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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석진 시인 / 사계절 커피
커피에 사계절을 로스팅하여 드립커피로 맛을 본다면
아마도 봄커피는 설레임의 맛이 아닐까 여름커피는 속삭임
가을커피는 허전함일 것이고 그리고 겨울커피는 아쉬움일 것이다
사계절 커피는 사랑과 이별의 신맛 단맛 쓴맛이 녹아든 눈물 같은 더치커피 진한 그리움의 맛일 것이다.
공석진 시인 /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안다
죽도록 아파 본 사람은 안다 늘상 상처를 받아 왔슴으로
힘들 때마다 꾹꾹 묻어 두어 깊은 곳에서 끄집어내기까지
관성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망연히 바라볼 수밖에 없슴을
끝까지 참아 본 사람은 안다 절대로 상념에 잠기지 않고
간단히 말문을 닫아 버리고 보지 않을 것으로 체념할 때
제아무리 사무치는 고통도 가장 편안하게 되는 것임을
처절하게 외로운 사람은 안다 지구상에서 나 혼자 뿐이라는
절대고독을 극복한다는 것 어차피 완전하지 못한 존재
무기력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부터인 것임을
고통만큼 분명한 고독은 없다 굴레를 벗으려 애쓰는 것보다
평생 담아 둔 아픔을 과감히 남김없이 비워내 단념하는 것
결국 그것이 인연의 끈을 놓는 우리의 최후의 모습인 것임을 그 고독을 아는 사람은 안다
공석진 시인 /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사랑은 동사입니다 실행하지 않는 사랑이 무슨 소용입니까 가진 것 모두 남김없이 비워내 따뜻이 안아주어 허물조차 감싸는 사랑은 동사입니다 사랑은 조사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듯 나의 존재를 숨기어 타인을 도와 예쁜 사랑을 지켜주는 사랑은 조사입니다 사랑은 감탄사입니다 비난에 익숙한 우리들 사소한 기쁨에도 환한 미소로 반기어 뜨거운 가슴으로 맞장구치는 사랑은 감탄사입니다 사랑은 형용사입니다 세상에 던져진 보잘것없는 암석을 찬란한 보석으로 다듬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더없이 소중한 사랑은 형용사입니다 사랑은 접미사입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나 머리보다는 꼬리가 되어 균형을 잡아주어 사랑을 완성하는 사랑은 접미사입니다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시집 <흐린 날이 난 좋다>에서
공석진 시인 / 긴급체포
당신을 체포합니다. 당신은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온통 내 마음을 빼앗아갔고 당신은 허락 없이 내 마음 속 깊이 무단 침입하였으며 당신이 내게 남겨준 사랑의 편린으로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였고 당신이 그리워 긴 밤을 꼬박 새운 내 몸을 상해하였으며 당신은 타인 앞에서 당당하던 내 위상을 초라하게 추락시켰고 당신은 혼미케하는 미소로 당신 없이는 살아갈 의미 없는 평생 헤어날 수 없는 중독을 시켰으며 결정적으로 당신의 심연한 눈동자에 나를 익사시킨 살인죄로 당신을 긴급체포합니다. 당신은 지금 이순간부터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긴급 체포합니다.
공석진 시인 / 나는 월정리 해변 그 카페에 다시 왔다
드문드문 길섶에 핀 유채꽃길을 지나 서너 평 남짓한 책방에서 서른을 몇 일 앞두고 심야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된 나와 동갑인 시인의 시집 한 권을 거금 2만원에 구입하고 구들에 자리잡듯 빈집을 탐색하려는데 여섯 시까지라고 고지하는 쥔장의 소심한 일갈은 풀무질하듯 밖으로 내몰았다 아, 그놈의 채근하는 풀무질이 문제인듯 바람에 떨어진 동백꽃들이 돌담 아래 흩어져 있었고 꽃들이 낙하했던 시간을 거꾸로 회상하며 나 또한 거슬러 올라가는 동안 빨래 건조기에서 오래 놔둔 사뭇 구겨진 손수건처럼 참혹한 광경이 볼썽 사나웠다 그 누구보다 동백만큼 붉지 않았느냐 얼굴 벌개지도록 추억하는 자위가 비상식으로 무장한 세상 속에서 쓸쓸했던 적선 같은 쉼표일 뿐 애당초 상관이 없던 바람은 해안 바람개비를 정지시켰으며 나는 시 한 편 쓰려고 월정리 그 카페에 다시 왔다 치유의 근거가 되었던 토끼MOON 월정의 달은 초승이었으나 휘황찬란한 달들이 천정에 박혀 안수 기도처럼 정수리에 쏟아졌다 수위(水位)가 줄어드는 커피잔을 바라보며 오늘밤의 불면은 축복이다 체액이 점점 줄어 응축되어 제주 섬 내 구석진 곳에 자처한 폐인을 아름답게 미화시킬 수 있는가 이 도피의 시간을 마음껏 즐겨라 마지막 물고기가 잡힌 뒤에야 촘촘하게 옭아맸던 그물질이 멈추어지겠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에 땔감으로 쓰이는 지폐 같이 평가 절하되는 나의 생애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형도의 시는 공석진 문학관 정중앙에 자리잡고 별똥별처럼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것이다
공석진 시인 / 냉커피
방심하는 마음 냉정해지려 얼음 빼곡 쌀쌀
냉랭해진 마음 황토빛 녹아 마음 자꾸 콩콩
공석진 시인 / 제주도 돌담
제주도 돌담이 무너지지 않은 건 커다란 구멍이 있어 큰 바람도 지나가기 때문
때때로 아프던 가슴 뻥 뚫린 상처는 또 다시 다가올 공격쯤 견디고 살아가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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