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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주 시인 / 사막이라는 한때
모래처럼 울 수 있을까 색목인처럼 모래 속에 미끄러져 잠들 수 있을까 흰 성벽처럼 모래로 돌아오는 낙타를 사랑할 수 있을까
허물어짐과 반대로 쌓고 싶어 모래를 키웠다 쉽게 허물어지고 쉽게 달아날 수 있다면 무서움도 무거움도 없을 것이다 마음이 키운 모래는 늘 발에 밟히고 눈을 찔렀다 가려운 게 모래만은 아닐 텐데 간혹 애인의 책을 베고 잠들면 몹시 가려운 밤이었고 그 밤 사막에서 모래폭풍이 일었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모래라고 말했는데 영혼이 눈에 밟혀 영혼 그대로의 흔적이 모래가 될 거라는 예감이다
사막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소식을 띄운다 한 선지자의 주머니에 실리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그가 한 줌 꺼내어 흡뿌리면 모래 같은 생이었다고 낙타를 사랑하는 흰 성벽에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반연간 『포엠피플』 (2024년 겨울호)
황은주 시인 / 양면거울
뒷면을 봅시다 자몽으로 물들인 머리칼이 있군요 거울을 돌립니다 앞면은 어떻습니까 얼굴과 목이 있습니까 자두가 있습니다 환각입니다 마주하면 서로가 얼마나 친절해지는지
얼굴을 쓰다듬으려는데 방향이 없습니다 방향을 버립니다 안아주려는데 몸이 없습니다 몸을 무너뜨립니다 당신이 깨집니다 다급히 거울을 움켜줍니다 목을 줍는 당신은 누구인지요?
햇빛을 모읍니다 거울을 빙글 돌리면 거울이 있고 거울을 가리면 손으로 몰려드는 빛 거울이 거울을 불태웁니다 거울로 거울의 불을 끕니다 마주하면 탐욕은 뜨거워지고
자두를 세면 자몽이 나옵니다 앞면입니다 자몽을 세면 자두가 나옵니다 앞면입니다 뒷면은 뜨겁습니다 거울을 세면 거울 속에서 불타는 눈 철로는 거울이 되려고 더 친절해지고
황은주 시인 / 장소의 불문율 -폐가
눈 한 번 깜박거리지 않고 떠 있는 인공위성 어떤 정신이기에 명아주 열매처럼 저리 골똘한가 육신이 떠나간 자리에 다른 행성에서 떠돌던 식물성 포자들이 날아든다 그가 수집하는 기울기들의 목록 플라스틱 향기는 내내 시들지 않고 대나무가 초가지붕을 뚫고 치솟았던 오래된 풍경 하나 꼬깃꼬깃 접힌 사지를 풀고 현생과 포개진다 육신이 어디선가 잘 썩어가는 동안 기계음 가득한 허공에서 정신만 홀로 남아 빛나는 집 한 채
ㅡ 시집 《히스테리 미스터리》에서
황은주 시인 / 우산
어제 집을 나온 사람들에겐 우산이 없다
발사되듯 비는 오고 테라스마다 접시 안테나처럼 뒤집어 놓은 우산 속으로 빗물이 고인다
우산들을 창문에 걸어 놓고
어제 집을 나온 사람들이 아직도 걸어간다
접은 우산처럼 언니가 걸어간다 빗속에서
빛 속으로, 남자의 갈비뼈를 만져 본 열다섯 살 뜨개질을 하는 언니의 손목을 훔쳐 보았지 문틈으로 바늘 같은 빛이 보이고 소파에 앉아 언니는 뜨개질로 우산을 뜨고 있었지
손목에서 손이 펼쳐진다 우산처럼 언니의 손목에서 손이 펼쳐진다
접힌다 뼈를 부드럽게 숨긴 우산의 살들은 부러질 줄 몰라 펼쳐지지 않는다. 언니의 애인을 보고 언니의 애인은 빗물처럼 미끄럽고 언니는 소파에 앉아 뜨개질을 한다 찢어진 콘돔처럼 속이 훤히 보이는 우산을 뜨고 비는 오지 않고
접어놓은 우산에서 언니의 손이 펴진다
접시처럼 접시처럼
황은주 시인 / 발칙한 껍질
말랑한 터널이 있다. 귤의 껍질이거나 검은 고양이
야옹, 빨려들어오다 뚝뚝 떨어지는 빛의 지붕들 재빠르게 낚아챈다 도피자의 흐린 얼굴 지붕을 건너뛰며 십 분마다 한 번씩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고양이를 터널의 눈이라고 믿기 터널의 목에 귤을 달아주기
귤을 터뜨리면 고양이는 달콤하지 달콤한 그림자 극장을 만들며 반역을 꿈꾼다 껍질을 뒤집으면 안은 밖 이라는 것 터널은 날아가는 스카프이거나 목이 잘린 투구의 뿔 어쩌면 욕실 안의 고양이
귤껍질을 통과하기 고양이처럼 껍질 안에 갇히기
고양이는 귤껍질을 혐오해 지금은 터널과 고양이를 욕실 안에 던져 넣을 때 형광눈알 하나를 뽑고
고양이에게 귤을 던진다 물렁하거나 살을 찢거나
황은주 시인 / 첫 발작
우리들의 접시 사이는 달걀 프라이로 미끌거리고
이번 생은 프라이로 시작하는군요 끓어오르는 레드, 레드, 레드홀을 지나는 중입니다 욕조가 뱀처럼 뒤틀려 있습니다 당신이 다녀간 흔적입니다 조문의 향기입니다 귓불에 장미향을 새긴다는 건 불안해서 붉어지려는 것 더 붉어지려고 뉴욕레드벨벳케익을 삽니다 붉어지려는데 불자동차가 지나가는군요 솟구칩니다 불면과 사과처럼 가볍게 탁자는 뒤집힙니다 발의 발작처럼 왜곡과 술이 있습니다 날아갑니다 최신 망원경을 가졌다면 백 년 전에 발이 뒤엉킨 블랙홀을 기억했을 텐데요 망원경과 망각 사이 징검다리가 있고 징검다리를 밟으며 뜨거운 달걀 프라이를 건너갑니다 자정엔 커튼을 태울 것입니다 정오엔 해바라기를 짓밟을 것입니다 해바라기 안에는 만 개의 방이 있어서 여름은 방의 발작입니다
만 번의 발작인데요
이번 생의 발작은 아직 반짝이지 않았습니다
황은주 시인 / 포도밭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포도밭을 만들기 위해 광장을 부수는 사람들 기타처럼 삽을 둘러매고 한 사람 뒤에 다음 사람 리듬인가요 리듬일지도 기타처럼 다음 사람을 둘러매고 줄지어 가는 더 많은 사람들 로브그리 예, 우리는 저물도록 사랑을 했습니다 무너지는 문과 흩어지는 먼지 속에서 로브그리예, 어서 와요 포도를 따 요 이곳은 곧 포도로 가득해질 테니 망설이지 말고 당신의 포도를 수확해 가요 그러면 메아리일까요 메아리 일지도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저문 뒤에도 저물도록 사랑을 했습니다, 가령 들키고 싶은 밀회를 위해, 로브그리예, 포도를 짓밟아요 보랏빛 피가 문턱을 넘어 포도밭으로 일어서도록 무너지는 문들과 흩어지는 먼지 몰아치는 눈발과 계속되는 이야기 로브그리예, 사건은요? 포도밭의 포도는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타처럼 많은 사람들을 둘러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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