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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원 시인 / 호두학 개론
지구의 몸무게는 호두 한 알의 무게 같아
호두까기인형이 지구의 속알맹이를 다 까먹어버렸는지 모를 일이야
호두의 입장에서 몰입하다가 자전축의 생각을 쓸쓸하게 짚어보기로 해
당신이 사다준 호두알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적도와 위도로 굴려보면
우리의 안쪽과 바깥의 온도차가 손안에 꽉 쥐어지지
그때 별자리를 이루는 궁합 엇갈린 애정운과 이별수가 자주 교차되고 있었지
이상한 침묵도 이 상하게 서로 딱딱 소리를 냈었지 무심코 호두알을 손바닥에 굴리는 건 벗은 지구의 느낌
호두의 저지선을 무조건 깨트려보고 싶은 것뿐이야
-시집 《그 해 내 몸은 바람꽃을 피웠다》, 2021, 상상인
려원 시인 / 나무늘보
나무늘보가 된 게으름뱅이 나의 애인은 유칼립투스 나무 위에 산다
한 끼에 겨우 한 두 이파리씩 소량의 나뭇잎만 소식小食 소심한 배를 채운 뒤 나무를 끌어안고 온종일 잠만 잔다
저 게을러터진 평화주의자
소박하고 태평한 나의 애인, 그는 느린 시간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초고속 세상일 따위엔 아랑곳없다
바빠야 할 이유가 없는 느림보의 미학
온종일 깨어있다 하더라도 나뭇가지에 축 늘어져 만사가 다 귀찮다
거추장스런 배변 똥 싸기가 싫어서 소식하는 걸까 일주일에 단 한번 나무 밑에 똥 눌 때는 사치스런 황홀경 볼일을 본 뒤에 나뭇잎을 덮고 나무 위에 다시 깊은 잠에 파묻히는 바보 같은 나의 애인 나무늘보
려원 시인 / 빗물 살인사건 이번 사건은 긴 장마로 이어지겠습니다 실컷 빗물로 얻어맞은 멍의 후예들이 공중에서 발광합니다 그녀의 약지가 구름에 미끄러져 골절되었습니다 물속에 뿌린 언약들이 사라지고 없습니다 나비구름은 한몸이 되어 천둥번개 소리를 냅니다 푹신한 계절이 허벅지 사이로 흠뻑 젖습니다 빗물은 훌쩍훌쩍 끊어졌다가 이어집니다 곧 그녀의 전신이 빗물에 비칠 테니 눈물주의보를 내려야겠습니다 그녀가 빗물을 싹둑 싹둑 잘라냅니다 사실은 빗물이 그녀를 자르고 있습니다 빗물에게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녀의 눈썹에 장대비의 설움이 그려졌습니다 살인의 기억은 빗물의 숨통을 끊는 것입니다 ㅡ계간 《불교문예》(2022, 가을호)
려원 시인 / 나비의 뼈
양각으로 새긴 앙상한 뼈 뼈만 남은 여인의 벌거벗은 몸뚱이가 드러나 보인다
판화로 찍어낸 것 같은 소멸법 확장 이미지 노파의 등에 달라붙은 고목의 옹이가 커다란 나비점 같다
어깻죽지를 들어 올린 여인은 해묵은 때를 욕조 안에 풀어 놓고 있다
디스크 수술 자국과 이빨 빠진 잇몸 살아있다는 증거인 양 입을 연신 오물거린다
가녀린 뼈마디, 마디마다 호기심 많은 날갯눈을 달고 겁도 없이 날아오르는 나비 떼들
나비의 계절이 따로 있다
한뼘의 입김을 불어넣어 봄을 불러들이려는 듯
몸에서 비늘이 눈부실 때 세상에서 가장 멀리 날기 위한 꿈을 꾸는 나비
이제는 나이테를 그어도 좋은 시간 나비의 날갯짓을 따라 그 길을 밟아가고 싶다
더욱 더 단단해진 나비의 뼈
려원 시인 /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꿈 아스팔트 위에 압착 된 날갯죽지 비둘기의 꿈이 납작하다 몸통은 사라지고 붉은 핏자국만 저승사자의 발자국저럼 찍혀 있다 비둘기에게 아스팔트는 더 이상 날아같 필요 없는 안식처였을까 든든한 반석, 따뜻한 바위로 보여 날개를 접은 것일까 섬뜩한 위험을 느낄 여지도 없이 나른한 권태처럼 압사당한 주검이 짓눌린 꿈에서 깨어날 듯 부리에 씨앗을 물고 날아오를 것만 같다 아무도 모르는 절벽에 이르러 지상에 떨군 씨앗들은 다시 꽃 피울까 꽃길을 건너온 들짐승들의 발자국에서는 흙냄새 대신 꽃잎 적신 빗물이 흘러 폭포수가 된다 산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가 된다 삼나무 숲의 흔들림이 천둥번개가 된다 그리고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핀다 비둘기가 날아와 앉은 바위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건축물이 되었다 한 마리의 비둘기가 달리는 차에 치여 로드킬로 피를 흘리고 그 핏자국이 꽃으로 피어나기까지 비둘기 비둘기 비둘기의 말이 없는 죽음이 서럽도록 황홀한 노을이 되어 저 하늘을 꾸미고 있다 -계간 『시와산문』 (2023년 가을호)
려원 시인 / 병풍(屛風)
겨울이 다가오면 당신을 펼쳐 병풍 두를게요 접었다 펼쳤다 당신을 병풍 두르면 거친 바람도 순하게 내 곁에 잠잠해지지요
당신은 나를 위해 조붓한 오솔길을 마련해주지요 산수화를 배경으로 병풍 속에 길을 낸 당신의 오솔길 병풍에 와 부딪치는 메아리처럼 접어졌다 펼쳐지는 당신의 목소리 그곳에 당신의 체온이 느껴져요
당신을 따라 병풍 속으로 들어서면 방향을 정할 수 있어서 좋지요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혼란과 시련을 겪으며 마음 헤매었던지
습관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펼쳐보면 지나온 이동경로가 손금에 훤히 드러나지요
복잡하고 까다로웠던 손금 위에서도 가야 할 방향을 알 수 있어서 좋아요
어느새 당신은 커다란 병풍을 내 앞에 펼쳐놓고 무한공간, 한없이 넓은 길을 나에게 열어주지요
메아리가 우렁차게 나에게 울려퍼져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려원 시인 / 하얀토끼를 따라가다보면
토끼를 따라가는 건 하얀토끼가 빨간 눈을 가졌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숲속에서는
아무리 눈이 충혈돼도 누구 하나 빨간 눈을 들여다보며 이상하다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아서 좋아요
눈물을 왈칵 쏟아내기 좋은 나이 저만치 노을이 깊어져요
하얀토끼 발자국을 하얗게 따라가다 보면 노을에 물든 것 같이 빨간 눈을 가진 토끼를 만날 수 있지요
토끼는 충혈된 눈으로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다보고 있습니다
토끼의 눈동자 깊은 곳에 온통 붉은 저녁노을이 깃들어 새끼를 쳐요
노을의 걸음마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동굴에 이르게 되지요
동굴은 노을을 위한 집 저녁노을에게도 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동굴 속에 하얀 토끼털이 자라나 순결한 어둠은 어느새 알을 품은 새들의 둥지처럼 포근해져요
하얀 것들은 붉은 눈으로 바라다 본 세상처럼 투명해서 기뻐요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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