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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진 시인 / 詩에 대한 예의
증정 받은 시집을 슬슬 넘기는데 눈앞이 환해진다 고운 시어가 아니라 여백의 미 때문이다 '것이다' 달랑 한 줄 풍경처럼 매달고서 온통 설원이다 그것도 피리어드 빼면 꼴란 3음절이니 아흔 아홉 칸 집에 늙은 내외가 쪼그리고 사는 꼴이다 쓸쓸한 공백이 부산한 무례를 꽉 누르고 있다 그런 가구가 한 둘 아니고 서너 집 건너 한 집 꼴이다 가벼운 변비가 있는 사람이 화장실 가서 시집을 두 권이나 독파했다는 말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항공회사 화물규정에 관을 취급하는 절차가 있다 사람의 관 위로는 다른 화물을 적재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경기호황으로 수출입 물동량이 급증할 때 몇 개의 관이 다른 화물과 동행할 참이었는데 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담당은 유권을 달리 해석했다 관은 관끼리는 포개어 실어도 무방하다 그래도 인간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이층침대도 있지 않느냐고 고인도 고비용저효율을 마냥 눈감아 주지는 않을 것이라고
-시집 <낙법>에서
권순진 시인 / 갱생(更生)
내 친구 K는 하산주 큰 사발 한 잔에 면허정지를 당했다 관음백일기도의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영판 딴사람 되어 대중적으로 살기로 작정한 것이다 젊은이들처럼 장난감 삼아 스마트폰으로 기종변경하려다가 에라 모르겠다 돋보기와 함께 책을 몇 권 샀다 시집도 한 권 끼어 있었다 용맹정진 80일째, 전에 느끼지 못했던 짜릿한 전율을 수시로 느꼈다 느끼는 자의 행복이란 이런 건가 싶었다 하늘을 자주 쳐다보았으며 몸을 스치는 바람도 살갑다 산에서는 초록이 더 선명하고 눈부시다 80일 전 속이 히뜩 다 뒤집어졌던 자신을 돌아보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동안 내다버린 이산화탄소를 생각하면 저 흰 구름에게도 미안한 생각이 든다 감면교육을 받으러 가지도 않았다 아예 면허를 반납했어도 나쁘지 않을 뻔 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교화는 제대로 되어가는 듯싶었다
권순진 시인 /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술
세상에서 가장 맛 나는 술은 로얄살루트50년산 위스키도 샤또 페트리우스 특등급 와인도 그렇다고 무조건 하산 길 막걸리 한 사발이나 갸우뚱하다보면 나오게 되어 있는 입술 배시시 웃음 짓는 유두주 치사한 공술 따위는 더더욱 아닌 좋은 술친구와 함께 마시는 술 청탁 안주 장소 불문 진실로 맛 좋은 술
좋은 술친구란 이야기 안주의 경계와 문턱이 없는 마른명태처럼 쫙쫙 찢어지는 정치판 육담 넘나들다 가족사에 짐짓 진지한 척 귀기울이다말고 문학 동네와 예술판을 휘저어 다니다가 데카르트와 앨빈 토플러를 넘보아도 도무지 어색하지 않은 아무 말이나 섞어 지껄여도 격이 떨어지지 않는
이를테면 광화문 뒷골목 대폿집에서 양반 탈 웃음을 달고 다니는 허홍구 시인과 마시는 참이슬 같은 술
권순진 시인 / 과장법
회비 오만 원이 내 분수에 넘치고 부담 되어 갈까 말까 딸막딸막했던 연말모임에 최대한 본전 뽑으려 점심까지 거른 채 굳센 결심으로 참석했다 7년 만에 만난 친구가 얼굴 좋으네, 잘 지내지? 하는 일은 잘 되고? 안부를 묻는다 그는 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하지 않는 일이 무언지 일을 하는 대신 무슨 뚱딴지를 껴안고 사는지 알지 못한다 놀고먹는지 먹고 노는지 개밥통에 밥을 말아 먹는지 알 턱이 없다 응, 밥은 먹고 산다네 나는 진실로 거짓 없이 정중하게 대답했다 ‘겨우’란 수식어를 넣어 말하려다가 순간 거지같아서 관뒀다 요즘 경기 우리 나이에 그만하면 잘 나가는 거지, 그래, 어떤 사업이야? 나중에 한잔 사라! 밥은 먹고 산다는데 잘 나가는 건 뭐고 한잔 하자도 아니고 사라는 말은 무슨 개뼈다귀 같은 수작인가 밥은 먹고 산다는 말이 결국 터무니없는 과장법이 된 셈이란 말인가 분식회계로 장부조작이나 한 피의자처럼 낯이 뜨거웠다 2차 노래방에 가서 딱 한 곡 목청껏 ‘내 사랑 내 곁에’를 뽑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 바뀌면 끊기로 마음을 묶은 담배의 남은 마지막 한 개비에 불을 붙여 몇 모금 힘껏 빨았다 어둠 속 가물가물한 담뱃불의 소실점이 손가락 끝에 걸렸다
권순진 시인 / 어느 젊은이의 죽음
둘째가 친구의 뼛가루를 수성못에 뿌리고 왔다. 강에 뿌리려다 생각날 때 찾기 쉽게 몰래 시내 가까운 유원지 못에다 뿌렸단다. 그 친구는 막 만 열여덟을 넘긴 어정쩡한 미성년이었다. 열둘에 갈라 선 부모가 둘 다 아이 맡기를 기피해 외할머니 밑에 자랐으나 속속 들이 세포가 망가지면서 그 지경이 되었단다. 외삼촌이 입원을 시켜서 어찌 손을 써보려 했다지만 이미 많이 늦어버렸단다. 죽어 재가 된 뒤에야 그 녀석의 어미가 달려와 내가 죽일 년이다 울부짖었 단다. 아이의 친구들은 누구하나 따라 울지 않았다고 한다. 그 애비는 재를 물가에 흘려보내려할 쯤에야 나타나 돈 이십만 원을 건 넸으나 친구들은 그 돈을 기어이 받지 않았단다.
난 둘째의 얘기가 처음엔 그 흔한 신문의 사건 사고 한줄기사의 낭독인줄 알았다. 어른들에 대한 적개심이 잡초처럼 마구 자랄지 모른다는 막연한 염려는 했지만 어쩌면 그 나이에 그런 비열한 충격의 경험은 인생살이 전체로 볼 때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빌어 먹을 통빡을 굴렸다. 하지만 죽은 애 아비와 별로 다를 게 없는 처지에 이내 몸을 진저리 쳤다. 내 아들의 죽은 친구여! 내 자식이 너의 죽음 앞뒤로 슬퍼하고 괴로워한 만큼 나는 그 십분의 일도 애도 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다오. 오히려 배면에서 내 자식의 멀쩡함을 안도했고 정신적 성장의 밑거름이나 되는 양 멋대로 변용하여 자위했던 것을 용서해 다오.
허구한 날 천부당만부당 억울하게 죽어가는 어린 생명들을 보고 내 비로소 고개 숙여 서러워하며 분노하노니 부디 사랑과 평화 가득한 곳에서 잠들다 좋은 옷 다시 얻어 입고 다른 세상으로 오기 를......
-시집 『낙법』 (문학공원,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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