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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홍배 시인 / 그리운 이름
흔들리는 야간 버스 안에서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저장된 이름 하나를 지운다 내 사소한 사랑은 그렇게 끝났다 더듬거리며 차에서 내리는 나를 일격에 넘어뜨리는 가로등, 일어나지마라 쓰러진 몸뚱이에서 어둠이 흘러나와 너의 아픔마저 익사 할 때 그리하여 도시의 휘황한 불빛 안이 너의 무덤속일 때 싸늘한 묘비로 일어서라 그러나 잊지 마라 묘비명으로 새길 그리운 이름은
배홍배 시인 / 경전선
늙은 의사가 힐책하듯 흉부 사진을 내걸었다 검은 골짜기마다 달이 뜬 흔적 달이 지면 깜깜한 골짜기는 훤히 보일 것이고 달빛이 내다 버린 몇 년이 거기 얼룩졌을 것이고 얼룩 아래는 남은 몇 년이 더 텅 비었을 것이니 그림자로 기척 없이 진찰실을 나왔다 더 이상 낯설지 않게 풀풀 걸음은 날려서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나는 살아서 바람이었을까 의사의 처방처럼 알 수 없는 시간표 안에서 날아오르는 비둘기호, 그땐 열차에서 왜 상한 눈물 냄새가 났을까 채 마르기도 전에 남겨진 것은 얼룩진 세월과 텅 빈 시간의 틈새, 아득히 비둘기 떼 나부끼는 온몸 그리운 하루일 때 가슴까지 흘러온 것은 다시 만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만큼의 깊숙한 달빛에 퉁퉁 불은 몸뚱이를 여러 겹 벗겨내어 그곳에 아직 나는 연서를 쓰고 있었다 두근두근, 흰 알약 같은 달이 유혹하는 것 같아서
- 시집 『바람의 빛깔』에서
배홍배 시인 / 피아골 가는 길
꽃비 내리는 이 길을 누가 걸어 가셨나
그 옛날 지리산 빨치산과 그들을 쫓아간 우리의 아버지 아버지들이 손잡고 가셨나
터지는 총소리를 서로 받아먹고 탕탕 꽃송이들을 터뜨렸나
한 걸음 다가서면 산새가 운다 길 너머 꽃잎들 진다고
꽃그늘 밖으로 비켜서서 운다
배홍배 시인 / 봄날 일기2
좀처럼 꽃은 피지 않았다
까맣게 탄 날들이 쏟아진 달력에 어머니는 삭망월을 그려 넣고 일요일마다 붉은 하혈을 했다 그리곤 피의 색깔로 앞날을 점쳤다
내일을 믿는 그녀에게 운명은 사람 인人자의 정점에서 피운 꽃 한 송이,
함부로 바람은 어린 앵두나무를 범하고 반성도 없이 가지 끝엔 무채색의 해가 열렸다
표류하는 무역풍에서 며칠이 더 뿌려지고 마른 연못에 고이는 누런 구름, 구름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들의 눈에서 벽안碧眼의 눈동자가 여물었다
다시 태양은 작열할 것인지
햇빛을 대지에 구겨 넣어 어느 때 황무지에 꽃 한 송이 피워 낼 것인지 어머니의 세계는 여전히 달밤이었다
분노인 듯 오래 된 앵두나무는 뒤틀린 달빛 가지를 벋고 꽃의 거대한 뿌리인 산은 우리 집 커다란 장독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배홍배 시인 / 아버지의 마당
아버지의 의식이 빠져나간 우리 집 마당에서 어머니의 지평선과 젊은 태양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만든 연못에선 의심으로 가득 찬 안개가 피어오르고 꽃밭의 해바라기는 태양을 머리로 받았다
깨어진 햇빛은 금 간 담 벽 벽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내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불신의 조상들에 갇혀 상처를 꿰매는 밤은 바람이 불어도 연못은 고요했다
어머니의 검은 보자기 작은 꽃무늬는 내 평생의 흉터로 남아 가난한 밥상을 덮고
어머니의 은어를 기억해내며 향수를 하나씩 잊어갈 때 사진 속 아버지의 집시 배낭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어머니와 태양은 더 이상 맞서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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