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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유문호 시인 / 오래된 질투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6.
유문호 시인 / 오래된 질투

유문호 시인 / 오래된 질투

 

 

이상한 일이다

가슴이 자꾸 아픈 게 아무래도

내 내부에서 누군가

죽어가고 있는 게 분명하다.

말 못하고 쌓아둔 마음들이

캄캄한 가슴에서 새가 되었나 보다

갇힌 그 새

죽어가나 보다

 

아픈 가슴 꾹꾹 누르며

나 혼자 길들여 놓았던

새를 안고 들어와 잠이 들었다

 

깊숙한 밤

누군가 나를 부른다

유령처럼 일어나 더듬거리는 발걸음으로

마당에 나가보니

새가 되어 버린

내가 날개를 벌려

달을 끌어안고 흘러가고 있었다.

 

 


 

 

유문호 시인 / 그 날

 

 

그 날,

시퍼렇게 멍든 강물은 묵묵히

바다를 향해 걸어나갔다

바람은 늙은 노파의 물주름처럼 웃으며 불어왔다

나는 남았고 계획은 풀어진 채

담배연기와 함께 한숨처럼 뱉어졌다

희쁌하게 다가서는 아침을 뒤로하고

돌아 나오는 강 언저리

간밤에 살해된 말(言)들이

물살에 떠밀리고 있다

 

그 밤으로 떠난 너고

나는 또 나고

 

세포마다 번지는 기억이

비어있는 눈동자를 지나

묵직하게 가슴으로 내려앉았다

길들은 제멋대로 엉켜 떠나가고

나는 황량하게 쭈그리고 앉아……

 

―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노래를 불렀다

 

 


 

 

유문호 시인 / 비가 내렸다, 비가

 

 

어디가 출발점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바람 부는 날

낮게 걸려서 흔들리고 보니

길 위였다, 그 길 위로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비가

소주 몇 잔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

쭈그리고 앉아있는

늑골을 따라 빗물처럼

길들이 흘러내렸다

꿈과 노래와 여자와 폭풍과 침묵 그리고

삭아가는 등뼈 하나

 

이 길 어디쯤

그리운 집은 있는 것일까

 

 


 

 

유문호 시인 / 모래시계

 

 

 1

 공중에 뜬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호루라기소리처럼

 빠르게 돌며 사람들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2

  이 곳에서 차를 타는 사람은 누구나

  얼마간의 돈을 주고 시간을 사야한다.

  시간은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

  그 사이에 틀어박혀 있기가 일쑤지만

  언제나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더러 멱살잡고 흔드는, 혹은 뇌물 혹은 특혜와

  그 밖의 자잘한 일상 어디에나

  필요한 만큼씩 시나브로 흘러내렸다.

  추억이 끝나고

  직립으로 매달린 꿈이 뒤집어질 때까지

 

  3

  새벽 3시의 사막

  시간을 걷는다.

  이 곳의 사막은 허기진 별들이 잠들지 못했다.

  별들을 헤치고 수상한 바람이 불어온다.

  얼마 전, 삶의 면적을 잃어버린

  별이 아니라 그저 어둠의 사막을 걷는 불빛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독한 불경기로 불끄지 못하고 별이 되버린 상가들

 

  살아가는 일이 그렇듯 사막을 걷는 일은 쓸쓸하다.

  무엇무엇에 대한 갈증과 무엇무엇에 대한 질투와 무엇무엇에

 대한 두려움과 무엇무엇에 대한 망명 혹은 유배와 무엇무엇에

 대한 소식과 무엇무엇에 대한 울음과 기대와 얼굴, 그리고

 생각…… 생각과 쓸쓸하다.

 

  모래를 사고 싶다.

  사막의 낮과 밤을 걸어 별빛 아닌 불빛 좋은 상점을 만나거든

  아, 형형색색의 칼날들

  굵은 돌들을 자르고 시간을 산다.

  신기루 같은 사람들이 피곤했던 삶들을 뒤집고  

  깜박 졸음에서 깨어난다.

 

  사막을 걷는 밤은 손끝까지 뻗친 키보다 훨씬 깊다.  

 

  4

  다시 공중으로 시간이 뜬다.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 셈이다.

 

  공중에 뜬 시간은 천천히, 그러나 호루라기소리처럼

 빠르게 돌며 사람들의 머리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유문호 시인 / 아무 것도 슬프지 않고 외롭지 않은 겨울, 눈

 

 

 빌딩으로 부딪친 간밤의 바람이 허리를 짚고 돌아간 저녁, 밤 깊어 가는 줄 모르고 떠들어대는 수다처럼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몇몇은 하얗게 산으로 가고 새카맣게 도시로 스며든다. 흔적도 없이 녹아질 것들 골을 타고 흐르는 눈물처럼 슬프디 슬픈 아름다움으로 내린다. 문득 내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눈은 내릴 것이다, 통속한 사랑을 삶들을 지우며.

 

 삶이 사랑이 그런 것이다. 수직으로 떨어지고 곡선으로 떨어져 더러는 샘물로 흐르고 땅 속 깊이 잠들었다가 누군가의 가슴에서 책갈피처럼 넘겨지는 눈물. 서툴게 끝맺음한 가락이더라도 지상에 스며들기까지는 잘게 부서지며 푹푹 발목을 적시는 추억. 그러나 또 어느새 바람은 멀쩡한 얼굴로 돌아와 강의 궁둥이를 치고 철썩거리며 달아나는 세월 같은 아물음.

 

 아무 것도 슬프지 않다. 아무 것도 외롭지 않다. 모두가 위태위태한 어둠의 허공에서 겨우 누군가의 눈앞에 짧은 순간 반짝거리다가 사라질 목숨들. 문득 또다시 이 밤 내가 죽어 없어진다 해도 슬레이트차양 끝으로 쑥쑥 고드름이 자라나는 겨울, 더욱 살찐 눈이 털끝 같은 기억들을 지우며 묵념처럼, 묵념처럼 내린다.

 

 


 

유문호 시인

1962년 강원도 춘천 출생. 하이텔 문학상과 <문예사조> 신인상, 계간 <오늘의 문학> 신인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 시작. 현재 통신문학인 클럽 <매혹>의 대표이며 '빈터' 동인으로 활동 中. 계간 리얼판타 대표. 시집 <사랑, 지나가다> 등. 하이텔문학상 수상, <오늘의 문학>신인작품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