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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영근 시인 / 여름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3.
박영근 시인 / 여름비

박영근 시인 / 여름비

 

 

장독 뚜껑에

고여 있는 빗방울

 

맨드라미

붉은 꽃벼슬에도 빗방울

 

줄행랑을 놓던 고양이란 놈

뿔뿔뿔 다 늙은

감나무 가지에 기어 올라

 

늘어지게 하품 하는데

검둥개는 낑낑거리며

나무 밑을 맴돌고

 

낙숫물 떨어지는 처마밑엔

길 잃은 두꺼비 한 마리

 

언젯적 하늘인가

무지개가 활짝 선다.

 

 


 

 

박영근 시인 / 돌부처

 

 

저렇게 오래

돌아앉은 돌부처는 말이 없다

 

골짜기 저 밑바닥에서 안개는 올라와

지난날의 전나무와 갈참마누 숲을 지우고

어두워가는 살 깊은 곳으로

바위 가파로운 산줄기를 문득 밀어버린다

 

어느 때쯤 돌부처마저 보이지 않고

 

알 수 없구나

다만 맨몸인 내가

사방 허공에

뼈마디까지 적나라한데

 

어디선가 희미하게 물소리 들리고

바람에 불려가는 안개

뜨거운 이마에 맺히는 시간의 물방울들

내 안에서 수천수만 햇살의 숨구멍들이 한꺼번에 열린다

 

돌부처 하나 바위절벽 속에 제 몸을 새기고 앉아

빙그레 웃고 있다.

 

 


 

 

박영근 시인 / 취업 공고판 앞에서

 

 

除隊를 하고, 세월도 믿음도 무심히 멱살을 잡고 흔들던 스물다섯 계급장을 떼고도

나는 갈 곳이 없었다.

바람 불면 허수아비 제 가슴을 치는 가을 저녁답, 어머니 또 우시고

 

높은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잘 다려진 작업복을 끌고 어쩌다

계집아이들이 크래카를 씹으며 지나갔다 가로수 가지마다 매달려 떨고 있는 하나, 둘

눈물방울 같은 잎새들 이른 아침 누이의 세수대야엔 붉은 피가 자꾸만 번졌다

발 밑에서 으깨지는 비명소리 나뭇잎들

들판이나 한번 둘러보고 가거라

갯벌이나 한 번 또 한 번 돌부리에 넘어져 어머니

검정치맛자락에 피가 흘렀다

여전히 굴뚝에서는 연기가 솟아올랐다

 

출신도 전북 본적지 서해중학교졸업

고향도 두고 사랑마저 등진 신세가 핸드카를 밀면서 울어야하나

울어야하나 부르면 고향은 조막손 아프게 찌르던 낫자욱들

잘살자 진성전자공원들아 어둡게 화장실 낙서 같은 곳에서도 얼어붙고

오줌을 갈기며 얼어붙은 아랫도리로

이름을 써 갈기며 군대삼년 몸으로 때워나가자 개새끼 처럼 웃던 날들

모집공고 위에도 눈발은 내려쳤다

 

내려앉고 싶었다 이력서도 구겨버리고 문득 공고판 아래 얼어붙는 어머니

엉겅퀴 들판도 밀어버리고

등 뒤론 움켜쥔 손 마디마디 풀며 떠오르는 눈송이들

하얗게 쌓여가는 불빛들 내려앉고 싶었다

엎드려서 감출 수 있는 것은 눈물들 뿐일까

전봇대 같은 곳에 기대여 바라보면 어느새

눈발 그친 곳에서도 불빛은 흐려지고, 누이여

흩어지고 어디로 또 떠나는 밤기차소리에도 부서지고

 

 


 

 

박영근 시인 / 서시(序詩)

 

 

가다가 가다가

울다가 일어서다가

만나는 작은 빛들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두려워 떨며 응크리다

아주 어두운 곳으로 떨어져서

피를 흘리다 절망하는 모습과

불쌍하도록 두려워 떠는 모습과

외로워서 목이 메이도록

그리운 사람을 부르며

울먹이는 모습을,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지나간 시절이 원죄처럼 목을 짓누르는

긴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을

맺히도록 분명하게 받아들이고

받아들이고 부딪치고

부딪쳐서 굳어진 것들을 흔들고

흔들어 마침내

다른 모든 생명들과 함께

흐르는 힘을

시라고 부르고 싶다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시간들 속에서

일하고 먹고 살아가는 일을

뉘우치는 시간들 속에서

때때로 스스로의 맨살을 물어뜯는

외로움 속에서 그러나

아주 겸손하게 작은 목소리로

부끄럽게 부르는 이름을

시라고 쓰고 싶다

 

 


 

 

박영근 시인 / 故鄕의 말.4

 

 

돌아오너라, 해창벌 밀물이 들어도 어둡고

돈 한푼에 팔려서 네 아우들

헛주먹 감추며 떠나고 있으니

싸락눈 내려 쌓이는 노루목

흐린 서울길 지우며 큰 바람 울 때

보리밭 외진 두렁에서

네 어미, 옷고름마다 끓는 눈물로

시퍼런 쑥물을 들이고

보듬는 하늘 캄캄히 서리서리 피 적시는

눈송이여 뜨거운 맨발로 붉은 흙 한 짐 다져지고

허기진 별빛으로 들잠 밝히며

발자욱들 시퍼렇게

돌아오너라, 봄빛 서러운 눈길 위에 네 어미

칼꽃 그려 접고 있으니

부르도져에 깎여버린 산허리 돌아

갯들을 건너

 

 


 

 

박영근 시인 / 월미산에서​

 

유리창이 깨어지고, 낡은 팻말이 떨어져 뒹구는

군대 막사들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그리고 온통 푸른 빛을 내뿜고 있는 유월의 나무숲​

월미산에 와서 나는 여전히 네이팜탄의

불길과 미군 함정의 함포사격과 옛 정보국 자리

녹슬어가는 소문들을 생각하고,

송신탑이 박혀 있는 산머리

어두운 방공호 속을 들여다본다​

거기 우리가 스스로 키운

금지된 시간들 속을 살아 저희들끼리 보듬고 있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 어떤 역사나 믿음보다

먼저 제 몸을 찾아 기우는 햇살에도

환하게 물들어가는 저 나무숲의, 얼마나 많은 바람과

햇빛과 눈비와 꽃들이 나의 기억을 지울 수 있을까​

바라보면 하인천 너머 만석동 소금기도 없이

바래어가는 오래된 공장들의 침묵과

저물기도 전에 벌써 지쳐버린 바다​

나는 산을 내려와 기름덩이 폐수와 아우성

네온싸인 불빛들을 토하고 있는 파도를 보며

좌판에서 잔술을 마신다 방파제에 부딪쳐

낮게 스러지는 물소리가

어둑하게 저물어가는 먼 데 섬들 너머

달을 띄울 때까지​

​-시집 《저 꽃이 불편하다》에서

 

 


 

 

박영근 시인 / 솔아 솔아 푸른 솔아

-百濟 6

 

 

부르네 물억새 마다 엉키던

아우의 피들 무심히 씻겨간

빈 나루터, 물이 풀려도

찢어진 무명베 곁에서 봄은 멀고

기다림은 철없이 꽃으로나 피는지

주저앉아 우는 누이들

옷고름 풀고 이름을 부르네.

 

솔아 솔아 푸른 솔아

샛바람에 떨지 마라

어널널 상사뒤

어여뒤여 상사뒤

 

부르네. 장마비 울다 가는

삼년 묵정밭 드리는 호밋날마다

아우의 얼굴 끌려 나오고

늦바람이나 머물다 갔는지

수수가 익어도 서럽던 가을, 에미야

시월비 어두운 산허리 따라

넘치는 그리움으로 강물 저어가네.

 

만나겠네. 엉겅퀴 몹쓸 땅에

살아서 가다가 가다가

허기 들면 솔닢 씹다가

쌓이는 들잠 죽창으로 찌르다가

네가 묶인 곳, 아우야

창살 아래 또 한 세상이 묶여도

가겠네, 다시

만나겠네.

 

 


 

박영근(朴永根) 시인 (1958-2006).

1958년 전북 부안 출생.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전(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기금 수혜. 대한민국 최초의 노동자 시인으로 48세에 지병으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