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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돈 시인 / 벤치에 대한 단상
나무 그늘 벤치에 누운 나는 사람들의 노래를 읽는다 파인 얼룩과 몸부림 그리고 바람으로 피어난 시간의 잎을 읽는다 어쩌면 나는 밤의 울타리에 갇히는 게 아니다 남들이 흘리고 간 꿈을 먹고 사는 나의 여름밤은 하늘보다 깊고 햇살보다 눈부시다
녹아내린다, 아니 마천루 꼭대기에서 벤치가 빙글빙글 날고 있다 내가 어깨를 기대자 돌담이 숨고르기를 시작한다 한낮의 순간, 나무는 시간을 버틴다 아니 갈라지고 있다 한 여름이 아우성을 치며 벤치 앞을 떠나가자 바람이 서서히 사지를 내뻗는다 벤치는 바람이 불 때마다 한 장 한 장의 서신을 받고 또 쓴다, 어언 벤치는 시가 되고 시는 또 벤치가 되는 아픈 꿈을 키우는 온상 누군가가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두근거리는
그러니 벤치는 종교이기도 하고 환자이기도 해서 얇은 심장판막증처럼 그대를 기다린다 웅크리고 있는 나이테 속에 시간들이 행렬을 짓는 벤치 한 움큼의 사연들을 쏟아놓고 어둠의 그늘이라도 사랑을 새기는 벤치
김진돈 시인 / 눈사람
먼 과거에서 건너오는 전령이다 눈은
떠도는 생의 마지막 페이지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전달 못 했던 한 덩어리의 말이 뭉쳐 있는 눈사람처럼
홍대입구에 싸락눈이 일렁거리는 것은 한때, 따뜻한 눈길에 어깨를 몇 번 기울인 적이 있기 때문일까
창문을 두드린다 너를 잊을 수 없다는 듯 포개지는 홑이불처럼 추억과 욕망을 뒤섞으며* 너와 함께 했던 푸른 대숲과 푸른 생각 그리고 붉은 꽃, 그 순간을 조금씩 견디면서 눈발이 떨어진다
아파트단지에 하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은 저녁이 젖고 불꽃이 아직 남이있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눈보라가 들판을 돌고 돌아 너를 기억하는 동안 나선형으로 휘감기는 눈보라
점점 안으로 굵어지는 껍질 눈이 부풀려지는 시간
내 앞에서 아직도 눈발이 내리는 것은 외투 바깥으로 나오지 못한 말들이 천천히 건너오기 때문일까
눈길을 무작정 걷고 걸었다 순간, 하얀 여우가 내 발가락을 덜컹 문다
꿈속에서 본 눈사람을 떠올리며 나는 끝나지 않은 불꽃을 따라 돌아가는 중이다 젖은 저녁이 휘파람을 불며 경계 없이 지나간다
"T.S. ELIOT< 황무지>에서
<시산맥> 2016년 가을호 발표
김진돈 시인 / 자작나무와 안개 사이
그때 알 수 없는 또 다른 골목이 지나갔다 빗소리처럼 검은 것들이 겹쳐지는 것 같기도 하는
나무들도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분별이 무의미해지는 것일까 또 지나가는구나 얼굴들이, 그림자가, 대지가 어둠을 느낄 때, 그게 무슨 대수라고, 말들이 자작나무와 안개 속을 지나는 사이
그 순간 지워지는 것이 무엇일까 지금까지 선명하게 기억했는데 오늘, 여기에도 없고 거기에도 없고 사이에도 없어요 당신, 그러니까 어디에 있는 건가요
그래, 모든 것은 모였다 사라지는 때가 있지 낯선 아침을 맞이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무엇이 없는 건가요
알 수 없는 또 다른 그림자가 또 지나갔다 말을 꺼내기 전의 적요(寂寥), 연주가 끝난 후 어디에 있는 건가요
그림자 속에 빈틈이 생기자 쌓였던 존재들 수많은 빗소리처럼 후두둑 쏟아져 나온다
튀어 오르는 연어처럼 잠시, 눈앞에 보였을 뿐, 순간 밝았다가 소멸하듯 생각의 무게가 구겨지고 접히는 곳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무엇을 버리지 않는 세계는 아득하다
김진돈 시인 / 석양의 출구
노을이 출하되고 있다 저녁의 출구에서 흘러나온 노을은 어디로 가는가 귀가를 서두르는 하루의 얼굴에 낙관을 찍는 시간
소강상태로 닳아버린 장마는 어깨를 적시지 못해 흥건한 노을, 저녁에 넘친 저녁놀의 출구는 서쪽이다 저편의 낯빛이 흔들린다 강변을 내려다보던 바람이 강을 윤슬로 물들이고 새들은 저녁 한 톨을 물고 둥지로 날아간다
머리를 검붉게 염색한 자전거들이 사열하듯 굴러간다 석양의 출구에 아직 남아 있는가 아침의 입구에서 길을 잃은 사람은 도착하지 않았다
노을이 어둠을 잡아당긴다 점점 출구가 닫힌다
김진돈 시인 / 숙녀와 초승달
비탈진 산길에 다소곳이 핀 목련꽃
가지 끝에 하얗게 매달려 말을 걸려는 듯 말 듯, 떨리는 자세다
허공으로 비상할 듯 고고함을 머금으며
대낮, 옆구리의 각도를 구부려 긴장한 듯, 내려다보는 하얀 초승달
가지에 앉은 새 한 마리가 귀 쫑긋 세우는 자세다
분위기를 넓게 깔아준 파란 하늘에 목련과 초승달이 묵언 대화
꽃향기처럼, 초록색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는 봄 하염없는 함박웃음으로 화답하는 초승달
김진돈 시인 / 애기똥풀
언젠가는 애기똥풀에 대해 맛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지금도 맵고 쓴 애기똥풀에 대해 제대로 씹어보지 못했다 거기에 피어 있던 백굴채*의 노랑꽃, 한때 단단했을 돌덩이가 산기슭을 부드럽게 감싸고 아마 오늘도 말을 못하고 지나갈 것 같다 초여름의 낮은 산기슭, 길섶에 피어있던 애기똥풀, 네 장의 노란 꽃잎을 본 후 곱슬털과 이파리에 말을 대고 싶었으나 애기똥풀에 한번 혀를 대보고 싶었으나 낮은 산기슭에서 자라는 애기똥풀 알 수 없는 놀라움에 흔들리는 애기똥풀을 나도 흔들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애기똥풀을 한번 빨아보려고 낮은 산기슭의 초여름, 줄기를 꺾었다 애기똥 같은 황색 유액을 맛보던 그날 속 쓰림이, 기침이, 사지마비가 풀어지곤 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급작스레 흔들려 캄캄할 때가 있다 애기똥풀 속으로 들어가서 애기도 없고 똥풀도 없는 애기똥풀의 생각으로 그렇게 언덕 너머에 있다 마치 애기똥풀이 나인 것처럼 깨물어보고 싶었다 *애기똥풀의 학명. 맵고 쓴맛으로 항암작용이 탁월. 위궤양, 위암, 간암과 사지마비, 기침, 피부질환 등에 효능이 있다. -시집 『아홉 개의 계단』 2016. 작가세계
김진돈 시인 / 케이프타운에 떠오른 축구공
사바나 초원도 아닌 머릿속에 잔디들이 뱅글뱅글 맴돌고 있다 나의 눈알도 둥글둥글 회전한다 서로 당기고 흩어지는 맑은 햇빛 테이블마운틴 그라운드 서로 뒤엉킨 왼발 오른발이 빗물 속에서 이방인의 시간들을 적셔놓는다
와우! 남아공에 솟은 공- 머릿속의 축구공 너와 나를 껴안아 골대 앞에 매달아 놓는다 아스날의 세스크 파브레가스 잘 있나? 아약스의 루이스 수아레스도 잘 있나? 브레맨의 메주트 외칠도 잘 있지? 여러 갈래로 갈라진 TV 화면은 오른쪽으로 자꾸 휘청거린다 그대는 봤는가? 이마에 솟은 공, 스핀 먹은 바람이 기둥에 튕겨 나오다 쓰러진다
와우! 남아(男兒) 공- 지구 끝 한 모서리 난간 지점에서 꿈을 꾸는 어두운 대낮 케이프타운도 사바나 사막으로 떠돌아다닌다 바람이 부부젤라의 소음을 쫓다 잠시 주춤한다 태양도 감독도 숨을 멈추는 시계도 나무도 숨을 멈추는
초원을 횡단하는 얼룩말의 허리를 튕겨본다 야생화의 키 작은 웃음소리를 지나가던 새가 잽싸게 가슴에 품는다 부부젤라 소리에 잠을 등진 하늘이 반쯤 내려와 있다 아니, 그러다가 이내 사라질까 숨죽이는 공(空), 허공 속의 긴 발가락이 다시 여장(旅裝)을 차린다 살아있어서 죽는 공 죽어서 또, 살아남는 공 공중으로 띄우는 발의 역사만큼이나 길게 휴전의 휘슬이 울리고 사람들은 머릿속에 빛나는 공 하나씩 이고 이제 비로소 편안한 잠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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