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경 시인 / 뿌리의 코드
입술 열고 나오는 첫마디가 클로즈업 될 때까지 혀에는 아직 음운이 없었다. 비로소 젖이 발음되는 그때 피가 돌고 심장이 붉어졌다. 꽃봉오리 같은 입술에 단맛이 흘러들자 낙타 등의 이방인 눈이 밝아지고 약속으로 만든 손가락이 생겨났다. 손가락이 펼쳐 보인 옹알이는 36.5도, 직립보행의 체온을 이불삼아 단잠에 들었다. 잠에 대한 수식어를 달지 못한 꿈은 낮선 겨드랑이에서 성장했다. 젖의 길을 걸어와 처음 만난 이별의 장르 독해되지 않는 흑백 페이지로 접혔을 때 알았다 비극으로 충만한 파지(破紙)에서도 활자로 일어서는 뿌리는 어미라는 것을. 입이 트인 후 열어보던 엄마 젖가슴은 숲을 누비다 뛰어드는 내 혈통을 밝혀 놓은 한권의 책 엄마 숨소리에 꼭 맞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한밤 벌판에 큰뿔 사슴을 풀어 젖을 물린다.
-열린시학 2015년 여름호
수경 시인 / 식물성 잠
생활이 무채색이라서 촉촉한 잠이 필요했다 어찌 알았는지 지인은 작은 숲을 보냈다 유리관 속을 들여다보며 이건 아주 오래된 시간이야,라고 생각하면 나무들이 일제히 수피에 붙어있는 잠을 털어 피톤치드를 내뿜는다 부족한 잠이 사람을 탈 나게 하고 부족한 초록은 지구를 망가뜨리기에 충분하지만 테라리움에는 극소량의 잠들이 숙명처럼 자란다 죽은 듯 그러나 살아 숨 쉬는 숲은 밤처럼 상상의 원천이 되고 분무기로 물을 뿌리면 알갱이의 잠은 기지개를 켜며 미소를 서정적으로 쏟아낸다 잠들이 잠식했으므로 관상용에서 벗어나 식물성으로 채색된다 이 세계가 고장 난 지구로부터 역주행으로 표현되더라도 결코 퇴행은 아니다 잠이 서식하기에 많은 볕은 필요하지 않고 반그늘이면 족하니 일순간 불을 끄고 잠시 잠에 듭시다 태엽이 돋는 정원을 보며 시간이 자라고 있음을 확신한 정원사가 푸른 앞치마를 두른 채 시효가 한참 지난 시곗바늘을 수리하기 시작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1월호 발표
수경 시인 / 유리
그녀
히비스커스 차가 우려질 때 찻잔의 붉은 온기로 알게 되었죠 유리처럼 차가운 그녀도 따뜻함을 그리워했다는 것을
수경 시인 / 앤팅
불구덩이로 나방이 뛰어들 때 다들 미쳤다고 했다 세상의 불의를 태워버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저항이라고 했다
어떤 새는 몸의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해 부리로 개미굴을 들쑤셔 분노가 발산한 개미산을 깃털에 발라 최소한의 죽음을 덮어 생존을 거듭한다
돈바스 지역에 봄이 오려다 말고 얼어 죽은 병사들의 몸으로 역주행했다는데 봄은 죽음의 몸을 뚫고서야 오는 것일까
기사마다 거침없이 달려드는 댓글 광장을 가득 메운 피켓의 군중 극우주의가 되어 맹렬하게 날개를 털어도 뚜렷하지 않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시는 태만이라는 굴 속에 머리를 쑤셔 박는다
수경 시인 / 중독
기어 나왔다고 했다 빨강 속에서 나도 엄마도 아버지도 기어 나왔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남자들도 빨강을 사랑하는 것 같다 아버지는 열두 명을 낳고도 적다는 듯 아쉬워했지 페인트공이 아니었지만 페인트공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는 새를 하나 더 원했지 빨강 모자와 빨강 조끼를 좋아했던 아버지가 생각나요 그러니까 나는 빨강 차를 타고 빨강 립스틱을 바르고 빨강 페인트칠을 하죠 아버지의 꿈처럼 찢어지는 페인트공이지만 페인트공이 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가끔 무채색이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새처럼 멈춰버린 아버지 새처럼 뭉개진 꿈 목구멍으로 밥을 밀어 넣죠 기어 나오면 빨강 기어 나오면 새
계간 『시산맥』2023년 가을호 발표
수경 시인 / 양말의 세계
뒤집은 양말에서 튀어나오는 코끼리 메아리 울타리를 넘어 보려고 형과 나는 깡통을 돌린다 형은 짝짝이 양말을 좋아하고 뒤집은 양말을 돌리면 코끼리가 섞이고 절벽과 내가 마구 섞이고
튀어나오는 불똥의 속도는 어지러워 형과 나는 공을 찼다 불통처럼 양말을 뒤집어쓰고 형은 말했어 정복되지 않은 세계는 없을 것이라고 공을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은 형처럼 짝이 맞지 않은 양말을 뒤집으면 코끼리가 튀어나올까 봐 양말에서 상상만 하고 있었지 엄마가 양말을 던져주며 뒤집을 수 없는 세계라 말할 때 형과 나는 울고 말았다 여전히 공 따윈 믿지 않은 형과 양말 따윈 믿지 않은 내가 깡통을 돌리고 엄마는 뒤집은 양말을 돌린다 불똥이 양말에 구멍을 낼 때 울타리 안에선 불통이 되풀이되고
-일간 『울산광역매일신문』2024년 2월 14일자 발표
수경 시인 / 파쿠르
필사를 하는 손과 사십구 층의 건물을 맨손으로 뛰어넘으려는 손 나에게 있는 손과 동굴에 있는 손 박쥐는 손을 벽에 붙이고 벽은 박쥐를 놓지 않고 동굴 속 박쥐의 신념을 생각한다 신화는 박쥐를 어떻게 묘사해 왔을까 손은 자신의 경계를 감추고 있다 건물과 허들 사이를 뛰어 허공을 넘겨짚고 구름을 딛고 타인의 시선을 빗겨 불가능한 것을 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절망에 모서리가 더해 절벽이 되었을 때 우리에게는 작은 신념이 생긴다 넘을 수 없는 절망은 없다고 디딜 수 없는 사물은 없을 것이라고 신화를 소환하는 일로 손의 기술들을 가끔 선보일 예정이다 모서리를 짚고 뛰어넘는
계간 『문예연구』 2023년 겨울호 발표
수경 시인 / 투명함에서 죽은 새
노을이 꽃물로 흘러간다 씨를 묻은 적도 없고 물을 준 적도 없지만 꽃은 저녁 하늘에 물든다 날개가 활발한 계절에 더 많이 피어나는데 노을이 붉은 건 투명함에 부딪혀 죽은 새를 조문하며 누군가 붉은 꽃을 들고 무음으로 울었기 때문이다 벽은 새를 쉽게 받아들이고 물고기는 바다의 투명함에 흡수되어 산다 이 죽음은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인간에 대한 경고였다는 것을 죽은 새만 모른다 검정 밑줄처럼 새무리가 유리 벽 너머로 흘러가고 있다 핏물의 문을 방금 비껴간 행렬이다 밑줄에서 노을처럼 연주되는 레퀴엠 도대체 누가 슬픔을 투명함으로 치환하는가
-일간 『울산광역매일신문』 2024년 2월 10일자 발표
수경 시인 / 춘분 아토피가 없는데 이맘때가 되면 가렵다 겹친 부분이 특히 가렵고 손톱 밑에서 발뒤꿈치에서 무언가 밀고 나오려 한다 귓속에서는 인기척으로 소란스럽고
사건은 겹친 부분과 굳은살 사이에서 온다
밤새 뒤척이며 창문은 몸살을 앓는다 다들 불면이라고 했지만, 누구도 원인을 알려주지 않았고 담장을 넘어버린 염소를 세어보라고만 했다
꽃샘추위는 그냥 넘어간 적이 없으므로 어젯밤 내가 염소의 뿔을 잡으려고 담을 넘었던 것이 분명하다
겨드랑이를 박박 긁지 않아도 솟아오르는 식물의 뿔 염소의 뿔을 들이받고 일어서는 봄
몸과 봄이 중첩된 때와 곳으로부터 춘분은 온다 -웹진 『시산맥』 2024년 겨울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현채 시인 / 사이와 침묵 사이로 외 6편 (0) | 2025.09.26 |
|---|---|
| 최춘희 시인 / 난독의 구름문장들 외 6편 (0) | 2025.09.26 |
| 박정이 시인 / 강은 만삭이다 외 7편 (0) | 2025.09.26 |
| 한영숙 시인 / 어느 유곽에서 외 6편 (0) | 2025.09.26 |
| 정혜영 시인 / 직사각형의 흙 외 12편 (0) | 2025.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