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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임 시인 / 동화가 있는 풍경
아기나무가 엄마나무에게 물었답니다 나는 왜 새나 바람이나 구름이나 햇살이나 물이 될 수 없나요 너는 날마다 키가 크는 감옥이야 아무나 그런 감옥이 될 수는 없단다 그럼, 키가 커서 난 무엇이 되는 거죠? 넌 의자도 될 수 있고, 조각품도 될 수 있단다 하지만 난 어디에든 갈 수가 없잖아요 나중에 그런 것들이 되어보렴 오랫동안 한 곳에 생각의 뿌리를 깊이 내리면 세상의 무수한 갈랫길들이 환하게 보인단다, 그때에는 넌 어디에나 갈 수 있을거야
이경임 시인 / 고해성사
사랑한다고 당신께 말할 때 나는 거대한 산을 옮기고 있는 달팽이 같습니다. 나는 화려하고 강력한 날개를 지닌 달팽이 같습니다. 태양의 둘레를 도는 별보다 더 멀리에서 혹은 더 가까이에서 태양의 둘레를 도는 별들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혹은 더 느리게 신이라 부르고 싶은 것들을 찾아 혹은 사랑이라 부르고 싶은 것들을 찾아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달팽이 같습니다. 어두운 허공 속에서 수다스런 침묵을 조각하는 달팽이 같습니다. 줄타기를 즐기는 광대의 천성을 지녔기에 줄이 망가져도 줄에서 떨어져도 신이라 불렀던 것들 속에 혹은 사랑이라 불렀던 것들 속에 나는 매달려 있습니다.
이경임 시인 / 어느 봄날, 백목련 나무 밑에서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의지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온기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향기
겨우내 텅 비어있던 나무가 붐빈다
하얀 손바닥 같은 목련꽃에 담긴 강박관념! 시들어 흉하게 땅바닥에 뒹굴지라도 봄이 오면 또 허공에서 꽃을 피울 것이다
하얀 손들을 모아 또 기도를 드릴 것이다 응답이 없어도!
이경임 시인 / 부재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이 떠나갔다. 등을 보이는 건 간절함을 버리는 일 빈방에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헤아리는 일
벽지의 꽃무늬가 새삼 눈에 들어오고 기우뚱한 식탁의 다리가 그때서야 보인다 어째서 곁에 남은 것들이 이제 겨우 보이는지
선반에 얹힌 그릇과 어지러이 놓인 신발들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싹을 틔우는 화분 이 모든 마음 떠난 흔적들이 혹독한 감금이다
겨울이 오고 있는데 두통처럼 오고 있는데 겨울잠 같은 기다림이 만년설로 쌓여 남겨진 나를 지운다 먼 곳의 어둠도 잠재우며
-《시조시학》2023. 봄호
이경임 시인 / 잡담, 양파가 틔우는
싹을 틔운 양파의 내부는 허술하다 희망이 서둘러 삶을 가볍게 하듯 쉽게 상한다 내부를 망가뜨린 식물만이 싹을 틔운다 푸른 혀처럼 날름거리는 싹은 잡담처럼 싱싱하다 잡담이 없는 삶은 창백하다 언제나 딱딱한 내부에 갇혀 있다
아, 산다는 것은 망가지는 것이다. 가벼워지는 것이다. 슬프도록 무성해지는 것이다
이경임 시인 / 음악
세상에서 아름다운 음악은 망가진 것들에게서 나오네 몸 속에 구멍 뚫린 피리나 철사줄로 꽁꽁 묶인 첼로나, 하프나 속에 바람만 잔뜩 든 북이나 비비 꼬인 호론이나 잎새도, 뿌리도 잘린 채 분칠, 먹칠한 토막뼈투성이 피아노 실은 모두 망가진 것들이네 하면, 나는 아직도 너무 견고하단 말인가?
이경임 시인 / 믿음직한 독서
때로는 이름만 보고서도 값을 치르는 믿음직한 시인이 있다 그런 시집이 있다
고요한 음역을 가져 더 아름다운 까닭이다
늦은 밤 잠 못 들고 일어나 앉은 시각 연애편지 뒤적이듯 책장을 펼쳐 든다
예전에, 누구를 그토록 사랑한 적 있던가
그 사랑에 상처 입어 흐려지는 행간으로 환하게 건너오던 따뜻한 문장들
한없이 어둡고 깊은 밤을 견디는 기도였다
-3인 시조집 《청라》 2021.5. 책만드는 집
이경임 시인 / 꽃이 피다
간밤의 꿈결에 다녀간 이를 생각한다
거의 다 걸어온 한 생애의 젖은 자리
홀연히 사라지는 꿈조차 아프게 멍울지는데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처가 떠도는 건가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서있던 물상
내 안에 차마 들이지 못한 내가 아닌지
어쩌면 오래도록 문밖을 서성이며
내 잠을 두드리다 돌아서는 내가 아닌지
이 슬픔 잠의 기원이 붉은 아침이다
-3인 시조집 《청라》 2021.5. 책만드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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