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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배홍배 시인 / 그리운 이름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배홍배 시인 / 그리운 이름

배홍배 시인 / 그리운 이름

 

 

흔들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저장된 이름 하나를 지운다

내 사소한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일격에 넘어뜨리는 가로등,

일어나지마라

쓰러진 몸뚱이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너의 아픔마저 익사 할 때

그리하여

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

너의 무덤속일 때

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

그러나 잊지 마라

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

 

 


 

 

배홍배 시인 / 경전선

 

늙은 의사가 힐책하듯 흉부 사진을 내걸었다

검은 골짜기마다 달이 뜬 흔적

달이 지면 깜깜한 골짜기는 훤히 보일 것이고

달빛이 내다 버린 몇 년이 거기 얼룩졌을 것이고

얼룩 아래는 남은 몇 년이 더 텅 비었을 것이니

그림자로 기척 없이 진찰실을 나왔다

더 이상 낯설지 않게 풀풀 걸음은 날려서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나는

살아서 바람이었을까

의사의 처방처럼 알 수 없는 시간표 안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호, 그땐

열차에서 왜 상한 눈물 냄새가 났을까

채 마르기도 전에 남겨진 것은 얼룩진 세월과

텅 빈 시간의 틈새,

아득히 비둘기 떼 나부끼는 온몸

그리운 하루일 때

가슴까지 흘러온 것은 다시 만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만큼의 깊숙한 달빛에

퉁퉁 불은 몸뚱이를 여러 겹 벗겨내어

그곳에 아직 나는 연서를 쓰고 있었다

두근두근, 흰 알약 같은 달이 유혹하는 것 같아서

 

- 시집 『바람의 빛깔』에서

 

 


 

 

배홍배 시인 / 피아골 가는 길

 

 

꽃비 내리는 이 길을 누가

걸어 가셨나

 

그 옛날 지리산 빨치산과

그들을 쫓아간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들이 손잡고 가셨나

 

터지는 총소리를 서로

받아먹고

탕탕 꽃송이들을 터뜨렸나

 

한 걸음 다가서면

산새가 운다

길 너머 꽃잎들 진다고

 

꽃그늘 밖으로 비켜서서 운다

 

 


 

 

배홍배 시인 / 봄날 일기2

 

 

좀처럼 꽃은 피지 않았다

 

까맣게 탄 날들이 쏟아진 달력에 어머니는

삭망월을 그려 넣고 일요일마다

붉은 하혈을 했다 그리곤 피의 색깔로

앞날을 점쳤다

 

내일을 믿는 그녀에게 운명은

사람 인人자의 정점에서 피운 꽃 한 송이,

 

함부로 바람은 어린 앵두나무를 범하고

반성도 없이 가지 끝엔 무채색의 해가 열렸다

 

표류하는 무역풍에서 며칠이 더 뿌려지고

마른 연못에 고이는 누런 구름,

구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눈에서

벽안碧眼의 눈동자가 여물었다

 

다시 태양은 작열할 것인지

 

햇빛을 대지에 구겨 넣어 어느 때

황무지에 꽃 한 송이 피워 낼 것인지

어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달밤이었다

 

분노인 듯 오래 된 앵두나무는

뒤틀린 달빛 가지를 벋고

꽃의 거대한 뿌리인 산은

우리 집 커다란 장독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배홍배 시인 / 아버지의 마당

 

 

아버지의 의식이 빠져나간 우리 집

마당에서 어머니의 지평선과

젊은 태양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만든 연못에선

의심으로 가득 찬 안개가 피어오르고

꽃밭의 해바라기는 태양을 머리로 받았다

 

깨어진 햇빛은 금 간 담 벽

벽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내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불신의 조상들에 갇혀

상처를 꿰매는 밤은

바람이 불어도 연못은 고요했다

 

어머니의 검은 보자기 작은 꽃무늬는

내 평생의 흉터로 남아

가난한 밥상을 덮고

 

어머니의 은어를 기억해내며

향수를 하나씩 잊어갈 때

사진 속 아버지의 집시 배낭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어머니와 태양은 더 이상 맞서지 않았다

 

 


 

배홍배 시인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 월간 《현대시》로 등단. 시집 『혼자 가고 싶은 곳』 『단단한 새』 『바람의 색깔』 『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 『추억으로 가는 간이역』 등. 번역 프리랜서. 오디오 평론가. 사진작가로 활동. 부천 오정초등학교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