5회 서귀포문학상, 제1회 제주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