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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전형 시인 / 고등어와 덕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16.
양전형 시인 / 고등어와 덕담

양전형 시인 / 고등어와 덕담

 

 

입 벌려

통째로 구워진 채

아내가 차린 밥상 위에 올라온

고등어 한 마리

내 젊은 날을 향해 뭐라 뭐라 아가리질 해댄다

해봤자, 내 입에 들어올 때까지지

-알았다. 이제 너를 영원한 고향으로 보내주마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자세로

그가 덧붙이는 한 마디

-잘 먹고 잘 살아라

아, 이 말이 그의 마지막 덕담

사물 하나 종적을 감추는 절차를 치른 후

산 자의 입이 세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래. 마지막 덕담과

사라짐과 침묵을 알고

남은 입들의 신빙성 정도를 알아야 할 것

이것이 내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대목이다

 

없어진 고등어에게 말한다

삶이란 이슬 한 방울임

홑이불 하늘 조심조심 밟으며

하루를 떠나는 해의 목을 축여주는 일임

그리고는 영원히 침묵할 것

내 아가리가

고등어에게 보내는 위로의 덕담이다

 

 


 

 

양전형 시인 / 마라도

 

 

누가 살가운 아이 하나 낳아

이리 멀리 보내두었나

태평양 닮은 어미 소곱에서

염치없이 보채던

내 염통 한 토막인 듯

모태 속 내 둥근 낮잠인 듯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져

아스라이 떠있는 섬

 

외롭다고 울 필요는 없다

끼룩 끼룩

괭이갈매기 젖 보채는 소리

바람 타고 저승문 두드릴 때마다

젖가슴 다 내주고도 모자란

굽은 등 내 어머니

흰머리 날리시며

남단 바닷길 허위허위 달려오신다

 

 


 

 

양전형 시인 / 첫꽃 핀 동백

 

 

 돈네코 허리춤에 네 살바기 제주동백. 언어 이전 몸짓으로 억겁 섭리 터득더니, 저 봐라 생살 뚫은 송이들 그리움이 분명하다. 동지 섣달 긴긴밤 눈발이 하 서럽고 소대한 모진 바람 자진모리로 되치기하다 겹치마 걷어 올리며 난생 처음 벙글었네.

 아스랗던 새천년이 어쩜 이리 성큼 왔나. 고운 입에 여의주 물고 비상하는 서귀포여, 아무튼 저 꽃 보게나 드디어 속 보였네.

 저 한 몸 불질러 이 땅을 밝히려나 등성이를 내려온 허옇게 시린 산울음도 길섶에 붉어 따스한 치마폭으로 스미는군. 핏빛보다 진솔한 거 있으면 나오라며 정방포구 물어뜯다 돌아누운 스무세기, 어쩌면 저 꽃 피우려 천년 밤 지새운지 몰라.

 

 


 

 

양전형 시인 / 입동 귤밭

 

 

귤나무 굽은 등허리에

하늘이 추운 듯 오도카니 앉아 있다

상심한 햇살은

할쑥한 얼굴로 서귀포 귤밭을 어슬렁거린다

 

방풍숲에선 이따금

팽나무 이파리 늙은 가을

새앙쥐처럼 이리저리 고개 내밀고

열매의 마지막 숙성을 위하여

하늬바람은 밤낮으로 설레발을 떤다

 

고독할수록 더 반짝이는 그리움 하나

귤향 따라 밀려들고

누군가 내 안에서

회억 속을 한없이 발서슴하는데

하나 남았던 멧비둘기마저 떠난다

떠나는 것들이 많구나 입동 날은 쓸쓸하다

 

빈 농약병 속으로

바람이 잇달아 기어 들어간다

빈 병도 가야 할 곳이 있다는 듯

부웅부웅 뱃고동 소리를 내는데

밭 구석에 피어 싱그럽게 웃고 있는

때늦은 들국만 고독에 강하구나

 

 


 

 

양전형 시인 / 한라산 층층잔대

 

 

휑한 들녘 헛손질로 한 여름 나서더니

땅을 향해 한 타씩 일제히 종을 치네

무작정 그리운 소리 어느 하늘이 부추겼나

 

세상 건너간 이는 이쪽만 본다는데

이 산 아래 잠든 친구 먼 길을 바라보며

뎅그렁 뎅그렁 덩덩 땅 위가 그립겠다

 

외로운 길 지친 듯 낮달도 푸석하군

친구야, 나도 종 됐네 그간 사연 타종할까

우리들 세상 달라도 고작 한 층 차이라네

 

일상이야 틀리겠지 넌 자고 난 먹는 일

잠연한 너의 고향 왕왕작작 나의 타향

아니다, 같은 일 있다 그립고 보고픈 것

 

첫 닭이 홰치기 전 꽃종소리 울리거든

햇귀도 잠 깰 시간 눈 번쩍 떠 보시게

멍한 듯 벌떡 일어나 나 좀 잠깐 보시게

 

 


 

 

양전형 시인 / 취중 진담

 

 

술 취하니 길이 달려들고

하늘은 내려앉고 땅이 올라온다

그 사이에 눌려

나는 구겨진다

 

구겨진 것들은

길가에 넘어져 몸질치다가

새벽 쓰레기차를 타야 한다

 

아 간신히 고개 드는 청춘아,

내 손 잡았다가

밤인지 낮인지 모를 새벽

쓰레기차 불쑥 나타나거든

 

구겨진 내 몸

한 번쯤 돌아 눕겠다 그때,

하늘과 땅 그 어디에 갔는지 모르게

차 위로 확 던져다오

 

 


 

 

양전형 시인 / 헌 구두를 버리며

 

 

누가

이 마음에 들어가

슬은 세상

보듬어 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금가고 물새는 가슴

 

누구라도

이 목숨 지나온 길

추궁하지 말고

덮어줬으면 좋겠다

 

 


 

양전형 시인

1953년 제주시 출생. 1994년 ‘한라산문학’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 1996년 시집<사랑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 시집 <바람아 사랑밭 가자> <하늘레기> <길에 사는 민들레> <나는 둘이다> <도두봉 달꽃> <허천바레당 푸더진다> <동사형 그리움>. 제5회 제주문학상, 제3회 열린 문학상, 제2회 한국자유시인상. 현재 한라산문학동인 회원, 한국문인협회제주특별자치도지회 회원, 현대시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