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박정이 시인 / 강은 만삭이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6.
박정이 시인 / 강은 만삭이다

박정이 시인 / 강은 만삭이다

 

 

이따금

철썩거리는 소리가

강의 푸른 등허리를 파고들고 있다

달빛은

손 시린 물소리를 열고

깊은 자궁 어디쯤인가

이미 반짝이는 자국을 찍고 있다

그 자국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썩이며

빛바랜 외등을 닦아 가을 달무리로 걸어놓고

윗목으로 이불을 밀어놓듯 저녁 쪽으로

몇 겹의 어둠을 개켜놓는다

그때, 온 몸이 젖은 통증으로 움츠린 채

영산강 하구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물소리들은

가을 달빛을 따라 상류로 오른다

강은 이미 푸드득거리는 달빛소리로 가득하다

달빛은 강 아랫배에서 자라면서 체중을 늘린다

강은 이미 만삭이다

 

 


 

 

박정이 시인 / 바람의 거울

 

 

지난 시간, 바람의 의미는

단지, 육체의 환각에 드리워져있었다

등비수열처럼 견주고

그 속에 끓임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바람과의 소통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언제나 바람을 새롭게 찾아 헤매고

파괴하고, 재조립하고

그리고 자신을 속이려 들 때면

가을 음표들이 떨어지곤 했었다

그때마다 음표들은 내 맥박처럼 희미해지곤 했다

 

나는 가을을 주워 담아 거울 위에 걸어둔다

바람도 주워 담아 거울위에 걸어둔다

바람의 자신을 풀어내지 못한 채,

바람의 거울을 꺼내 본다

바람을 풀어낸다.

 

 


 

 

박정이 시인 / 미인의 조건

 

 

계절을 잊은 탐색이 가슴을 비워낸다

몸 밖의 수많은 열쇠에 집중해 보지만

혼자만의 열쇠는 자신만 드러낸다

눈물 저 멀리 짙게 붙인 속눈썹에 가려진

차가운 심장의 궤적

몇몇 역사들이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고

주름 잡힌 변곡선으로 도드라진다

어떤 화장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진 얼굴의 잿빛 공간

고통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으로 숨 쉰다

미소의 언어로 포장해 봐도 시간은 흐르고

오직 현재만이 주어진 전부

한 시간 뒤의 공허를 밀도 짙은 이기의 덫으로 덮는다

 

그 많은 꽃 중에서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시들어서 더욱 편안해지는 꽃

하얀 애벌레처럼 촘촘히 박혀

언제까지나 부풀어 오르는 망각의 뒤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오

 

 


 

 

박정이 시인 / 아바의 여인

 

 

하늘끝에 서면 하늘보다 높아 바라볼수가 없는사람

 

바다끝에 서면 바다보다 깊어 보이지가 않는사람

 

아아아아 아아아아 그리운 그사람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가슴에 묻고 살아가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가슴에 묻고 살아가네

 

 


 

 

박정이 시인 / 수서역에서

 

 

꽃잎을 접은 쓸쓸한 어둠이

푸른 피를 증발시키고

얼룩진 말이 무거워 허공에 눕고 싶은 날

폭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내 안에 울음을 풀어 놓고 싶은 날엔

나는 내게 몰입한 그 시간부터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한꺼번에 몰렸던 붉은 수밀도로

안으로만 뒹굴고 있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 처절한 삶의 뿌리에서 벗어난다

늘 휴일의 바람벽에 붙잡혀 몸부림쳤던 알몸의 공허,

오늘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잡념들을 버린 채

내 소소한 사랑을 수서역에 묻는다

 

-한국시인협회 2021. 사화집 《역》

 

 


 

 

박정이 시인 / 유목의 숲에서 놀다

 

 

나는 한 마리의 사슴

조팝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어 다녔으나

그저 숲에서 숲으로 다녔을 뿐

철쭉나무 자목련나무가

결국은 숲이 하나로 연결되는

신록의 숲에 머물렀을 뿐이다

오늘도 조팝나무에 내 허리를 기대고

사월의 신록 한그루에게 연서를 쓴다

(잘 있니? 네 여린 가슴속에 있는

연초록 이파리가 그립구나)

이 숲에서 저 숲으로 고단하게 뛰어 다녔어도

그저 사월의 숲에서 팔월의 숲으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이 숲이 내 집이고 저 숲이 내 길이다

집 없는 방랑자처럼.

 

 


 

 

박정이 시인 / 지금도

 

 

마지막 한 잎을 떨군 것은

베일벗는 신에게 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 입자에 숨겨뒀던 탄생의 비밀을 풀어내리고

제 인내만큼 견디다가 제 울음만큼 버티다가

맨살을 드러낸 늦가을빛의 향기조차

그 의미를 모두 잃었지

분명 예고된 계절의 생명이 탄생할 때를,

아직 십일월이지만 속으로는 끝없는 순환을

계속하고 있었지

내 삶이 꿈이었다면

이 늦가을빛 앞에 눈물 쏟는 건 그 한 잎의 향기가

외롭게 늦가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그냥 멍하니 허공의 바람만을 길어 올리고 있는것.

계절의 끝자락에 떨어졌지만 내게 날개가 있다는 것

또 다시 펄펄 끓는 가을밤의 장작불 같은것들이

고인 울음이 침묵의 결핍으로 터졌지

뭐랄까?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늦가을이

물음표로 남았을 뿐

 

 


 

 

박정이 시인 /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

 

 

봄은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을 안다

 

발길에

컹컹컹

날아오르는 내내 새 한 마리가

내 눈빛이 미끄러진

기억의 벌판 한가운데를 후벼 파며 날아간다

 

울음을 누른 날갯짓으로 왼편 산 중턱에 쳐 박힌

연둣빛 수줍은 기억으로 뒤채이던 새의 수레와 동강난 봄의 씨앗들이

겨우내 묵혔던 무거운 생각을 풀어내고 유빙과 달이 녹아내려 봄의 거울이 된다

봄의 잉태는 환희의 리좀이다

내 몸에 증폭된 멀어지지 않는 물소리처럼

또 다른 순환들과 생명의 고리들, 그리고 꿈틀거리는

봄의 발정이, 직각으로 발기되어 지난계절 형상을 잃은 낯선 바람의 날개로

내 살에 끝린 먼지들은

최초의 파동으로 공유했던 가난한 햇살의 주름들이다

봄은 춤의 날개와 날개의 절정이다

어두운 춤의 발현은 곡선으로 체포되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봄의 몸속을 더듬었다 봄의 중독자처럼,

 

온몸이 젖은 통증으로 움츠린 채 봄의 하구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이다

 

- <열린시학> 2021, 봄

 

 


 

박정이 시인

서울 출생. 2009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시로 등단. 시집 『오후가 증발한다』 『여왕의 거울』 『그늘의 생존법』 『목성의 춤』 등. 제9회 문협 서울 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시 전문잡지 포에트리 슬램 발행인 겸 주간. 포에트리 신문 발행인 겸 편집인, 현대문학신문 주간. 시정문학회 / 강남시문학회회원.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클럽한국본부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