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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이 시인 / 강은 만삭이다
이따금 철썩거리는 소리가 강의 푸른 등허리를 파고들고 있다 달빛은 손 시린 물소리를 열고 깊은 자궁 어디쯤인가 이미 반짝이는 자국을 찍고 있다 그 자국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철썩이며 빛바랜 외등을 닦아 가을 달무리로 걸어놓고 윗목으로 이불을 밀어놓듯 저녁 쪽으로 몇 겹의 어둠을 개켜놓는다 그때, 온 몸이 젖은 통증으로 움츠린 채 영산강 하구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물소리들은 가을 달빛을 따라 상류로 오른다 강은 이미 푸드득거리는 달빛소리로 가득하다 달빛은 강 아랫배에서 자라면서 체중을 늘린다 강은 이미 만삭이다
박정이 시인 / 바람의 거울
지난 시간, 바람의 의미는 단지, 육체의 환각에 드리워져있었다 등비수열처럼 견주고 그 속에 끓임없이 존재한다는 것은 현실과 꿈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 바람과의 소통이 왜곡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언제나 바람을 새롭게 찾아 헤매고 파괴하고, 재조립하고 그리고 자신을 속이려 들 때면 가을 음표들이 떨어지곤 했었다 그때마다 음표들은 내 맥박처럼 희미해지곤 했다
나는 가을을 주워 담아 거울 위에 걸어둔다 바람도 주워 담아 거울위에 걸어둔다 바람의 자신을 풀어내지 못한 채, 바람의 거울을 꺼내 본다 바람을 풀어낸다.
박정이 시인 / 미인의 조건
계절을 잊은 탐색이 가슴을 비워낸다 몸 밖의 수많은 열쇠에 집중해 보지만 혼자만의 열쇠는 자신만 드러낸다 눈물 저 멀리 짙게 붙인 속눈썹에 가려진 차가운 심장의 궤적 몇몇 역사들이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고 주름 잡힌 변곡선으로 도드라진다 어떤 화장으로도 지울 수 없는 그림자진 얼굴의 잿빛 공간 고통은 온전히 혼자만의 것으로 숨 쉰다 미소의 언어로 포장해 봐도 시간은 흐르고 오직 현재만이 주어진 전부 한 시간 뒤의 공허를 밀도 짙은 이기의 덫으로 덮는다
그 많은 꽃 중에서 닿을 수 없는 거리로 시들어서 더욱 편안해지는 꽃 하얀 애벌레처럼 촘촘히 박혀 언제까지나 부풀어 오르는 망각의 뒤편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오
박정이 시인 / 아바의 여인
하늘끝에 서면 하늘보다 높아 바라볼수가 없는사람
바다끝에 서면 바다보다 깊어 보이지가 않는사람
아아아아 아아아아 그리운 그사람을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가슴에 묻고 살아가네
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아 가슴에 묻고 살아가네
박정이 시인 / 수서역에서
꽃잎을 접은 쓸쓸한 어둠이 푸른 피를 증발시키고 얼룩진 말이 무거워 허공에 눕고 싶은 날 폭압적인 현실을 벗어나 내 안에 울음을 풀어 놓고 싶은 날엔 나는 내게 몰입한 그 시간부터 수서역에서 SRT를 타고 여행을 떠난다 한꺼번에 몰렸던 붉은 수밀도로 안으로만 뒹굴고 있던 통증은 어느새 사라지고 내 처절한 삶의 뿌리에서 벗어난다 늘 휴일의 바람벽에 붙잡혀 몸부림쳤던 알몸의 공허, 오늘은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잡념들을 버린 채 내 소소한 사랑을 수서역에 묻는다
-한국시인협회 2021. 사화집 《역》
박정이 시인 / 유목의 숲에서 놀다
나는 한 마리의 사슴 조팝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이 산에서 저 산으로 뛰어 다녔으나 그저 숲에서 숲으로 다녔을 뿐 철쭉나무 자목련나무가 결국은 숲이 하나로 연결되는 신록의 숲에 머물렀을 뿐이다 오늘도 조팝나무에 내 허리를 기대고 사월의 신록 한그루에게 연서를 쓴다 (잘 있니? 네 여린 가슴속에 있는 연초록 이파리가 그립구나) 이 숲에서 저 숲으로 고단하게 뛰어 다녔어도 그저 사월의 숲에서 팔월의 숲으로 옮겨 다녔을 뿐이다 이 숲이 내 집이고 저 숲이 내 길이다 집 없는 방랑자처럼.
박정이 시인 / 지금도
마지막 한 잎을 떨군 것은 베일벗는 신에게 가는 것만은 아니다 그 입자에 숨겨뒀던 탄생의 비밀을 풀어내리고 제 인내만큼 견디다가 제 울음만큼 버티다가 맨살을 드러낸 늦가을빛의 향기조차 그 의미를 모두 잃었지 분명 예고된 계절의 생명이 탄생할 때를, 아직 십일월이지만 속으로는 끝없는 순환을 계속하고 있었지 내 삶이 꿈이었다면 이 늦가을빛 앞에 눈물 쏟는 건 그 한 잎의 향기가 외롭게 늦가을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 그냥 멍하니 허공의 바람만을 길어 올리고 있는것. 계절의 끝자락에 떨어졌지만 내게 날개가 있다는 것 또 다시 펄펄 끓는 가을밤의 장작불 같은것들이 고인 울음이 침묵의 결핍으로 터졌지 뭐랄까? 지금도 거부할 수 없는 늦가을이 물음표로 남았을 뿐
박정이 시인 /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
봄은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을 안다
발길에 컹컹컹 날아오르는 내내 새 한 마리가 내 눈빛이 미끄러진 기억의 벌판 한가운데를 후벼 파며 날아간다
울음을 누른 날갯짓으로 왼편 산 중턱에 쳐 박힌 연둣빛 수줍은 기억으로 뒤채이던 새의 수레와 동강난 봄의 씨앗들이 겨우내 묵혔던 무거운 생각을 풀어내고 유빙과 달이 녹아내려 봄의 거울이 된다 봄의 잉태는 환희의 리좀이다 내 몸에 증폭된 멀어지지 않는 물소리처럼 또 다른 순환들과 생명의 고리들, 그리고 꿈틀거리는 봄의 발정이, 직각으로 발기되어 지난계절 형상을 잃은 낯선 바람의 날개로 내 살에 끝린 먼지들은 최초의 파동으로 공유했던 가난한 햇살의 주름들이다 봄은 춤의 날개와 날개의 절정이다 어두운 춤의 발현은 곡선으로 체포되어 끊어질 듯, 끊어질 듯 봄의 몸속을 더듬었다 봄의 중독자처럼,
온몸이 젖은 통증으로 움츠린 채 봄의 하구에 비스듬히 누워있다
날개보다 몸이 무거운 것들의 사랑법이다
- <열린시학> 2021,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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