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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황규관 시인 / 싸움의 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황규관 시인 / 싸움의 끝

황규관 시인 / 싸움의 끝

 

 

내게 싸움 중의 싸움이라면

하굣길 동네 여자애들 괴롭힌다고, 아랫마을 형에게

겁 없이 대든 일이다

구석에 몰려 되게 맞았고, 나는 그를

한 대도 때리지 못한 채 코피를 흘리며

동네 뒷산을 혼자 넘어와서

강줄기를 바라봤었다

지금도 싸움을 멈추지 못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소한 싸움 하나 제대로 못하는 게 맞다

모든 일에 이해관계가 생기고

힘의 우열을 남몰래 재보게 되고

하물며 아내하고 싸울 때도

작은 방에 처박혀 책을 읽는 척하는

새끼들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이래서는 어떤 싸움도 더러워진다

전리품을 얻기 위해 싸우고

자리를 바꿔 앉기 위해 싸우고

싸움 이후를 먼저 생각하며 싸우는 일은

그래서 역겨운 것이다

기쁨도 설움도 내 것으로 하는 싸움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정말 싸움을 끝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이제는 싸움 자체가 두려워졌다 싸움 이후에

열세 살 적 강물이 보이지 않는다

 

 


 

 

황규관 시인 / 겨울강

 

 

바다에 가까이 와서야 허락된 게.....

바람에 몸을 맡긴 영혼이라니

믿을 수 없는 건

차라리 버리지 못한 내 신념이다

새떼들 상류 쪽으로 까마득히 날아가고

강안은 또 부서지느라 포클레인과

덤프트럭을 허락하고 말았지만

흐름을 멈춘 듯한 세상에도

견딜 수 없는 심연은 있는 것,

나는 눈앞의 격량을 너무 오래 바라며 살았다

그러나 겨울 강은 바다에 가까울수록

침묵 쪽으로 길을 잡는다

그 위로 많이 가난해진 저녁놀이

먹먹하게 내려앉고, 드디어 압전!

그러므로 사랑을 잃은 노래여

기억이 아득해져버린 겨울 강에서

뜨거운 숨을 쉬어라

어제보다 깊은 수심(水深)을 가져라

겨울강은 모든 목적을 버리고

경계없는 바다가 되어가고 있다

 

 


 

 

황규관 시인 / 새로움이 우리를 가두었다

 

 

새로움이, 새로움이

우리를 가두었다

 

촛불이 우리를 가두었다

미래가 우리를 가두었다

언어는

파도의 끝자락을 모르는 모래가 되었고

 

당신의 긴 머릿단은

내 뺨을 떠나

광고판 안에서 혼자 출렁이고 있다

사막처럼 웃고만 있다

 

노래가 우리를

폴리스라인 안으로 몰아내었다

우리의 질주를

우리의 광기를 막아버렸다

 

새로움이

평화가

첨단이 우리를, 피의 색깔을, 옹이 닮은 눈빛을, 하현 같은 손가락을

가두어버렸다

우리 안에 우리를 가두어버렸다

 

꽃잎으로부터

강기슭으로부터

황야로보터

폭풍우로부터

 

개기일식으로부터

 

 


 

 

황규관 시인 / 예감

 

 

이제 사랑의 노래는

재개발지역 허름한 주점에서 부를 것이다

가난한 평화는 한 블록씩 깨어지고 있다

그 아픔의 마른 냄새를 맡으며

잃어버린 대지를 찾지 않겠다

모든 밥벌이가 단기계약이듯

사랑도 이제 막바지다

새끼들 칭얼거림을 다 듣고

아내의 지친 한숨도 내 것으로 한 다음에야 노래는

터져나올 것이다.

깨어진 기억은 길가에 치워져 있다

천장이 한없이 낮아

일찍 취하는 주점에서

마시고 내린 빈 잔을 가슴에 가득 담을 것이다

사랑은 막바지고

외로움도 좋다

백척간두가 내 힘이다

그러나 다시 노래는 울고 말 것이다

끝내 오고야 말 폐허까지

폐허의, 폐허의 아침까지

 

 


 

 

황규관 시인 / 자전거

 

 

아파트 복도에 자전거가 기대 서 있다

큰애가 내리자 작은애가 한때 즐겁게 달렸던 낡은 자전거

중학교 삼년, 자전거만 타면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주 체인이 벗겨지고 벨은 망가졌어도

달리는 일 장딴지의 힘을 더 키우고 싶었던 게

가슴에서 요동치는 멍 때문이었음을

훗날 멈추고 나서 알았다

자전거는 무엇을 태우는 일에 골몰하느라

아예 먼지덩어리가 됐을까

귓바퀴에 씽씽 바람 불도록 달리다보면

닿는 곳은 자갈투성이 학교 진입로였다

내지 못한 수업료에 자전거는 절룩거리는데

나는 아이들이 버린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내 장딴지는 자라서

나는 아이들이 버린 자전거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세상에 대한 미움으로 내 장딴지는 자라서

나는 정말 자전거가 되었다

바람에 몸부림치는 느티나무 아래를 지나

바퀴가 타도록 달리는 자전거

다시 달리는 꿈을 꾸는 버려진 자전거

 

 


 

 

황규관 시인 / 탄생

 

 

강물 앞에 서면 물결이 되고

숲에 들면 나무가 되는 순간이 있다

 

어깨를 들썩이며

모든 시간이 울먹이고 꽃잎이

바람이 되는

어찌할 수 없는 노래가 있다

 

멍든 가슴이 깨질 때 목마른

짐승이 밖으로 뛰쳐나와 들판을 달릴 때

언어가 조각나는

여리디여린 몸뚱이가 있다

 

절정은 사막인데

사막이 피안이 되는 순간이 있다

 

싸움과 변명과

누적된 신음이 켜질 때

사랑과 믿음과 고독에

모두를 맡길 때

미지의 심연이 반짝이는

찰나가 있다

 

어두운 물질에

웃음이 번지는 기적이 있다.

 

 


 

 

황규관 시인 / 아름다운 꽃밭

-강정마을

 

 

가장 거대한 언어가 침묵이듯

가장 깊은 노래는,

구럼비 바위를 쉬지 않고 흔드는

바다의 영원한 혼잣말이네

그 의미 없는 몸짓 속에서

붉은발말똥게는 입술에 파도를 물고

따개비는 마을의 불빛을 켠다네

바람은 오름을 돌아 구름이 된다네

우리가 심해에서 엉금엉금 기어나와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

대지가 펄떡이고 원통한 죽임을 당하고

그러나 물질을 멈추지 않는 동안

수평선은 언제나 격랑이었네

맑은 슬픔이 지상의 모든 소음을 지우고

끝내 출렁이는 바다가 된다는 믿음을

오직 저 구럼비 바위가 증명하듯

오늘도 바다는 뜻 모를 혼잣말이네

아물지 않은 아픔에 부는 숨결이네

그걸 들을 수 있는 영혼들만이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네

아픔을 넘어 피는 물결이 된다네

 

 


 

황규관 시인

1968년 전북 전주 출생. 출판인. <삶이 보이는 창>의 대표. 1993년 「지리산에서」 외 9편으로 전태일 문학상 당선하며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철산동 우체국』 『물은 제 길을 간다』 『패배는 나의 힘』 『태풍을 기다리는 시간』 『정오가 온다』 『이번 차는 그냥 보내자』 『호랑나비』. 2020년 제22회 백석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