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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심호택 시인 / 그 아궁이의 불빛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6.
심호택 시인 / 그 아궁이의 불빛

심호택 시인 / 그 아궁이의 불빛

 

 

달아오른 알몸처럼

거룩한 노래처럼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푸른 안개자락 끌어덮은 간사짓벌

갈아엎은 논밭의 침묵 사이로

도랑물 하나 어깨를 추스르며 달아나고

기러기떼 왁자지껄 흘러갔다

목도리 칭칭 동여맨 아이들

저녁연기 오르는 집에 어서 가자고

재잘거리며 흩어진 하교길

진창에 엉긴 서릿발이

저문 달구지 바퀴에 강정처럼 부서질 때

짚검불이 숨죽이며 타오르는 부엌

불길의 혀에 가쁜 부뚜막에서는

세상 돌아가는 것 까마득히 모르는

멸치들이 시레기를 뒤집어쓰고 끓었다

토장국 냄새 맡으러

온동네 한바퀴 쏘다닌 바람

춥다 춥다 사립문을 걸고넘어질 때

너도 들어와 불 쬐고 가거라

홍시를 머금은 듯

활개치며 달아오르던

그 아궁이의 불빛이 아직 환하다

 

-시집 <하늘밥도둑>에서

 

 


 

 

심호택 시인 / 그만큼 행복한 날이

 

 

그만큼 행복한 날이

다시는 없으리

싸리 빗자루 둘러메고

살금살금 잠자리 쫓다가

얼굴이 발갛게 익어 들어오던 날

여기저기 찾아보아도

먹을 것 없던 날

 

 


 

 

심호택 시인 / 아무것도 모를 때

 

 

다랑논가에서

콩잎에 붙은 땅개비를 잡아

유리병에 담았느니라

도랑물가에서

송사리떼 들여다보며

갈잎배 만들어 띄웠느니라

달아난 참게를 기다려

저물도록 지켜 앉아 있었느니라

우리들 아무것도 모를 때

그 조그만 것들 모두 어디로 갔나

쓸 데도 없이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느니라

 

 


 

 

심호택 시인 / 똥구멍 새까만 놈

 

 

대엿 살 철부지 때

할아버지께 붓글씨 배웠지요

종이 귀할 때라 마분지에다

한일자 열십자 수월찮이 그렸지요

종이에 흰 구석 남긴 날

그분께서 꾸짖으시기를

듣거라

최생원네 손자 공부하는 법이니라

연필로 먼저 쓰고 그 위에

철필로 다시 쓰고 그 위에

또 다시 붓으로 빽빽이 써서

그 종이에 허연데 도무지 아니 보이구서야

뒷간으로 보내느니라―――

눈물 그렁그렁

꿇어앉아 그 말씀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부아통이 터졌지요 그래

징게맹경 어딘가 최생원네 손자란 놈

제아무리 잘났어도

똥구멍 새까만 놈일 거라 생각했지요

 

-시집 <하늘 밥도둑> 에서

 

 


 

 

심호택 시인 / 똥지게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일 시켜 놓고

봐라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되나

저렇게 된다

똥지게 진다

 

 


 

 

심호택 시인 / 최기권이와 더불어

 

 

만나면 그저 반가워라

대책없이 좋아라

땅값 뛰어올라 돈 걱정 없는

패거리들 모여앉아 화툿장 주무르다가

사우나탕으로 몸 풀러 가는

배불뚝이 아니다 내 친구 최기권이는

스무 살에 이장 살아먹은

똘똘하고 당찬 사람

군산 가 살더니만 더 부지런하다

이른 새벽 다섯시쯤 해망동 선창에

이 사람 틀림없이 돌아다닌다

맑은 날은 운동화 궂은 날은 고무장화

한바탕 휘젓고 다니다가

구릿빛 얼굴에 허연 이빨만 내놓으면

힘 안 들이고 경우바른 사람

기쁜 일 궂은 일 혹시나 생겼나

고향 마을 돌아보는 재미가 제일이다

피조개 말조개 소라 굴 멍게

기막히게 다룬다 술 한잔 얼큰하면

옛적 누비던 뒷산 올라가

여기는 아무개란 년하고 놀던 자리

저기는 또 그렇고 그런 자리

그런디 말이여

거시기 말이여

딸년이 고등핵교 들어가고부텀은

생각이 좀 다르더란 말이여―――

아는 사람 발길 드문 등성이에서

저 아래 서해바다 바라본다

어기여차 노젓던 정든 바다 바라본다

 

-시집 <하늘밥도둑>에서

 

 


 

 

심호택 시인 / 형

 

 

그는 나를 아끼지 않고

나는 그를 따르지 않았다

추억을 나누지 말자고

그는 일찍 죽었지만

쓸쓸한 기억이 더러는 있다

귀신이 무서운 나를

뒷산 으슥한 곳에 떼어놓고 달아나며

그는 말하였다

저기 초분에서 구신 나온다―――

그리고 뱀이 두려운 나를

풀숲 한가운데 버려두고 달아나며

그는 또한 말하였다

거기 네 옆에 비암 있다―――

한 어미의 배를 빌어 태어났건만

우리는 그다지 인연이 없어

그는 초년에 세상 떠났다

기억하지도 말라고

 

-시집 <하늘밥도둑>에서

 

 


 

 

심호택 시인 / 흘러간 시냇물은

 

 

흘러간 시냇물은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나는 다르네

푸른 하늘 아래 수없는 들판 건너

마음의 물레방아를 돌리러

오늘도 흘러간 시냇물은 오네

때로는 가만히 속삭여

묻기도 하지, 너 웬일로 돌아왔느냐?

하지만 탓하지도 않는다네

돌아가거라 과거 속으로

사라져라 지난날 슬픈 시간 속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네 나는

다만 짐작이나 하지

내 마음은 감옥이라 크막한 감옥이라

어쩌다 갇혀버린 것들 거기

오갈 데 없이 살고 있다고

그 옛날 바람 부는 들 모퉁이 하얗게

등때기 뒤집히는 모시 잎새들이며

호밀밭 외로운 노고지리 같은 것들

상기도 떠나지 못하였다고

 

-시집 <하늘밥도둑>에서

 

 


 

심호택 시인 (1947~2010)

1947년 전북 옥구 출생. 외국어대 불어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빈자의 개」등 8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하늘밥도둑』 『최대의 풍경』 『미주리의 봄』 『자몽의 추억』 등. 원광대 불문과 교수 역임. 2010년 1월 30일 교통사고로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