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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주영 시인 / 산속의 헌책방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5.
서주영 시인 / 산속의 헌책방

서주영 시인 / 산속의 헌책방

 

 

꼬불꼬불 찾아간 숲속 한가운데엔

책이 사람을 기다리는 새한서점*이 있다

 

퀴퀴한 냄새를 다정하게 움켜쥔 산골 헌책방,

이곳엔 이 빠지고 머리 벗겨진 채

십 년간 책방을 지켜온 사내가 있다

 

박쥐며 산새들이 진열된 책 위에 알을 품으면

그 밑의 책은 주문이 들어와도 품절이다

책꽂이 여기저기 집짓는 새들

이 숲은 거대한 한 권의 책이다

 

제비꽃 진달래 할미꽃 애기똥풀은 서문이고

본문은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 산딸나무 팥배나무가 차지했다

 

행간 사이로 새들의 노래가 날고

오솔길은 퇴고를 기다리는 문장이다

 

수없이 읽고 간 흔적들

각주도 없이 읽어나가는 숲

 

출간된 지 오래된 이 책은

고라니 노루가 제일 좋은 단골이다

 

봄이면 신간을 선보이는

이 숲의 저자는 아직도 집필 중이다

 

진열된 책 위에 박쥐며 산새들이 집을 올리고 알을 품으면

그 밑에 책은 주문이 들어와도 품절이다

 

*충북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에 있는 숲속의 헌책방. 책 많은 인터넷서점으로 알려진 곳.

 


 

서주영 시인 / 그늘꽃

 

 

바닥 밑의 바닥엔 키 작은 네가 있다

저항도 눈물도 잊은

웅크린 너의 목소리를 건져 올린다

눈 귀도 닫아버려 음습한 이력

외줄 타는 어름사니처럼

일제히 소리 죽여 아슬아슬 어둠을 건너느라

한낮도 후미진 밤이었다

숙성된 어둠에게 할퀴고 물어뜯기며

맨살로 오롯이 버텨온 너를

묵묵한 한 떨기 시인이라 부른다

 

 


 

 

서주영 시인 / 바닥이란 말

 

 

바닥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바닥은 끝이 아니다

반환점을 돌 때

바닥을 치고 다시 시작하라는 뜻이다

 

바닥이란 말,

바다의 맨 밑바닥을 ㄱ자로 몸 굽혀 받치고 있다

허리 한 번 못 편 채 안간힘 다해 사는 바닥,

바닥이란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기름 유출사고에

악취를 뒤집어쓰고 바닥에 붙들린 바닷새들,

살아남기 위해 부리로 제 깃털을 몽땅 뽑거나

무거워진 날개의 반을 뭉텅뭉텅 쪼아 잘라낸다

갈가리 찢긴 마음은 날개도 깃털도 없는 울음이다

날아다니는 바닥이다

 

 


 

 

서주영 시인 / 도비가트*

 

 

허기와 아픔 업은 도비왈라(dhobi walah)**

그늘로 그늘로만 기울어진 삶이 끝없이 깊어진다

 

작은 세상 하나쯤 빨아낼 수 있는 천부 기술자

정작 뼛속까지 스민 자신들 얼룩은 세탁이 안 된다

 

카스트는 어느 문장 속에서만 철폐 되었을 뿐

발 빠른 성장도 화려한 얼굴로 대물림하는 이들을 흔들 뿐

무거운 멍에에 매인 너덜대는 오늘도

어제처럼 16시간 빨래를 한다

 

어둠이 차츰 그 몸을 지울 때

500루피 일당을 손에 쥐고 어둠속에 들어

바닥까지 휘어버린 잠을 자는...

 

잠꼬대마저 아픈 밤은

허공 허리춤에도 남루의 알이 슬어 있다

 

천 년 넘게 걸어온 신성한 노동이

이들 잠속까지 파고든다

 

냄새 넌출이 쑥쑥 자라는 곳

갓 태어난 달에서도 똥냄새가 난다

 

*세계에서 가장 큰 인도의 공동 빨래터.

**도비가트에서 업으로 빨래하는 사람들을 이르는 말로 이들은 대를 이어 평생 빨 래만을 하며 사는 불가촉천민이다.

 

 


 

 

서주영 시인 / 산투르*를 치던 네가 그리웠다

 

 

크레타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린다

뱃사람들의 피로를 과적한 배에 오른다

폭풍을 피하기 위해 유리문을 닫았지만,

카페 안은 문틈 파고든 파도의 포말로 냉각된다

온몸 휘감는 한기를 쫓기 위한 한잔의 럼주 속에서

출렁이는 너의 시선에 갇힌다

미치광이처럼 배를 덮치고

해안을 거칠게 물어뜯는 파도의 아가리는

뱃전에 무수한 알을 급속히 부화한다

아득한 심연에 자리한 승객들의 그늘 짙은 목소리가

한곳에 뭉쳐 바위 같은 침묵이 된다

단테의 하늘에서 귀 없는 별이 지고

세이렌이 노래하던 바다가 어둠속으로 침몰하는 섣달그믐,

저 멀리, 까마귀 한 마리가 팽팽한 적막 속으로 날고 있다

 

파도를 잠재우며 산투르 현을 고르던 너를 생각한다

 

*산투르는 이란의 전통악기이다. 사다리꼴 모양의 몸통 위에 72개의 현이 달려있는 악기로 이로부터 파생된 대표적인 악기로 양금이 있다.

 

 


 

 

서주영 시인 / 서쪽

 

 

저무는 것들처럼 당신의 등도 서쪽으로 굽어 있다

하루하루의 눈동자와 저녁의 어깨 위에

슬픔을 으깨어 얹은 당신이 앉아 있다

저문다는 건 바람에 긴 그림자가 힘없이 흔들리는 것

그리움이 옅어지고, 계절이 쓸쓸해지고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

저녁이 내려앉은 굽은 각도에서, 펼 수 없는 서쪽 모서리에서

당신과 나의 지난 시간이 염분처럼 버석거린다

저문다는 것은 서쪽으로 애증의 질문을 던진다는 것

등이 굽은 당신의 그림자를 껴안고 다독인다는 것

 

 


 

 

서주영 시인 / 모란시장의 봄

 

 

모란시장에 장 구경을 갔다

 

내장을 훅 뒤집는 역한 비린내가

먼저 달려든다

 

철장마다 한데 갇힌

수십 개의 눈망울에

쓸쓸한 봄비처럼 마음이 젖는다

 

마치 상품마냥 비슷한 덩치로

사각의 비좁은 철장에 갇힌

낙심한 눈망울이 초침처럼 불안하다

 

철장 안, 형제와 친구들을 바라보다가

주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코 앞,

어둠속으로 끌려 나가는 그들

널브러진 주검을 보면서도

무자비한 인간의 손길이 두려워 울지도 못한다

 

친구를 따라 들어선 시장 입구

몇 걸음 못 가 뒤돌아서고 말았다

들뜬 마음이

바닥으로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버스까지 따라온 슬픈 눈망울들이

함께 버스에 오른다

 

하필, 충혈 된 개들의 눈알 같은 벚꽃잎이

봄비에 아무렇게나 흩어지고 있었다

 

 


 

서주영 시인

충남 아산 출생. 2009년 《미네르바》로 등단. 미네르바문학회장, 시예술아카데미 회장 역임. 《월간문학》 기획편집위원. 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집 『나를 디자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