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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안은숙 시인 / 옮겨가는 기억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5.
안은숙 시인 / 옮겨가는 기억

안은숙 시인 / 옮겨가는 기억

 

 

느티나무 아래, 아이와 놀았다

옮겨가는 것은 몇 평 햇볕이 아니라 그늘이었다

뒤뚱거리는 보폭으로 느티나무는

더운 여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때의 기억은 울었고

떠올린 기억은 웃는다

기억은 넘어질 수도 있고 울 수도 있다

꽃들이 무릎을 깨고 붉은색을 흘릴 수도 있다

 

누군가 부른다면 이미 나를 지나친 이름

부를 때마다 뒤돌아 갈 수 없기에

기억은 그쯤에 있는 것이다

 

엄마의 기억은 아이의 걸음에 맞추어 어려지고,

아이의 몸은 커 간다

큰 나무에서 옮겨가던 여름

닮는다는 것은 서로 멀어지려 하기 때문이다

오래 기억하려 하기 때문이다

 

낯선 계절을 너에게 줄게

낯익은 엄마를 너에게 줄게

오전은 편모슬하 오후는 편부슬하의 느티나무 아래에서

낯모르는 너의 아이와 놀아주렴

 

아이의 등으로 자라는 엄마의 시절

그 기억들

천천히 굽어질 관계들

기억은 옮겨가는 것으로 퇴화하는 것이다

 


 

안은숙 시인 / 고한

그는 날짜 없는 기한을 맡기고 짧은 임시를 빌려 왔다

꽤 묵직한 이자로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거라 했다

그사이 가벼운 꽃잎은 떨어지고, 작고 새까만 씨앗들이 열릴지도 몰라

어떤 식물의 씨앗은 다 부채가 된다

문을 열고 왔다가 문을 닫고 가는 곳,

혹은 문을 열려고 왔다가 닫혀서 가는 곳

모든 전성기는

그 지하부터 말라가

갱도의 입구를 물어보면

검은 폐광의 바람이 몰려나오지

숫자를 믿으며

점점 숫자가 되어가는 그는

희박한 확률을 쫓는 폐공 같았다

부피가 큰 것부터 고리가 있는 것들

똑딱이는 것과 기념일까지

굴욕을 맡기고 굴욕을 헐어 갔다

아무도 찾지 않는 진폐증의 도시에서 기침 가득한 생을 마지막으로 버릴지도 몰라

잠이 오질 않았다

탕진의 도시는 풀썩,

꺼질 것 같은 불빛으로 서 있다

제 몸의 무게를 다 잃고 나면, 이 깊은 내륙의 고원으로 남아 원주민이 되어갈까

그 어떤 곳으로도

떠오를 수 없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무게가 된다는 것

물건들은 모두 단단히 잠겨 있었다.

​​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중에서

 

 


 

 

안은숙 시인 / 허공도 빨갛게 익는다

 제 몸을 가리고 사는 허공도 가끔 바람의 줄기를 잡아 제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 허공도 함께 흔들립니다. 허공에도 틈은 있어 품으로 뛰어드는 것들을 모두 받아줍니다. 그 크기만큼 허공은 제 품을 넓힙니다. 가을과 함께 익어가는 허공, 늘어만 가는 저 수많은 발자국을 보세요. 삼켰던 것들을 허공이 모두 뱉어냅니다. 단풍이 스쳐 간 자리에 붉은 발자국들이 나 있습니다.

​​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중에서

 

 


 

 

안은숙 시인 / 물의 책

 

 

 너와 거닐던 공원을 나 혼자 찾아갔을 땐, 펼쳐진 책은 조락의 계절을 서술하고 있었다 여름은 다 거두고 어느새 가을로 새겨놓은 책, 한바탕 손으로 휘- 저으면 지느러미를 단 문장들이 뿔뿔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릎 근처까지 차오르거나

 빠져서 발을 적실 수 있는 문장이

 어디에 또 있을까

 겨울이 되기 전 다시 정렬될, 붉었다 말라 가는 문장들이 와글거리는 한 권의 물의 책 널 닮은 꼬리 긴 문장 하나 흩트려 놓고 널 지웠다가도 가만, 그래도 네가 한 번쯤 와주길 기다렸는데…

 

-계간 『시와 반시』 2024년 겨울호 발표

 

 


 

 

안은숙 시인 / 부르봉가 빵집

 

 

나는 오늘도 하얀 모자를 쓰고 빵 굽기를 하죠

구수하게 익어가는 하루에

콧노래를 불러요

지루한 오후가 될 수 없어요

나는 빵을 굽고 있죠

빵 굽기는 나의 유일하고도 감칠맛 나는 취미

오븐이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폭음이 뛰어들었어요

반죽 묻은 손은 그만 빵틀을 떨어뜨렸죠

비명이 목울대에 갇히는 순간

기억도 정지되었죠

뿌연 먼지가 입구를 막았어요

신이 베수비오산 하나를 반죽하는 동안

붉은 기운이 아이들을 덮쳤고

그 위로 비명이 굳어갔죠

그때 입을 벌린 오븐도 영영 입을 다물지는 못했어요

묻힌 것은 언젠가는 드러나요

석고액을 부어요

코와 입술, 이마와 광대뼈, 움푹 파인 두 눈이 서서히 보일 거예요

놀란 얼굴 뒤에는 빵을 굽던 흥얼거리는 표정, 콧노래도 있을 거예요

지금도 하품 중인 오븐,

밀가루 날리듯

나는 부르봉가로 날아가고 싶어

지금 폼페이의 거리에 누군가 빵을 굽고 있을까요.

 

-계간 『유심』 2023년 겨울호 발표

 

 


 

 

안은숙 시인 / 발와술

 

 

-

허리를 구부린 사람은

굽혀진 안쪽에 궁리가 있다

 

약자의 굴욕은 힘이 세다

 

왜 활은 당겼다 놓았을 뿐인데 날아갈까

그렇다면 새들은 다 시위하는 것일까

 

구부리고 자는 사람의 품엔 외로운 꿈이 있다

동종의 그림자가 있다

측은과 욕망이 함께 있다

 

내뱉는 말에

자신의 원심력이 있다는 것

 

반쪽만 숨는 방식으로 현혹하는

발와술撥窩術

 

허리를 구부리고 마음을 달래주는

밝은 애인들의 친밀한 궁리들로

누군가는 귀가 먹고

속수무책이 된다

 

계간 『시사사』 2023년 봄호 발표

 

 


 

 

안은숙 시인 / 슴베2

-나뭇가지들의 난도亂刀는 제 곁에 붉은 피를 두지 않는다

 

 

마치 뭉친 결을 풀 듯

겨울 혹한이 모여드는 계절이 돌아왔다

 

겨울은

나무들이 잠시 미뤄두었던

복수의 계절이 아닐까

 

일제히 나무들이

차가운 날들을 세우고 있다

 

여름이 오면

푸른 잎을 키우는

검의 날이 푸르고,

그 날렵한 칼날에

푸른 잎들을 경작한다

 

지난봄

슴베에서 움튼 나뭇가지 하나는

단도처럼 짧았다

 

슴베에서 칼날 하나가 연금되는

시간이 어수선하다

 

한겨울

웅웅거리는 소리는

나무의 매듭에서 나오는 소리다

 

그러나

나뭇가지들의 난도는

제 곁에 붉은 피를 두지 않는다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달을 쏘다, 2022

 

 


 

 

안은숙 시인 / 눌려있는 용수철은 온순하다

 

 

용수철은 식물 혹은 동물

그것은 혁명도 아닌 목적의 억제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있다가 튀어 오르면

어디로 날아가 버릴지 모른다

 

살살 달래어보는 한낮

말보다 글로 다스려야 할 때

나는 볼펜을 꺼내어 볼펜 끝을 누른다

 

말에 숨어있거나 구불거리는 꾀가 있다

어디로 향하게 될지 모른다

저 알 수 없는 방향성

튀어 오를 때마다

살갗의 털이 곤두선다

 

눌려있는 용수철은 참으로 온순하다

 

비 오는 날

튀어 오르는 빗방울을 본 적 있다

용수철 위로 피어나는 꽃들

저 무한한 탄성 끝에

범람하는

흙탕물이 있었다

 

—시집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달을 쏘다, 2022

 

 


 

 

안은숙 시인 / 염하(炎夏)

 

 

봉투 속에 들어있는 딸기나무에는

개미의 첨부언이 바글거렸다

 

오솔길은

산과 산이 한 번쯤 접혔던 곳

 

아마도 짐승이나

팔을 긁힌 여름이 만들어놓은 곳

 

한적한 맹렬

지리멸렬했던 순간

엉킨 딸기나무에

빨간 담배 불빛이 매달려 있다

 

길옆까지 나와 있는

딸기나무는

잔가시를 내밀고

지나가는 종아리를 따라가려 한다

 

마을로부터

저녁이 올라온다

오솔길은

서둘러 뛰어 내려가야 한다

 

검붉은 딸기나무 옆을 지나가는 일은

잔털 곤두서는 일

 

누가 또 이 진창에 빠질까

고양이도 숨어버린다.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3년 여름호 발표

 

 


 

 

안은숙 시인 / 바퀴의 로드킬

 

 

시속으로 달리는 한여름 길

이글이글 잔털이 타오르고 있다

난폭하게 달려든 속도에 치인

질주의 잔해

마지막 굉음을 타고 공기는 터진다

 

평생 공기만 출렁이던

온순한 몸통

핏자국도 없다

널브러진 잔해 위로

공기의 등을 타고 오르는

노을이 보인다

 

공복은 얼마나 위태로운 폭발인가

 

공복이 뜯어먹은

바퀴의 무늬

제 바퀴에 치인 바퀴가

스키드마크 속으로 사라진다

 

쌩쌩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검은 꼬리 같은 자국이 흔들린다

급하게 주저한 주저흔을 비껴가는

차의 곡선

 

바닥을 회전해야 사는 운명

혹은 운행이

내장도 없이 바닥에 흩어졌다

비틀거리다 쓸리며

자신의 중량을 속수무책 내려놓고

이동의 하중을 버틴다

 

비천하게 구를수록

못은 박히고

움푹 파인 구덩이와 방지턱

비포장 흙길을 먹어 치우지만

터질 듯 배부른 바퀴,

막상 터지고 보니

흔적 없는

공복이다

 

다만 한 마리의 굉음과

사나운 냄새만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계간 『상징학연구소』 2023년 여름호 발표

 

 


 

안은숙 시인

1965년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2015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2017년 《경남신문 신춘문예》수필 당선.  시집 『지나간 월요일쯤의 날씨입니다』 『정오에게 레이스 달아주기』. 2017년 경기문화재단 전문예술창작 문학 분야 선정 작가. 제1회 시산맥 시문학상, 제7회 동주문학상 수상. 공저 『언어의 시, 시의 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