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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희 시인 / 어쩌자고 제비꽃
비바람 치는 함덕 바닷가 덮쳐오는 시퍼런 파도에 잇대어 있었네 현무암 낮은 돌담으로 방풍을 친 무덤들 틈새에 있었네 내 곱은 손에 뜨거운 카푸치노 한 잔을 건네준 까페 올레는 사람이 그리운 어린 딸과 흰 털 강아지 레이스 앞치마의 아낙 머리채 나꿔채고 옷깃 파 헤집는 광란의 바람 속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며 죽은 자들의 마을 고샅 겨우겨우 차를 돌려 나왔네 어느 날 길길이 뒤집힌 저 바다가 난파시킨 애처롭고 위태했던 생애들은, 사지 접힌 저 사람들은 누구누구들이었나 늦은 겨울 비바람 포효하는 함덕 바닷가 검은 유택들 비집고 어쩌자고 제비꽃 저 한 포기
안영희 시인 / 그가 운다
밤이면 그가 운다 끄억끄억 신음하며 그가 울기 전까지는 뵈지도 않았던 저 아래 어디쯤에서
삶 혹은 운명이 목구멍을 베며 너무 자주 삼켜지지 않아서 걸었다, 걸 었 다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번번이 내 안에서 아우성치던 불의 머리채 잡할 때가지
가혹하게도 혹사 당해온 서러운 이력을 지고 운다 늦은 밤이면 그가 운다
튀어나오고 구부정히 휘몰린 몰골이 되어 운다 내 몸의 지도 가장 먼 데서 내 몸의 섬 노예, 발이 운다
안영희 시인 / 눈 멀고 귀 먹어도
북창만 조금 열어두고 향불 홀로 타던 겨울 한밤의 제삿상은 몸 없이 와서 냄새로 들고 가신다고 했다
설날 아침 무럭무럭 김나는 떡국 냄비 채 들고 와서 아랫마당 벗나무 아래 어머니께 퍼 드린다 이 별의 천지간이 음식냄새로 가득할 때 새끼들의 냄새 좇아 왔다 가실 것이므로
눈 멀고 귀 먹었던 울 강아지도 그랬다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다리로도 어김없이 찾아갔다 안고, 안고 비벼대는, 겨우 월말에야 하루 오는 구석진 딸의 방을
안영희 시인 / 생물선생님
매일 걸었어요, 어린 강아질 데리고 시계너머까지 전망이 열린 유휴지 둘레 길을 포플러 아름드리 나무들을 따라서
그곳에다 밭을 일구는 신축아파트 주민들 중 내게 가끔은 푸성귀를 뜯어가도 좋다고 허락한 사람은 생물선생 출신이라 했어요
그러나 이내 대형마트 신축을 위해 그 땅은 갈아엎어지고 어느 새벽녘 누가 물감통 잘못 엎지르고 간 듯 야산 입구 쓰레기 뒹글던 땅뙈기 한쪽이 돌연 초록으로 부풀어 있었어요 그곳에 박혀있는 희끗해진 뒤통수 하나도 보았어요 아하 그러면 그렇지, 고갤 끄덕이며 스친 이후 앗긴 산책길을 찾아 매일 마을의 바깥까지 이슬을 젖히는 들짐승이 된 나는
돌연 호되게 소리치고 선 젊은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를 향해 경사의 맹지언덕을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머리칼이 하얗게 센 한 사람을 보았어요
딱 걸린 현장범인 양 단 한 마디 항변도 못하는 생물선생을 보았어요, 그 손에 들려있는 한 자루 호미가 내 목울대를 뜨겁게 했어요
안영희 시인 / 나도 봄밤의 임부였다 _금간 항아리
봄날은 벌이어라 이쯤해서 제발 주저앉고 싶어라
매 순간 버석대는 참혹한 목마름 날마다 서서 그득그득 품어 부 푼, 그래도 멈추지 않고 더 담아 쟁인 무게로 나는 망가지고
벌어지는 틈새로 제일 먼저 희망이란 이름이 빠져 나갔다
환장할, 또다시 쏘아오는 꽃향내, 잉잉대며 나는 벌 나비 떼
잊혀진 목숨이 서러워라 부르면 메아리쳐 오는 이 휑한 공동.살아있음의 갈증, 욕스러워라
나도 어느 땐 흙이었었었나, 보드랍게 연 속살 안에 씨앗을 품고 설레며 잠 못 이룬 나도 봄밤의 임부였었나
끝내다오, 그만 욕된 이 목숨을 그만 부숴다오!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 했다-에서
안영희 시인 / 친구
그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흐윽, 돌연 울음을 터트리네 수화기 저쪽에서 넥타이 100개를 풀어놓고 제 집을 두고 나간 사람의 안부를 번번이 물어오는 그에게 느껴왔던 부담감이 일시에 찌잉~ 통증으로 붉게 번져드네 그 친구가 요 공부를 잘 했어요... 그 친구의 도시락 반찬이 하앙상 인기였어요 하하 그러고 보니 그들의 푸른 시절을 고삐 풀려 엮어가는 그 사람 말소리 끝부분도 잘 여며지지 않았네
그들의 언덕이 허, 물어 지고 있었네
안영희 시인 / 별 2
닫힌 江門의 물은 둑을 치고 범람하고
씨앗 몇 알을 위해 한 해 여름이 하늘로 오른 초록의 저 사닥다리 나팔꽃 덩굴은 죽는다
밤 깊어 젖어버린 내 영혼의 자리 더듬어 앉는 저 눈빛들은
누구의 가슴 치며 울던 티끌같은 불씨인가
안영희 시인 / 저녁 기차
가까스로 서울행 기차에 올라 유리창 무심코 바라보다가 헉 소스라치네 커다랗고 짙붉은 서녘 해에
종일토록 경작했던 하루가 맥 없이 스러져가는 먼 수수밭이네
저문 江이 한사코 기차를 따라오지만 어두워지는 저 강물빛, 저 강의 얼굴이이제는 슬프지 않네, 저 강물을 만나며 내가 울었던 건 …사 람 때 문 이었네
그러나 이 저녁 어둠 밀물 쳐 든 막막허공에 동, 동 동동… 이승인 듯 저승인 듯 따라오는둥근 저 등불은 다정하지 못한 운명, 축복의 등 비출 일 없는 남은 내 길을 위로하고 싶은
그 사람인가 부고도 없이 죽은 그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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