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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은상 시인 / 카인의 아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4.
김은상 시인 / 카인의 아들

김은상 시인 / 카인의 아들

 

 

1

거리에서 세상의 눈물을 배우는 동안,

老母는 수의를 준비하셨다

왜 하필 시인이냐며 내 가슴속에 울음을 떨어뜨릴 때마다

나는 공터에 앉아

한 사람의 눈물도 받아주지 못한 생을

마른 나뭇잎 한 장으로 태우곤 하였다

그만 쓸까, 밤바람은 나무가 아니라

자꾸 마음의 葉片을 흔들어

흔들리다가 뜬눈으로 넘겨버린 밤의 페이지들,

그만 쓴다, 라는 글을 채워도 보았지만

효의 이교도인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카인의 아들이다

2

무딘 삶의 펜촉에 어머니의 눈물을 찍어

시를 써본다 흰 머리카락과 주름살을 불효로 두들겨

백지 위에 시의 집을 짓는다 시가 부엌을 기웃거리다

내용의 잔에 채워온

젖은 행주 같은 어머니,

 

시도 나도 목매여서

단숨에 마셔버린

독배(毒杯)를 그대의 로미오는

 

 


 

 

김은상 시인 / 고무외투

 

 

사내가 구름장을 끌어 덮는다

공중을 터뜨리며 쏟아지는 함박눈

고무로 동여맨 하반신을 쓸어안는다

가르랑거리는 숨을 밟고

지나가는 단단한 굽 소리들

사륜 널빤지 아래서

깨진 구름조각으로 출렁거린다

양손으로 바닥을 당길 때마다

한 뼘 한 뼘 기우는 지평선 위

민달팽이 긴 발자국이

살얼음 까는 잔물결로 술렁댄다

상자 속으로 동전이 떨어질 때

반짝 성에 낀 속눈썹 치키는 사내

팽팽하게 일어선 검은 주름이

애벌레 등피처럼 꿈틀거린다

모였다 흩어지는 게 몸이라는 듯

종아리에 쌓인 살갗 흘러내려

외투 안쪽 절반이 떨어져 간 길들

덜컥덜컥 사내의 몸통을 휘감는다

늑골 속 눈발이 뒤척이고 있다

 

- 2009년 <실천문학> 신인상 당선작

 

 


 

 

김은상 시인 / 손 있는 날

밤의 관자놀이에서 타액이 흘러내립니다.

신혼부부가 이사를 간 텅 빈 방,

시냇물 소리 흘러오는 개울입니다.

떠나지 못한 이웃의 체취 한밤의

유령선으로 표류하는 중입니다.

입을 막은 손가락들 사이에서 꿈틀대던

살결들이 들려옵니다. 봄날

활짝 피어오르는 숲속 같습니다.

벽이 간직한 비파를 더듬거립니다.

얼굴이 제멋대로 찡그려질 때까지

화들짝 그 꽃들 다 질 때까지

구석의 이명으로 구겨집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오해이므로,

꽃잎을 덮고 잠들었던

송장메뚜기가 날아갑니다.

이불 속에서 소년의 발목을 잡아당기며

한 여자의 몸을 속삭였던

한 남자의 새벽처럼,

나의 출생은 사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밤이 그립고 또 두려워지는 아침이 오기 전에

소년을 살해해야 합니다. 아직

남아 있는 봄꽃들 다 꺼지기 전에.

나는 손 있는 날 태어났습니다.

 

계간《백조》/2023. 여름호

 

 


 

 

김은상 시인 / 멜랑꼴리아

 

 

 그 왕은 몽상가였다. 그의 유일한 일과는 궁전 높은 곳에 올라 별자리에 잠기는 일이었다.

 지구의 기울기에 앉아 바라보는 황도 십이궁, 왕은 자신의 천문학 위에 저녁의 왕궁을 세우는 중이었다.

 왕이 언제부터 별의 노래에 잠기는 몽상가가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벙어리를 결심한 후부터 흉흉한 말들이 왕궁을 둘러싸고 싹을 틔웠다.

 신하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왕의 악행을 수군거렸고 왕비는 잠든 왕의 코에 손가락을 대고 생명과 왕위를 염탐했다.

 왕은 밤에만 깨어 있었으므로 누구도 왕이 무엇을 먹고 배고픔을 견디는지 알지 못했다. 곧 낮의 세계는 왕의 나날에 악령을 깃들게 했다.

 기도와 주문 그리고 예언이 엉켜 왕궁을 흘러 다녔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전혀 모른다는 듯이

 어쩌면 자신의 일과는 무관하다는 듯이 왕은 매일 밤의 세계를 찾아가 몽상에 몰두했다.

 궁수자리에서 쏜 화살이 물병자리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왕은 말의 세계가 형언할 수 없는 단단한 침묵을 완성했다.

 왕은 황홀했다. 아무도 피 흘리지 않았으므로 자신에 대한 용서를 가장 큰 전리품으로 얻었다.

 칼의 형식이 필요하지 않은 저녁의 왕궁, 이제 왕에게는 인체 중 혀가 가장 거추장스러운 부속이었다.

 왕은 칼로 자신의 혀를 잘라내 몽상가의 문장(紋章)으로 왕실 문 위에 걸었다.

 혀를 본 사람들은 모두 경악했다. 혀가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겠다는 듯이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아 혀의 수다에서 누군가는 저주를, 누군가는 신탁을 엿들었다.

 혀에 대한 숭배와 배척이 엉켜 서로에게 피를 요구하자, 왕국의 몰락을 점치는 소문이 국경을 뛰어넘었다.

 그러나 적보다 무서운 적은 불행을 앞세운 상상력에 있었다.

 왕궁을 잃은 병사들은 강도로 돌변했고 백성들은 하나 둘 왕국을 둥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밤 횃불을 든 긴 이주행렬이 뱀의 긴 꼬리로 왕에게 일렁였을 때, 왕은 자신의 내면 깊숙이 숨겨둔 낡은 하프를 꺼내 연주하기 시작했다.

 고요히 정적을 태우던 단 하나의 촛불, 스스로 울리지 않고서는 자신의 선율을 주장하지 못하는 고열(熱)이 있었다.

 나는 아직 그 왕국을 떠나지 못하였다.

 

 


 

 

김은상 시인 / 돌 속의 바다

 

 

나는 누구의 무덤이 되겠습니까.

저녁의 귀밑머리 아래서 파도가 흘러옵니다.

너무나 화창한 밤이어서

죽기 좋은 하이델베르크의 물결입니다.

밤의 눈썹 끝에서 포말로 부서지는

별빛들이 돌의 적막 속에서 출렁입니다.

한 줌의 희망과 한 모금의 기쁨도 없이

마른 생을 살아간다는 건

소리칠 수 없는 비명을 삼키는 일입니다.

날개를 파산한 새들에게 하늘은 관념입니다.

그리하여 나의 연명은 이명입니다.

그리움도 연민도 다 써버린 지 오래인데

비겁하게도 나는 눈사람을 만듭니다.

내 삶의 가장 큰 실패는 시에서 왔지만

시인이 되지 않았더라도

성공적인 인생은 없었을 것입니다.

가여운 하이델베르크의 성벽이

나의 가없는 어머니이기 때문입니다.

병든 아버지가 죽고 알게 됐습니다.

내 뜨거웠던 사랑의 원천은 증오였고

생의 절박함은 오해에 자라났습니다.

심해 같은 하이델베르크를 유영합니다.

해녀의 발목을 매만지는 푸른 열과

바다를 음각하는 수평선이 흘러옵니다.

파도의 끝자락에 서 있는 갈매기가

부러진 발톱을 꼼지락거립니다.

추억은 죽음을 향해 놓인 선로입니다.

창공이 돌 속에서 눈동자를 깜박이는

깊은 물결 속에서 주마등을 켭니다.

나는 가로목 한 칸,

그 한 칸들의 우울 속으로 돛단배가 지나갑니다.

부표처럼 한 생을 떠도는

돌 속의 바다,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 있습니다.

 

—월간 《현대시》 2022년 10월호

 

 


 

 

김은상 시인 / 저수지

 

 

아버지의 무릎에 물안개가 일렁거린다

손바닥을 대자 손톱에 담긴 달 잔물결에 빠져 현이 울렁댄다

물속에 머리채를 담그고 밤을 중얼거리는 수양버들처럼

병상 위에 묶인 검은 맨발 고향 저수지를 서성 거린다

죽고 없는 친구들의 이야기 한참 허공에 풀어 놓다가도

댁은 뉘신지, 던진 말이 늑골 속 물수제비로 날아든다

낚고 싶은 기억 한 줄이 있어 내가 누구, 핏줄을 물어도

빈 잇몸으로 삐비꽃을 씹으며 젊었던 한때 둔덕을 헤맨다

몸속을 맴도는 나이테도 오래되면 멀미를 하는지

포르말린 향기 가득한 달의 요의 기저귀에 그려넣은 백발의 아기

엄마, 잠결에 흘러나온 가는 목소리 가랑잎 한 장으로 파문 속에 잠긴다

요강 같은 달무리 물의 지문을 지우고 수문 아래로 떠내려간다

 

 


 

 

김은상 시인 / 하늘로 흐르는 하지정맥류

 

 

 벚나무가 파릇해진 길을 하늘로 밀어 올린다

 간밤 소나기에 어깨를 걸고 재잘대던 양철 지붕들 모스부호로  초근목피를 간질였는지  가지마다  꽃망울이 돋아있다

 사내가 헐렁한 대문을 밀고 삐거덕삐거덕 걸어 나온다

 끈적거리는 그림자가 어깨를 당겨 기역자로 구부러진 등허리 납작 고개를 수그린 집들과 엉켜 젖은 바닥 위를 꿈틀댄다

 몇 겹 접힌 양복바지를 무릎까지 추켜 올리자 때묻은 소용돌이 종아리에 펼쳐진 검푸른 등고선을 흔든다

 벚나무 옆에 쪼그려 앉아 구겨진 담배에 불을 붙인다 복사뼈 밑 그늘이  밑동에 흥건하게 고인다

 영등포역을 지나가는 열차 소리 덜컹덜컹  정맥 속으로 스며들어 사내가 떠나온 길들 터질듯 부풀어 오른다

 처마 밑 폐지를 등에 업은 손수레가 들개처럼 주저앉아 몸을 말리는 아침 골목의 하지정맥류가  비린 그늘들을 수혈한다

 사내가 벚나무에 등을 기댄다 흔들리는 꽃망울들 공중을 쓰다듬어 꽃받침 가득히 햇살을 채운다

 하늘로 파고드는 핏줄들 팽팽하다

 

 


 

김은상 시인

1975년 전남 담양 출생.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9년 《실천문학》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유다복음』 『그대라는 오해를 사랑하였다』. 소설 『빨강 모자를 쓴 아이들』 『나의 아름다운 고양이 델마』.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문학창작 기금을 받음. 제1회 상상인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