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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채 시인 / 사이와 침묵 사이로
불행을 짊어지고 태어난 사람이 있었네
그의 몸에서 타인의 냄새가 날 때 나는 그가 낯선 이의 가슴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네
모든 것이 오해와 착각과 거짓이기를 기도하지만
사색이 떠돌아다니는 공원에 가면 아직 못 다한 말들이 플라타너스 사이에서 긴 한숨을 쉬네
매캐한 냄새를 풍기며 도시를 뒤덮는 종소리 함정으로 가득한 세상에
음란한 바람이여! 범람하는 슬픔이여!
그와 함께 지난 계절의 시체를 밟으며 떡갈나무에 묻어 놓았던 사연을 찾아 가네
나무들이 집단 시위하는 골목에서 ‘세상에 빠져 죽지 마요’ 하고 위로 하지만
나는 자본의 늪으로 점점 빠져 들어 사이와 침묵 속에서 흐느끼네
나에게 불행의 손길을 더 이상 내밀지 말아요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고 한 랭보를 흉내 내며 고독과 절망을 노래하지 말아요 운명에 트집 잡으며 악마와 손잡지 말아요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불행이라는 전염병을 퍼트리지 말아 주세요 ‘불행해서 기뻐요’라고 노래하지 말아 주세요
개들이 물어뜯는 창백한 웃음 사이로 시詩의 무덤 속에서 한 영혼이 나를 부르네
이현채 시인 / 3호선
퇴근길 사람들이 나무처럼 흔들리는 구파발행 지하철
한 여자가 앉아 앞에 선
남자의 옷깃을 만지며 입을 삐죽거리다가
눈으로 말을 건네기도 하고 코로 웃기도 하네
얼굴에 어리는 몇 편의 영상 한 소절의 귀고리
퇴근길 구파발행 지하철 손으로 남자의 옷깃에 말을 거는 단발머리
이제 막 꿈틀대기 시작한 잔주름이 출렁이네
-(유심 2015.10월호)
이현채 시인 / 서울의 로자 2022
큰상수리나무 아래 파란 기와지붕 녹색 철재 대문을 지키며 꿋꿋하게 홀로 살아가시는 우리 어머니
오늘도 파를 심고 고추를 심고 고구마를 심고 무 배추를 심고 가꾸고 거둬들인다
한쪽 눈은 치료시기를 놓쳐서 녹내장이 오신 어머니
죽으면 땅속으로 들어갈 걸 누워 있으면 뭐 하냐고 하시며 오늘도 아침 일찍 아픈 허리를 일으켜 밭으로 나가신다
저녁이면 또 노곤해진 몸으로 소파에 앉아서 성경책을 보시다 잠이 드시고 일요일에는 주일예배를 가셔서 자식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우리 어머니
우리는 거실에 시시티브이를 달아놓고 어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들여다본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드시는 모습에 안도의 숨을 쉬고 우리도 잠자리에 든다. 다시 일어나면 스마트폰으로 어머니가 무사히 주무셨는지 확인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형제들
앙상해진 어머니의 어깨 구부러진 허리 정신만은 그 누구보다도 멀쩡하신 우리 어머니
수십 년은 되었을 마당의 감나무를 올려다보며 어머니를 그려보는 아침이다
*
내 나이도 가물가물 어머니의 연세도 가물가물 나이를 잊고 살아가는데 누가 물으면 몇이더라 한참을 생각해야 하는 나
내려와 떨어져 삭정이가 많아 위험해
어머니의 목소리에 아이는 아랑곳없이 초록의 감나무 잎사귀 속에 숨어 먼 미래의 나를 보고 있었던 것일까. 감꽃으로 목걸이도 만들고, 감이 익어갈 때면 감 떨어져 있나 감나무 아래로 달려가곤 했지. 모기들이 윙윙거리며 달라붙는 것 도 아랑곳없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의 감을 올려다본다 지금이나 그때나 따지는 못하고 올려다본다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
순간, 홍시 하나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부서지고 으앙, 울음을 터트리는 아이 하나
어디 있는 거니? 들어와 밥 먹어야지
바람이 후 불면 새처럼 날고싶었던 아이
어머니의 부르심에도 아랑곳없이 먼 산을 바라다본다 붉게 물든 감잎이 우수수 떨어지는 날이다
*
어제는 마이너스를 청산했어요 마이너스를 청산하는데 십오 년이 걸렸어요 이제는 플러스 인생만 살고 싶어요 어머니
*
북가좌6구역 재건축 예정지로 이사를 하고 새 보금자리를 꾸몄다
단독주택 이충집 계단에는 국화화분을 오랫동안 구석에 있던 새장도 꺼냈다
비록 자가는 아니지만 오래되고 낡은 가옥이지만 집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푸른 이끼들도 좋다
작은 마당과 텃밭 그리고 감나무 두 그루에 감이 주렁주렁 열리고 유년의 추억을 소환하기에 딱 좋은 집 오래전부터 시인이나 작가가 살았던 집인 듯 정겹다 몇 날 며칠을 설레는 마음으로 들떠서 눈을 감고 눈을 뜨게 하는 집
삼사 년 후에는 볼 수 없는 이 집, 이 동네의 풍경이기에 더욱 애틋하고 정이 가는가보다
오래된 가옥들 속에는 동네꽃집도 있고, 동화책에 나오는 듯한 은혜슈퍼도 있고 미용실, 철물점, 스마일부동산이 아기자기 자리 잡은 곳, 이곳이 좋다 정원의 나무들도 무성하다
폐지 줍는 할머니 길고양이들의 울음소리, 새소리
모처럼 사람 냄새나는곳 가족들이 모여 앉아 오순도순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곳
창문가득히 눈부신 햇살
새들이 날아와 감나무의 감을 쪼아먹는 아침 감나무 아래 아침을 쓸고 있는 어머니 이 집이 좋다
*
어머니 사랑해요. 막내딸이
*
말하지 말고 침묵하라 한다 애도만 하라 한다
2022년 10월 29일 22시 15분경 해밀턴호텔 왼쪽 오십 미터 길이의 내리막 골목길에서 핼러윈을 즐기려는 다수의 인파가 몰리면서 삼백 명이 넘는 압사 사상자가 발생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은 2014년 4·16 세월호참사 후 팔 년 만에 또 일어나고 그때의 악몽이 되살아난다
이태원로 173-7일대 157명 사망자 197명 부상자
심청전에서 심청이가 아버지를 위해 인당수에 몸을 바치는 것은 예고라도 하고 공양미 삼백석과 바꾸었지만 우리의 희생자들은 그 어떠한 예고도 없이 여행길에 올랐다가 출퇴근길 이태원역 1번 출구로 가다가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가족과 연인과 핼러윈 축제를 함께 하고 싶어서 나갔다가 이게 무슨 청천벽력이란 말인가 조금 전만 해도 웃고 떠들며 함께 했는데 단 몇 분 만에 싸늘한 주검을맞이하다니 그것도 압사라니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참사는 현실이 되고
말하지 말고 침묵하라 한다 애도만 하라 한다
가슴을 치며 울부짖고 발버둥을 치다 실신을 하고 애도행렬은 줄을 서지만 위패도 영정도 없는 분양소에 쌓여만 가는 국화꽃과 추모 메시지들
촛불을 든 중고생들과 시민연대들 분노하여 참사에 대한 책임자처벌 촉구와 윤석열 대통령 퇴진의 목소리는 높아만 간다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나뭇잎들은 우수수 떨어지고
망자들의 영혼은 어디를 떠돌 것인가 남아 있는 부모나 형제들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의 정국은 언제쯤 조용해질 것인가 우리는 누굴 믿고 어디로가야만 하는것인가
*
어머니 내일은 수능 날입니다 날씨가 쌀쌀합니다
감나무의 감들은 언제 따야 할까요
새 한마리 날아와 놀고있네요
-월간 《현대시≫ 2022년 12월호에서
이현채 시인 / 아름다움
파릇파릇 새순이 자라는 봄을 닮은 아름다운 사진들
개나리와 벚꽃, 진달래 꽃처럼 아름다운 기념품들
강렬하고 따사로운 햇살같이 아름다운 사장님의 미소
아름다운 중앙상회는 오늘도 문을 열었다
손님들의 갤러리 장예빈
중앙 학생들에게 재미난 기억이 가득한 가장 오래된 가게
한국 기념품과 한류 사진들이 가게를 꾹꾹 채우고
음료를 사가는 학생들과 기념품을 사는 관광객
손님들의 추억을 만들어주는 갤러리같은 중앙상회
이현채 시인 / 후암동 두텁바위로 69길에 갇힌 우울
한 송이의 우울이 내려갑니다 바람에 넘어지며 내려갑니다 골목골목에 쌓인 낡은 집에서는 자잘한 소문이 자라납니다 창문을 타고 흘러나옵니다 한 송이의 우울이 골목에 갇힙니다 막다른 길입니다 개가 짖습니다 막다른 길에서는 개가 짖어도 길은 뚫리지 않습니다 거미줄이 앞을 막고 있습니다 녹슨 철재 우편함에는 죽은 사람의 우편물이 꽂혀있습니다 문 옆에 두꺼비집이 보입니다 죽은 사람의 나이를 세고 싶습니다 오래전에 버려진 화분들도 골목에 갇혔습니다 유령의 망치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막다른 골목에 갇힌 한 송이의 우울은 납빛 풍경 속에서 짓무른 추억만을 씹고 있습니다 늙은 낙타처럼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이현채 시인 / 한강
자정이 막 넘어가고 있었다 가로등이 중얼거리는 한강변 도시의 돌멩이처럼 어쩌다 오가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킁킁커리고 택시 한 대가 비닐봉지처럼 한강으로 미끄러져 간다 오렌지를 손에 든 술 취한 사내가 한강으로 가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고 한낮에 여러 가게를 들른 도장 박힌 폐지들이 강변에서 새로 핀 꽃인 양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온몸을 흔들어댄다 강은 어둠 속에서 내내 가슴을 울렁거리고 돌아가지 않고 있는 새들은 봄의 가지 사이에서 집을 찾고 있는 중이다 택시가 출렁이며 깜빡이를 켠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다
이현채 시인 / 와우산
자귀나무 꽃피는 칠월 와우산이 울었다. 나의 외로움 때문에 와우산이 발을 동동 굴렀다. 개들이 떨어뜨리고 간 숨결을 따라 죽은 왕의 무덤을 걸었다. 쓰러진 참나무와 회말새 나무가 말을 걸었다. 침묵을 지키며 약수터를 지나 공민왕 사당을 걸었다. 아이들을 보내고 늦은 밤, 와우산의 공터에 앉아 와우산의 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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