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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영희 시인 / 어쩌자고 제비꽃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4.
안영희 시인 / 어쩌자고 제비꽃

안영희 시인 / 어쩌자고 제비꽃

 

비바람 치는

함덕 바닷가 덮쳐오는 시퍼런 파도에

잇대어 있었네

현무암 낮은 돌담으로 방풍을 친

무덤들 틈새에 있었네

내 곱은 손에 뜨거운 카푸치노 한 잔을 건네준

까페 올레는

사람이 그리운 어린 딸과 흰 털 강아지

레이스 앞치마의 아낙

머리채 나꿔채고 옷깃 파 헤집는

광란의 바람 속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며

죽은 자들의 마을 고샅 겨우겨우

차를 돌려 나왔네

어느 날 길길이 뒤집힌 저 바다가 난파시킨

애처롭고 위태했던 생애들은, 사지 접힌

저 사람들은 누구누구들이었나

늦은 겨울 비바람 포효하는 함덕 바닷가

검은 유택들 비집고

어쩌자고 제비꽃 저 한 포기

 

 


 

 

안영희 시인 / 그가 운다

 

 

밤이면 그가 운다

끄억끄억 신음하며 그가 울기 전까지는

뵈지도 않았던 저 아래 어디쯤에서

 

삶 혹은 운명이 목구멍을 베며

너무 자주 삼켜지지 않아서 걸었다, 걸 었 다

그것 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으므로

번번이 내 안에서 아우성치던 불의 머리채 잡할 때가지

 

가혹하게도 혹사 당해온 서러운 이력을 지고 운다

늦은 밤이면 그가 운다

 

튀어나오고 구부정히 휘몰린 몰골이 되어

운다

내 몸의 지도 가장 먼 데서 내 몸의 섬 노예,

발이 운다

 

 


 

 

안영희 시인 / 눈 멀고 귀 먹어도

 

 

북창만 조금 열어두고 향불 홀로 타던

겨울 한밤의 제삿상은

몸 없이 와서 냄새로 들고 가신다고 했다

 

설날 아침

무럭무럭 김나는 떡국 냄비 채 들고 와서

아랫마당 벗나무 아래

어머니께 퍼 드린다

이 별의 천지간이 음식냄새로 가득할 때

새끼들의 냄새 좇아 왔다 가실 것이므로

 

눈 멀고 귀 먹었던 울 강아지도 그랬다

제대로 세우지 못하는 다리로도 어김없이 찾아갔다

안고, 안고 비벼대는, 겨우 월말에야 하루 오는

구석진 딸의 방을

 

 


 

 

안영희 시인 / 생물선생님

 

 

매일 걸었어요, 어린 강아질 데리고

시계너머까지 전망이 열린 유휴지 둘레 길을

포플러 아름드리 나무들을 따라서

 

그곳에다 밭을 일구는 신축아파트 주민들 중

내게 가끔은 푸성귀를 뜯어가도 좋다고 허락한 사람은

생물선생 출신이라 했어요

 

그러나 이내 대형마트 신축을 위해

그 땅은 갈아엎어지고

어느 새벽녘 누가 물감통 잘못 엎지르고 간 듯

야산 입구 쓰레기 뒹글던 땅뙈기 한쪽이 돌연

초록으로 부풀어 있었어요 그곳에 박혀있는 희끗해진 뒤통수

하나도 보았어요

아하 그러면 그렇지, 고갤 끄덕이며 스친 이후

앗긴 산책길을 찾아 매일 마을의 바깥까지 이슬을 젖히는

들짐승이 된 나는

 

돌연 호되게 소리치고 선 젊은 한 남자를 보았어요

그를 향해 경사의 맹지언덕을 미끄러지며 내려오는

머리칼이 하얗게 센 한 사람을 보았어요

 

딱 걸린 현장범인 양 단 한 마디 항변도 못하는

생물선생을 보았어요, 그 손에 들려있는 한 자루 호미가

내 목울대를 뜨겁게 했어요

 

 


 

 

안영희 시인 / 나도 봄밤의 임부였다

_금간 항아리

 

 

봄날은 벌이어라

이쯤해서 제발 주저앉고 싶어라

 

매 순간 버석대는 참혹한 목마름

날마다 서서 그득그득 품어

부 푼,

그래도 멈추지 않고 더 담아 쟁인 무게로

나는 망가지고

 

벌어지는 틈새로 제일 먼저

희망이란 이름이 빠져 나갔다

 

환장할, 또다시 쏘아오는 꽃향내, 잉잉대며 나는 벌 나비 떼

 

잊혀진 목숨이 서러워라

부르면 메아리쳐 오는 이 휑한 공동.살아있음의 갈증, 욕스러워라

 

나도 어느 땐 흙이었었었나,

보드랍게 연 속살 안에 씨앗을 품고 설레며 잠 못 이룬

나도 봄밤의 임부였었나

 

끝내다오, 그만

욕된 이 목숨을 그만 부숴다오!

 

-시집 <목숨 건 사랑이 불시착 했다-에서

 

 


 

 

안영희 시인 / 친구

 

 

그만 전화를 끊으려는데

흐윽,

돌연 울음을 터트리네 수화기 저쪽에서

넥타이 100개를 풀어놓고

제 집을 두고 나간 사람의 안부를

번번이 물어오는 그에게 느껴왔던 부담감이

일시에 찌잉~ 통증으로 붉게 번져드네

그 친구가 요 공부를 잘 했어요...

그 친구의 도시락 반찬이 하앙상 인기였어요 하하

그러고 보니 그들의 푸른 시절을 고삐 풀려 엮어가는

그 사람 말소리 끝부분도

잘 여며지지 않았네

 

그들의 언덕이 허, 물어 지고 있었네

 

 


 

 

안영희 시인 / 별 2

 

 

닫힌 江門의 물은

둑을 치고 범람하고

 

씨앗 몇 알을 위해

한 해 여름이 하늘로 오른

초록의 저 사닥다리

나팔꽃 덩굴은 죽는다

 

밤 깊어

젖어버린 내 영혼의 자리

더듬어 앉는 저 눈빛들은

 

누구의 가슴 치며 울던

티끌같은 불씨인가

 

 


 

 

안영희 시인 / 저녁 기차

 

 

가까스로 서울행 기차에 올라

유리창 무심코 바라보다가 헉 소스라치네

커다랗고 짙붉은 서녘 해에

 

종일토록 경작했던 하루가

맥 없이 스러져가는 먼 수수밭이네

 

저문 江이 한사코 기차를 따라오지만

어두워지는 저 강물빛, 저 강의 얼굴이이제는 슬프지 않네,

저 강물을 만나며 내가 울었던 건

…사 람 때 문 이었네

 

그러나 이 저녁 어둠 밀물 쳐 든 막막허공에

동, 동 동동… 이승인 듯 저승인 듯 따라오는둥근 저 등불은

다정하지 못한 운명, 축복의 등 비출 일 없는

남은 내 길을 위로하고 싶은

 

그 사람인가

부고도 없이 죽은 그 사람인가

 

 


 

안영희(安榮姬) 시인

光州에서 출생. 1990년 시집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로 등단. 시집 『내 마음의 습지』 『가끔은 문 밖에서 바라볼 일이다』 『물빛창』 『그늘을 사는 법』 『어쩌자고 제비꽃』 등. 『흙과 불로 빚은 詩』- 도예개인전(경인미술관)이 있음. 문예바다 문학상 수상. 현재 계간《문예바다》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