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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영 시인 / 직사각형의 흙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 사람의 배경 직사각형의 구덩이 앞에서 희미하게 기다리고 있다 검은 얼굴 검은 정장을 하고 구덩이를 파던 삽을 흙더미 위에 내던지고 노란 장미를 한 손에 들고 커다란 그늘막 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 태양은 자꾸만 움직이고 그늘은 줄어들고 그림자들은 조금씩 자리를 이동한다 햇빛이 노랗게 구덩이 속을 비춘다 하얀 국화 꽃잎이 그녀를 향해 떨어지고 있다 직사각형의 흙이 소리를 내며 말라가고 있다 검은 리무진을 따라 버스를 탄 사람들 선글라스를 쓴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고 있다 구덩이를 파던 포클레인 버킷이 흙더미 옆에서 기다리고 있다 슬픔으로 하나가 된 원수와 친지와 친구와 이웃과 원수가
정혜영 시인 / 막대그래프
벨이 울리고 죽은 엄마의 목소리가 배달됩니다 이제야 돌아왔네, 죽은 엄마는 자기 방으로 가려다 돌아서서 고장 난 온도계를 보여줍니다 거울 속 시클라멘이 조용히 시들어갑니다
나는 엄마 몰래 돌아서서 목울대에 빨간 막대 줄을 하나 꽃피웁니다 자, 봐요 이 줄에 목을 매달까요
정혜영 시인 / 어둠의 빛살을 돌리다
오늘, 경인년(庚寅年)의 새 아침, 새로운 태양이 힘차게 떠오른다 이 태양은 지난 밤 추위에 떨며 때를 기다려 숨죽이고 있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 속에 있었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오늘 이 아침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태양, 그 태양이 낡지도 않고 다시 더 뜨겁게 타오르며 솟구쳐 올라온다 빛나 세상을 환하게 물들인다
경인년은 빼어난 지혜와 늠름한 기품의 호랑이 해 육십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白虎)의 해 신성하고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은 맹수를 지킴이로, 친구로 바꾸었다 그것은 어둠을 빛으로 돌린 일
어떤 어둠도 게양(揭揚)되지 않았고 차갑게 얼어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날이 가면 달이 차듯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난다 당신과 나의 가슴 속에서, 희망이 또 하나,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른다
정혜영 시인 / 백야
별, 꽃, 빛, 첫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한 글자에 담긴 무한, 꽃은 활짝 죽어가는 목소리의 다른 이름, 아름다움에는 제물이 필요해 겨울밤은 푸르고 편도선이 부은 네 손은 차갑고 파열음으로 서쪽을 견딘다
백야의 하늘 아래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이야기들이 미열로 나를 지나간다 한 사람의 통증과 상처가 자라나서 잎맥이 가지를 뻗어나가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골목길은 구부정하고 다정해서 발목이 휘청거린다
발아래 어둠이 다 뭉개져서 아무것도 없는데도 붉은 벽돌 담장을 넘어가는 저녁의 옷자락들, 버림받은 영혼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아 변방을 서성이고 하늘의 별들은 흔들려서 반짝이고 그러나 그래서 밤도 낮도 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으로 결국은 미친 사람들 몇이 제 목숨을 스스로 거두듯이 백야의 별 하나, 눈먼 하늘에서 폭발하며 사라진다 캄캄한 대낮을 버텨주는 빛, 어쩌자고 맨정신으로 이렇게 그 빛을 마주하며
계간 『예술가』 2022년 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지붕 위의 바다
네모난 창문 네모난 뷰파인더, 그 방에 갇혀 있다 내 안에서 네모난 나무가 자라난다
그런 게 어딨어, 왜, 네가 그걸 못 봐서 그렇지
느티나무 한 그루 뿌리를 드러내며 저녁으로 기울어진다 누가 여기 싹둑, 큰 톱을 들이댄 건지
서쪽은 어둠으로 물들어가길 기다리고 우리는 사랑일까 상처를 키우면서 개와 늑대의 시간이 멈춰있다
손이 닿지 않는 허공에서 집을 짓는 새들 우린,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닿을 수 없는 비명에 닿으려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를 서성이고 있다
누군가 그어놓은 한 줄의 수평선 지붕 위의 바다는 한꺼번에 쏟아지려고 골똘하고 헐벗은 나무뿌리 사이로 지나가는 시간, 가파른 골목을 쏘다니다가 날카로운 휘파람으로 돌아온다
들리니, 보이니
수령을 알 수 없는 언덕, 속마음을 알 수 없는 느티나무 그래서 제 속을 열어 보여주는 걸까 내가 보지 못한 언덕의 반쪽은 어디론가 날아가서 어느 산맥의 등뼈가 되었는지 수평선에 갇힌 흰 갈매기들, 모래밭에 묻힌 두 발을 가볍게 들어올린다
네모난 창문 너머 색색의 슬레이트 지붕들 주황은 날아가서 햇살이 되고 파랑은 멀어져서 쨍한 하늘이 되고
월간 『현대시』 2022년 7월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서울남부구치소
벚꽃이 피고 있다 벚꽃이 지고 있다
이펜하우스아파트 상공으로 대한항공 비행기가 천천히 날아간다 구치소 앞의 현수막이 봄바람에 흔들리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현수막 아래로 걸어 들어오는 젊은 여자의 청바지며 해맑은 낯빛
457, 한 사람이 숫자로 호명되고 자신의 죄명조차 모르는 한 젊은이 면회시간을 기다리는 그의 발걸음은 초침과 분침 사이를 숨 가쁘게 오간다 그의 옷차림은 아직 겨울이고
구치소 상공으로 장난감 같은 비행기가 햇빛 속을 날아간다 시시각각 사라지는 푸른 하늘빛, 457의 손끝이 허우적거린다
구치소 상공을 지나가는 탑승객은 제 마음에 감옥 한 채 지닌 채 창밖을 내다보고
457과 비행기의 13A, 구치소 앞마당의 나, 세 사람이 하나의 풍경 안에 갇혀 있다
내 마음의 감옥을 열면 거기 앉아있는 얼굴, 낯익은 듯 낯선 수의를 입고 있다
나는 나를 의심하고, 눈앞에 솟은 아파트의 창틀을 의심하고, 오늘처럼 눈부신 봄날을 의심하고, 룸밀러에 비친 나의 눈을 의심하고
노란 민들레가 잡초들 사이에서 고개를 들고 있다 누군가의 기억에서 떨어진 단추처럼 집 나온 치와와가 노란 향기에 코를 박고 있다
계간 『예술가』 2022년 겨울호 발표
정혜영 시인 / 날아라, 비양도
오늘은 배가 뜨지 않는다 보였다 안보였다 너였다 네가 아니었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 흐린 날에 닿는 곳이 이어도라고 한다
소문 뒤에서 섬은 파랗고 바다 밑은 가깝다
바닥이 보여도 바다는 바다, 네가 눈앞에 보여도 너는 너
흐린 날의 나를 어디론가 멀리 보내면 파도 뒤에서 섬이 자라난다
검은 바위들이 파도를 남기고 사라진다 날이 흐리면 소문 뒤에 숨는 너였다 너는 어느 대륙에서 날아온 기억, 이미 이 지상에서 잊혀진 것들을 불러와서 한 사흘 세상에서 잊혀지고 싶다 맑은 날 내가 본 것이 너였을까 발밑에 쌓이는 지층을 따라가다가 피투성이 검은 갈비뼈를 만났다 흔들리는 해안선을 따라 물미역이 널브러져 말라가고 있다
계간 『애지』 2022년 여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소년의 위는 열두 개
엄마가 던진 말들이 돌멩이거나 롤케잌이거나 남의 나라 낯선 식탁에서 밥을 먹어요
토하고 먹고 거부하고 열두 개의 위를 길들여요 길들지 않을 때까지
말은 총이기도 하고 칼이기도 하고
총과 칼은 친구들과 전쟁놀이할 때 필요해요
종종 한꺼번에 훌쩍
엄마가 던진 돌멩이에 죽은 척 흐트러지는 자음과 모음들
말들이 달아나고 말들이 사라지고
밤마다 낭떠러지에서 뛰어내리는 대낮의 꿈
엄마가 던진 돌멩이들이 자라나서 바위가 되고 절벽이 되고
저는 괜찮아요, 저는
홀로 먹는 밥, 홀로 듣는 환청, 위장이 열두 개라니까요
정혜영 시인 / 어둠의 빛살을 돌리다
오늘, 경인년(庚寅年)의 새 아침, 새로운 태양이 힘차게 떠오른다 이 태양은 지난 밤 추위에 떨며 때를 기다려 숨죽이고 있었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 속에 있었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부터 오늘 이 아침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 태양, 그 태양이 낡지도 않고 다시 더 뜨겁게 타오르며 솟구쳐 올라온다 빛나 세상을 환하게 물들인다
경인년은 빼어난 지혜와 늠름한 기품의 호랑이 해 육십년 만에 돌아온다는 백호(白虎)의 해 신성하고 지혜로운 우리 선조들은 맹수를 지킴이로, 친구로 바꾸었다 그것은 어둠을 빛으로 돌린 일
어떤 어둠도 게양(揭揚)되지 않았고 차갑게 얼어붙은 것은 어디에도 없다 날이 가면 달이 차듯 어둠 속에서 빛이 태어난다 당신과 나의 가슴 속에서, 희망이 또 하나, 새로운 태양이 솟아오른다
정혜영 시인 / 저녁의 경사
1. 경사면은 옳다 모든 것이 깃들어 있다
순서 없는 저녁의 문장이 다투어 피어나고
울트라마린이 서쪽을 버티고 있다
2, 멀리 누군가를 부르는 희미한 밥 냄새
3, 놀빛이 아름다운 것은 무언가 감추는 것이 있어서다
주홍은 어둠으로 들어가는 유혹의 입구
환한 시간의 뼈다귀,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낯선 음악
찬 바람을 흔들어서 빈 나뭇가지를 보여준다
4, 창문 너머 키 큰 플라타너스 어깨 위를 흐르면서 무너지는 강
국경을 향해 어둠을 빗질하는 푸른 서쪽의 리듬
어둠에 별을 매달고 이름을 불러준다
너 나 우리 해뜨기 전
5, 이름 붙일 수 없는 최초의 놀빛을 찾아 인사를 나누지 못하고 떠나온
그 테이블에
내가 쓰지 않은 문장이 놓여있다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가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다른 물빛 기둥
1 西氷庫 푸른 버스의 줄이 길다
그곳을 빠져 나오세요
사이렌이 도착하는 밤
아청빛 시간이 장소를 발굴하고 있다
아침 비행기는 로마로 향한다 나는 출국 수속 행렬에 서 있다 로마 파르나스 기둥이 서 있다 보이지 않는 붉은 기둥이 서 있다 바티칸 광장 한가운데 줄 서 있다
바티칸은 납빛 공동묘지였다 불타는 광장이었다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였다 베드로 무덤은 텅 빈 성전이었다
2 서빙고 투명한 흰빛 얼음의 불길 창고 얼어붙은 시간이 흘러나온다 다른 물의 신전에서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토요일 등 떠밀린 사람들 그곳으로 걸어가는 사람들 이제 다시 초록의 빛으로 보랏빛 어둠으로
3 서빙고 서빙고
차고 목마른 목소리
흰 애드벌룬으로 떠오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남산 1호 터널 지나 이태원까지 나는 부른다
에우리디케 에우리디케
-계간 『포지션 』 2024년 봄호 발표시
정혜영 시인 / 폭설 1 검은 발자국은 앞에서 걸어가는 모르는 사람의 것
이 순간이 계속되어 온 것 같다
발자국 발자국 앞에 가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사람 고개를 들 수 없고 멈출 수 없고 말 없는 발걸음 누구일까, 궁금하지 않고 궁금하고 나는 어느 영상 속으로 들어와 움직이는 한 장면의 발자국 2 줌 인 줌 아웃 사라졌다 나타나는 누군가의 뒤꿈치 나는 어떤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다 오목 렌즈 안에 갇힌 것 같다 눈송이가 스크린 안으로 들어온다 한 송 이 한 송 이 3 없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순간이 있다 곁에서 누군가 말없이 팔짱을 풀고 걸어간다 검은 눈 위에 하나씩 흰 그림자 검은 발자국 지우면서 한꺼번에 쏟아지는 백지의 눈에 갇힌 것 같다 -계간 『포지션』 2024 봄호 발표
정혜영 시인 /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한다* ㅡ레이크 루이스* 어떤 광경 앞 언어는 사라지고 아무것도 극에서 극으로 향하는 신전의
지붕처럼
되풀이되는 한여름밤 악몽에 갇힌 것 같아 루이스, 추앙받아 마땅할 아름다움 사람들은 그녀의 이름을 호수에게 주었다 아담이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듯이 우리의 언어가 아름다움이 얼어붙는다면 멀리 달아나야 하리라 허공에 음표를 매다는 카프카 미완의 문장처럼 들끓는 불안처럼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 봉우리들 순수한 것들은 제 체온에 놀라 불붙는 수은주가 된다 빅토리아 빙원과 에메랄드 호수 서로에게 귀 기울여 저 먼 곳을 향하는 경사면이 되었다 신전은 비어있고 루이스, 그녀는 호수에 갇힌 눈물이 되었다 아니, 호수는 루이스의 눈망울이 되었다 우리가 아름다움에 눈이 멀어 캄캄한 영원, 투명한 바닥이 보이지 않는다 *릴케의 시 「두이노의 비가」에서 인용. *Lake Louse 캐나다 앨버타주 소재 호수 -월간 『현대시』2023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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